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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47)화 (147/172)



<147>

니나렛은 다리스 제국에서 황제에게 무례를 저질러도 문제가 되지 않는 단 한 명의 사람이었다.

“폐하는 지금 식당에서 디르케와 함께 계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응, 알겠어요!”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니나렛은 콧김을 내뿜으며 황제궁의 복도를 걸어 나갔다. 총총걸음이기는 했지만, 기세만은 마치 전쟁터에 출병하는 전사를 방불케 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응! 다들 오늘도 힘내!”

선약도 잡지 않은 억지 방문이었지만, 니나렛의 발걸음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행동이 익숙하다는 표정들이었다.

‘뭐, 니나렛이 가끔은 말도 없이 폐하의 집무실로 들이닥치는 일도 종종 있다고 했으니까.’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 자랑한다든가, 나에게 배워서 만든 수예품을 선물로 드린다고 한다든가.

하지만 황제 폐하는 업무를 방해받으면서도 되레 좋아하셨다고 한다. 드디어 딸이 자신을 가까이 여겨 주는 것 같아서 기쁘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니나렛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황제궁의 식당 앞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 작전대로, 알지?”

니나렛은 내 귓가에 그렇게 속닥이고는, 또다시 콧김을 내뿜으며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들였다.

“오! 니나렛이 왔구나!”

호화로운 식당의 커다란 테이블에 황제와 란타나 두 사람이 함께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폐하는 니나렛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워하며 입가에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내 딸, 아빠와 같이 식사 들도록 하겠느냐? 시녀장은 어린이용 식사를 준비하도록!”

“아뇨, 오늘은 아빠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어요!”

“부탁?”

“우리 선생님이 디르케의 시녀가 된다고 했어요. 저는 싫어요! 명령을 없던 걸로 해 주세요!”

니나렛이 양손을 꼭 잡고는 화가 난 목소리로 호소했다.

“니, 니나렛?”

“네리아는 제 선생님이에요! 제 선생님을 뺏어 가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그건…….”

대국을 다스리는 군주도, 대군단을 거느린 장군도, 자식에게만은 한없이 약해지고는 한다.

니나렛의 항의를 들은 황제는 차마 아이를 나무라지 못하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나는 몇 발자국 뒤에 떨어진 장소에 서서는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차마 니나렛을 말릴 수 없었다는 난감한 기색을 띤 채였다.

이는 니나렛이 말한 작전이었는데, 일개 귀족인 내가 나섰다가는 황제에게 화를 살 수도 있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한 니나렛의 배려였다. 네리아 선생님은 폐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고.

한편, 테이블에 앉은 란타나는 유유한 미소를 짓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어린아이를 방패로 삼는 거예요?’라는 눈빛이 느껴졌으나, 뭐 어떤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무기로 휘두른 건 그쪽이 먼저였으니, 그다지 마음에 찔릴 것도 없었다.

“아빠? 그렇게 해 주실 거죠?”

“…….”

사랑하는 딸과 자신의 아이를 배고 있는 정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버리고 말았다. 황제의 얼굴에서 심각한 고뇌가 느껴졌다.

귀족들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에서는 단호한 결정을 내려 주는 분이시거늘. 폐하께는 정무를 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귀여우신 황녀 전하.”

결국, 란타나가 나섰다.

“폐하께서 곤란해지셨잖아요.”

황족에게 무례를 저지를 순 없으니, 란타나는 더 이야기하지 못했으나 대신 그녀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그럼 못써!’라고.

“…란타나 님.”

니나렛의 시선 역시도 황제를 떠나 란타나에게로 향했다.

황녀궁을 나설 때만 해도 ‘그 인간, 선생님의 사업을 방해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하고 화를 내더니, 지금은 란타나를 보면서도 애처롭게 울먹이기만 할 뿐이었다.

“저는 동생이 생기는 게 너무 기뻐서 그저께부터 밤마다 달님을 보며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라고 소원을 빌었는데, 란타나 님은 제 선생님을 뺏어 가려고 하다니! 정말이지 너무해요……!”

“어머. 황녀 전하, 저는 네리아 양을 뺏어 가는 게 아니랍니다! 다만 눈 색깔이 같은 네리아 양이 제 가족처럼 느껴져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곁에 두고 싶었을 뿐이에요. 저는 가족이 없잖아요?”

거의가 그렇지만, 란타나의 여유로운 표정은 무너지는 일이 잘 없었다.

“저는 이미 몇 년 전에 아기를 유산한 일이 있어요. 이번에는 그런 슬픔을 겪지 않도록 마음의 안정을 가지려는 것이랍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신 폐하께는 그저 감사드리기만 할 따름이에요.”

“그, 그건!”

“귀여우신 전하, 아까 동생이 생기는 게 기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절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그리고 건국제 때, 네리아 양이 황태후 폐하의 시녀가 되었을 때는 반대하지 않으셨잖아요. 저, 조금 서운해지려고 해요.”

과거의 슬픈 사연부터 건국제 때 있었던 비슷한 예시까지. 란타나의 입에서 잘도 술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거기에 그녀의 처연하면서도 슬픈 미소까지 더해지자, 식당의 분위기는 마치 니나렛이 철없이 떼를 쓰는 것처럼 돌아갔다.

제국 황제의 식사 시간인 만큼 주변에 늘어선 시종과 시녀 등, 식당에는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새 니나렛은 임신한 평민 출신 정부를 괄시하는 나쁜 아이가 되어 있었고, 여론과 승기가 란타나에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끝이 아니다. 이 정도로 패배하고 물러서기엔 니나렛이 겪어 온 풍파가 너무 심했거든.

“…….”

니나렛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테이블 앞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니, 니나렛?”

그러고는 어느새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그래도 싫어요…….”

“니나렛, 울지 말거라! 시종장은 어서 손수건을 가져오게……!”

“나, 나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톨이였어요. 네리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 지금도 황궁에서 쫓겨날까 걱정하면서 외톨이로 지내고 있었을 거예요.”

과거의 슬픈 사연은 니나렛도 란타나 못지않다. 황제 폐하의 얼굴에도 죄책감이 들어서고 있었다.

“네리아 선생님은 제 가족이에요. 저한테서 가족을 뺏어 가지 말아 주세요. 미안해요, 란타나 님. 제발 부탁이에요…….”

울면서 감정에 호소하기. 니나렛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어른인 란타나가 아이를 상대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을 테니까.

“제발요……. 네?”

니나렛이 소리를 높여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연기인 걸 알고 있는데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다.

이런 문제는 주변의 분위기를 어떻게 만드느냐의 싸움이다.

어느새 식당 안의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니나렛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사람부터 같이 눈물을 훔치는 자들까지 다양했다.

일부는 란타나가 파렴치한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기도 했다. 이제 나쁜 사람은 니나렛이 아닌 란타나가 되어 있었다.

뭐, 니나렛이 울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결론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크흠…….”

니나렛과 란타나 사이에 끼여 곤란하던 황제 폐하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란, 미안하오. 내가 제국을 전부 수배해서라도 분홍색 눈을 가진 사람을 데려와 줄 테니, 이번은 란이 이해해 주면 안 되겠소?”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란타나는 생긋, 웃고 있기는 했으나 확실한 포기 선언이었다.

나는 니나렛과 눈을 마주쳤다. 아이가 나만 볼 수 있는 각도에서 씩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흥! 우리 선생님을 넘봐? 욕심도 많아. 어림없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괜찮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싫었으니까!”

황제 폐하는 나에게 내렸던 황명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니나렛은 우쭐한 듯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선생님의 뒷배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었잖아? 또 디르케가 선생님을 괴롭히면 나한테 얘기해! 알겠지?”

“네, 그럴게요, 전하.”

나는 니나렛의 손을 잡고는 황제궁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니나렛 덕분에 란타나의 수에 말려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나를 보며 확실한 적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분명히 조만간에 다음 공격이 들어올 거야.’

그런 만큼 나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황제궁의 밖을 나서려던 때였다.

‘어? 저 여자애는…….’

입구 근처에 멀뚱멀뚱 서 있는 주황색 머리의 소녀를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름이 ‘칼로스 하스켈’이었던가?

란타나가 미인 수집으로 데려와 서궁의 시녀로 만들어 놓은, 나와 같은 벨라 일족으로 추정되는 소녀였다.

“…….”

“네리아 선생님? 안 가?”

“아, 죄송해요, 전하.”

니나렛의 재촉에 미안한 듯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황제궁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칼로스라는 이름의 소녀를 한 번 더 힐끗 바라보면서였다.

***

디르케의 시녀가 되라는 명령이 취소된 뒤.

금방이라도 란타나에게서 새로운 공격이 들어올 줄 알았건만, 의외로 며칠간은 아무런 일도 없이 잠잠했다.

“그렇지만 사건이란 건, 언제 생길지 모르는 법이니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저택의 집무실에 앉아 레오니트에게 받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나와의 대화가 끝난 후, 란타나의 시종 렌의 뒤를 캐 보았으나 이번에도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

말없이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란타나가 데리고 있는 부하가 사람을 마수로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려고 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너무 허황된 일이기 때문이겠지.’

소문이란 것도 어느 정도는 현실성이 있어야지 사람들 사이에 퍼질 수 있는 법이었다.

‘소문이라도 퍼트려서 빈틈을 만들어 보려고 한 건데…….’

역시,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란타나를 공격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칼로스 하스켈 양.”

란타나의 뒤를 이어, 황제 폐하의 정부가 되고 싶다던 소녀였다.

‘하지만 열심히 애써 봐야 정부가 되지는 못할 텐데.’

란타나가 과거에 데려왔었다는 다른 소녀들처럼, 칼로스 역시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말 테니까.

그러니, 잘만 하면 칼로스를 같은 편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당장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칼로스에게도 란타나는 결국 적이다.

‘란타나의 비밀을 칼로스 양에게도 알려 줄 수만 있다면.’

제물로 데려온 소녀가 대단한 정보를 알고 있지는 않겠지만, 서궁의 내부인이라면 확실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일단은, 칼로스를 우리 쪽으로 포섭하기 위해 그녀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했을 때였다.

“네리아 아가씨! 황궁에서 황명서가 도착했어요!”

“뭐라고?”

집무실을 찾아온 사샤가 나에게 중요한 소식을 알려주었다. 또 황명서가 왔다니, 그건 분명-

“디르케의 짓이겠구나?”

뭐, 어차피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니까.

나는 조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란타나가 과연 무슨 일을 꾸몄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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