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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48)화 (148/172)



<148>

“네리아 아가씨. 그런데-”

란타나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 되었든 받아쳐 주지.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걷고 있을 무렵이었다. 뒤에서 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께서 제 말이 끝나자마자 움직이시는 바람에 같이 보고드리지 못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가면서 들을게. 뭔데?”

“황명서의 수신자가 아가씨가 아니라, 듀이 경이에요.”

“…응?”

뜻밖의 이야기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황명서를 받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심지어 듀이?

“사샤, 그게 정말이야?”

“네. 내용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황명서의 겉면에 적혀 있던 이름이 듀이 경이 확실했어요.”

“…….”

신경이 곤두섰다. 내가 아니라 듀이를 건드렸다고? 방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불쾌함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꼭, 라일라 같은 짓을 하네.”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은 란타나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황명서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니까.

그리고 로비에 도착하여 황금색 편지의 내용물을 전부 확인했을 때,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에 바득 이를 갈고 말았다.

“듀이에게, 다음 주부터 마수 제거 의무 복무에 따른 북부 파견을 명령한다고?”

지금 나랑 장난해?

다리스의 기사들은 제국 곳곳의 마수들을 퇴치하기 위해 일정 기간 파견을 나가게 되는데, 제국의 기사라면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의무적인 소임이다.

그러나 파견 기간이 최소 2년 이상으로 긴 만큼, 파견 시기는 가급적 본인이 희망하는 때에 맞춰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당장 다음 주부터 북부로 떠나라며 강제로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란타나, 그 인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가지고 잘도 유용하게 써먹는군.’

헛웃음을 내뱉었다.

듀이는 더 설명이 필요 없는 발렌티스 가문 최고의 전력이자, 나를 지켜 줄 호위 기사이다.

란타나와 확실한 적대 관계가 된 뒤, 황태제의 안전은 염려하면서도 정작 내 신변에 관한 걱정은 크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듀이가 내 곁에 있기에 자객 같은 외부적인 위험 요소에서 무조건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수 제거 의무 복무 제도를 핑계로 듀이와 나를 물리적으로 떨어트려 놓겠다고?

‘…이 뱀 같은 인간 같으니라고.’

란타나의 교활함에 짜증이 치솟았다. 하지만 듀이가 황명서를 받게 된 경위 정도는 알 것 같다.

이미 황제는 ‘네리아 발렌티스를 서궁의 시녀로 임명해 달라’는 란타나의 부탁을 물린 적이 있다. 그러니 아이를 가진 디르케의 두 번째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겠지.

게다가 제국의 북부는 마수들로 인한 피해가 큰 지역이고, 듀이는 평범한 기사가 아니다. 북부 제국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광전사인 듀이를 파견한다는 명분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아가씨, 어쩌면 좋지요? 황명인 이상은 따르지 않을 수도 없지 않아요? 그럼 듀이 경은 어떡하죠?”

“…황명을 거둘 수는 없겠지만, 파견 시기를 1년쯤 유예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대답했다. 말 그대로 유예. 외부 파견을 1년 미루는 것뿐이지만, 이 정도라도 해결책으로는 충분하다.

우선은 란타나와의 분쟁을 1년씩이나 끌 생각이 없는 데다, 만약 싸움이 길어진다고 해도 1년이면 그사이에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샤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예가 가능하다고요? 황제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셨는데도요?”

“응. 지금이야 파견 시기나 일정을 정하는 일은 기사 당사자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 주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거든.”

의아해하는 사샤를 위해 제국의 역사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기사들의 처우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200년 전만 해도 기사들의 외부 파견은 황궁 기사단 측의 일방적인 통보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황궁 기사단의 수뇌부가 정하는 일이라도 최종 명령은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내려졌기 때문에, 일반 기사들에게는 거부 권한이 없었어. 그렇지만 파견 시기를 미룰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거든.”

“그 방법이 대체 뭔가요?”

“그건…….”

“그건? 아가씨?”

“…….”

사샤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며 계속 질문했으나, 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무척이나 심란하게 만드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방법이.”

생각이 많아져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다. 나는 선 채로 팔짱을 낀 채, 복잡한 기분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사 본인의 결혼.”

정말이지 아까부터 시작된 생각이 도무지 끊이지를 않았다. 이러다가 내 머리가 폭발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

발렌티스 백작가의 최고 기사가 강제로 수도를 떠나야 할 위기에 처했다.

이 사실은 가문 차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할 긴급한 사안이었기에, 때마침 당일에 예정되어있던 가문 회의에 이번 문제가 안건으로 올라왔다.

“듀이 경을 북부로 보낸다니요? 절대 안 되지요. 저희 가문뿐만이 아니라 황태제 전하의 전력에도 큰 손실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네리아 님은 대단하십니다! 이야기를 듣고 저도 알아보았더니, 정말 그런 법령이 있더군요. 결혼을 앞둔 미혼 기사에 한해 유일하게 한 번 파견 시기를 미룰 수 있다고 말이지요.”

“결혼은 인생의 중대사인 만큼 황가 측에서도 당사자를 배려해 준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특별히 필요나 실용성이 없는 조항이라 아는 사람이 많이 없는데, 네리아 님은 대체 어떻게 아셨던 겁니까?”

“저는 뭐.”

‘동생인 루이케가 기사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루이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본 것이지만…….’

그러나 이 사실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대답했다.

“그거야 오랜 공부의 결과죠.”

“사생아 누명을 써 핍박받으시던 시절에도 공부를 해 오셨다니, 역시 네리아 님이십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자, 그래서 말인데.”

사람들에게 찬사를 듣는 일이야 익숙한 일이었기에 심드렁하게 듣고 있었는데, 테이블의 중간에 앉은 가신이 화제를 바꾸려는 듯 손을 들고는 발언했다.

“듀이 경의 혼사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연하게도, 그 문제였다.

“이미 여러 가문에서 혼담이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적당한 곳을 고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반대입니다. 듀이 경 같은 인재를 다른 가문과 발을 걸치게 할 수는 없어요. 발렌티스 가문의 방계 여식과 이어 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마침 제 딸아이가 올해 성년이 되었는데…….”

“그런 식이라면 제 둘째도 결혼 적령기가 되었습니다!”

“아니, 경의 둘째는 이미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다른 가문의 영애와 혼사를 추진해, 그 가문과 동맹을 맺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요.”

듀이를 누구와 결혼시킬 것인가.

이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문제에 회의 테이블이 시장 바닥만큼이나 소란스러워졌다. 정작 듀이는 이 자리에 있지도 않건만, 본인의 의사는 배제된 논의였다.

나는 상석에서 침묵한 상태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까부터 할 말이 있었는데,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건 듀이 경의 생각이 아닙니까? 결혼 상대는 본인이 고르게 하도록 해야지요.”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충성스러운 듀이 경이라면, 네리아 님께서 정해 준 상대와 군말 없이 혼사를 치를 것 같은데요?”

“차라리 듀이 경을 회의실로 불러오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네리아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직감했다. 지금이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라고.

테이블 아래에 숨겨 놓은 두 손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제국의 주인인 황제를 만났을 때도 말이 나오지 않아 버벅거린 적은 없었는데.

“…듀이 경의 결혼 상대로 적당한 인물을 알고 있어요.”

“적당한 인물이요? 그게 누구입니까? 저희는 네리아 님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그건.”

치마 위에 올려져 있던 주먹을 꽉 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바로 저예요.”

“예……?”

“다들 못 들으셨어요? 저라고요. 저, 네리아 발렌티스요.”

“…….”

“…….”

아까까지만 해도 시장 통처럼 시끄럽던 회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창문을 두드리던 미세한 바람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가신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긍정적인 쪽은 아니었다.

귀가 고장 나기라도 했다는 듯이 아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가신들을 보며, 나는 드디어 마음이 정리된 기분이 되었다.

‘드디어 말했어.’

부정적인 분위기가 회의실을 메우고 있었으나 오히려 후련했다.

마음을 깨닫는 건, 굳이 극적인 상황 속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뭐, 듀이가 수도를 떠날 위기에 처한 것도 극적이라면 극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늘 황명서를 받은 후.

어쩌면 듀이를 누군가와 결혼시켜야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과연 누구와?’라는 문제였다.

혼사가 성사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인 듀이를 배우자로 원하는 곳은 많았으니까.

하지만 듀이가 다른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되는 장면을 상상했더니, 어째서인지 화가 났다. 란타나가 수작을 부려 황명서를 받게 되었을 때보다도 더.

‘그건 절대 안 돼.’

듀이와 함께 황궁으로 갔을 때, 황제궁의 시녀들이 그에게 접근하는 장면을 보며 생전 처음 경험하는 불쾌함을 느꼈었다.

듀이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니까. 남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 스스로도 인지할 수 있었던 명백한 질투였다.

하지만 질투심을 느낀 이유가 단지 듀이가 나에게 가족 같은 사이라는 이유뿐이었을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듀이의 자리에 남동생인 루이케를 대입해 보니 답은 쉽게 나왔다.

만약 루이케가 다른 영애와 반드시 결혼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동생이 결혼 상대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응원했을 텐데.

하지만 듀이는 달랐다.

돌이켜 보면,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듀이가 선물해 준 값싼 나비 머리핀을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중한 보물처럼 여겼을까?

나는 왜 내가 공격을 당했을 때보다, 듀이가 공격의 표적이 되었을 때 더 화가 났을까?

듀이가 기억을 잃지 않았을 때, 어째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을 정도로 기뻤을까?

함께 있으면 즐겁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며, 함께 있으면 안심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아직 이 감정의 이름을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언제나 당연한 듯이 함께했기 때문에 깨닫는 게 늦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듀이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네리아 님, 하지만 가주가 되실 분께서 기사와 결혼이라니, 재고해 보시는 것이 어떨는지…….”

“재고요? 제가 왜요?”

그랬기에 나는 머뭇머뭇 입을 열며 반대를 입에 담는 가신들을 향해 산뜻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듀이에게 ‘너, 나랑 결혼해 줘야겠어.’라고 말하기 전에, 적어도 가문에서 반대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도록 정리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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