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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46)화 (146/172)



<146>

“오해였나요? 그럼, 다음에 제가 네리아 양을 부른다면 저를 찾아와 줄 건가요?”

란타나가 분홍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에게 물었다. 어쩐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공포와 원망에 휩싸여 추락하던 이 세계의 내 모습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가엾은 네리아.

그 광경을 생각하자 또다시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그녀를 향해 대답했다.

“네, 물론이에요! 바쁘지만 않다면 란타나 님을 찾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고마워요. 기쁜 이야기네요.”

다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무조건 거절하겠다는 의미였지만, 란타나는 기분이 상하지도 않은 듯이 활짝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란타나 님은 어쩐 일로 저를 부르신 건가요?”

“으음, 섭섭해라. 딱히 이유가 없어도 이렇게 만나서 즐겁게 수다를 떨 수도 있지 않아요?”

“…….”

개소리. 내가 왜?

굳이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짓자, 그녀가 내 앞에 놓인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쪼르륵. 액체가 낙하하며 도자기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물론 네리아 양을 부른 이유가 없지는 않지만요. 어쨌거나 마시도록 해요. 이 차는 황제궁의 시종이 준비한 것이니 독이 들어 있을까 의심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의심이라니,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생각도 못 했던걸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뭐, 그 말은 틀리지 않을 거다.

그녀라면 황제궁 안에서 음식에 독을 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무언가를 입에 넣고 싶은 기분도 썩 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차를 마시는 시늉만 하고서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을 때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네리아 양. 그 책. 읽었죠?”

“…네? 책이요?”

“네리아 양이 아네모네 궁에서 가져간 그 책이요! 듣기론 어제 피샤 자비에 님이 발렌티스 저택을 방문했다던데, 그 책을 번역해서 가져다준 게 아닌가요?”

“…….”

란타나가 테이블 위로 몸을 빼며, 또다시 눈을 빛냈다.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가 말하는 ‘책’이 벨라 일족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는 것쯤은 안다. 다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화제에 올릴 줄은 몰랐을 뿐.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었기에 가능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원래도 저렇게 직설적인 사람이 맞았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네, 읽었어요.”

“책에 적힌 내용들 말이죠. 거짓말 같지만 놀랍게도 전부 사실이랍니다. 어땠나요? 저는 네리아 양의 감상이 궁금해요.”

“…….”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걸 대놓고 묻는 그녀의 용기와 뻔뻔함이 진심으로 대단해서 나도 모르게 조소가 지어졌다.

“감상이요? 고작 그따위의 이유로 내 어머니가 살해당해야 했었나. 우선은 이 정도?”

“우선? 그러면 다음은요?”

“이런 짓까지 벌여 가며 란타나 님이 이루고 싶은 소원이 뭘까. 아무래도 그거겠죠.”

나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며 그녀를 삐뚜름하게 바라보았다.

“저번에 아네모네 궁에서 말씀하셨죠. 란타나 님께는 목적이 있다고요. 그게 뭐예요? 배 속의 아이를 제국의 황제로 만들어 권력을 잡고 싶어요? 아니면 죽은 사람이라도 살리고 싶으신 거예요? 얼마나 대단한 소원일지 궁금해요.”

“그건 비밀이에요! 네리아 양이 저와 같은 편이 되어 줬다면 알려 줄 수도 있었겠지만, 아니잖아요?”

“란타나 님, 그 ‘같은 편’이라는 소리는 이제 좀 집어치워 주지 않으실래요? 납치해서 죽이고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어머나, 그 일. 머리를 다치고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그날의 기억을 되찾은 거예요?”

란타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요? 네리아 양을 죽이려고 했던 건 그때 한 번뿐인데다가, 지금은 건강하고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란타나의 얼굴에서 죄책감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 부모님을 죽였다고 순순히 인정했을 때와 똑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 평범한 인간들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고.

“대신 사과의 의미로 알려 줄게요. 제 소원이나 목적이 무엇인지는 비밀이지만, 적어도 네리아 양이 말했던 두 가지는 아니랍니다.”

“그것참 감사한 일이네요.”

“별말씀을요.”

그녀와 나, 두 사람이 내뱉는 웃음소리가 테이블을 넘어 야외 정원 전체에 퍼져 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였다.

“그렇다면 네리아 양은 앞으로 저를 방해할 생각인가요?”

“대답하지 않아도, 제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그렇군요. 유감이에요. 이제 저희는 정말 확실한 적이 되겠군요.”

“방금 이야기에서 ‘이제’라는 표현은 틀렸다는 걸 지적해 드리고 싶네요.”

“고쳐 줘서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란타나가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우아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동안 테이블에는 잠깐 동안 침묵이 들어섰다.

“…….”

“…….”

그래서, 란타나가 날 찾은 진짜 이유는 대체 뭘까? 근처에 피어 있는 꽃 덤불을 힐끗 바라보며 짧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녀가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걸까. 달칵- 란타나가 찻잔을 내려놓은 것과 그녀의 입이 열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지요? 제가 네리아 양을 부른 건, 해 줄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에요.”

“네, 말씀하세요.”

“내일부터 서궁으로 와서, 제 시녀가 되도록 하세요. 기간은 제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랍니다!”

“…….”

뭐라고? 시녀? 란타나의?

이것 역시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져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이 구겨지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죄송하지만, 고사하겠습니다.”

당황스러운 것과 별개로 해야 할 대답이 정해져 있기는 했다. 내가 란타나의 시녀가 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물론, 벨라의 칼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거주하는 서궁을 탐색해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은 아니다.

특별히 무력을 가진 것도 아닌 내가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서궁에서 사고사로 위장당해 목숨을 잃고 그녀의 제물이 될 수도 있다.

란타나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목숨까지 걸고 위험부담을 질 이유는 없었다.

“저는 생일이 지나면 정식으로 발렌티스 가문의 가주가 될 예정이기에 무척 바쁘거든요. 란타나 님을 도와드릴 수 없어 진심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미안하지만, 이건 부탁이 아니에요. 애석하게도 네리아 양에게는 선택권이 없답니다.”

웬 헛소리야?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란타나가 황족이 되는 건 아니다. 그녀에게는 귀족인 나에게 강제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도 란타나는 당연하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잠깐, 설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어떤 가능성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네리아 양도 알아차린 것 같네요. 역시 전 눈치 빠른 사람이 좋아요.”

란타나가 쿡쿡 웃고는 옆에 놓여있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듯 황제궁의 시종장이 테이블 앞으로 나타났는데, 그의 손에는 황명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받으십시오. 내일부로 레이디 발렌티를 서궁의 시녀로 임명한다는 황제 폐하의 칙서입니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내가 황명서를 받아들자, 시종장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전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야?

“제가 폐하께 부탁드렸어요. 네리아 양은 저와 눈 색깔이 같잖아요? 마치 제 가족 같아서, 네리아 양과 함께 있으면 마음 안정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더니, 폐하께서 그렇게 결정해 주셨답니다.”

“아… 그러셨어요?”

“그럼요! 이렇게 되었으니, 내일부터 잘 부탁드리겠어요. 설마 한 가문의 가주씩이나 될 분이 감히 황제 폐하의 명령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요?”

“물론이지요. 란타나 님은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이해해 줘서 다행이에요! 그러면 내일 제 궁에서 만나도록 할까요? 저희 서궁의 식구들은 모두 네리아 양을 환영할 거예요.”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따라서 웃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남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릴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

란타나가 아이를 핑계로 황제를 움직였다고?

그런데 나도 황제 폐하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그것도 나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꼬마를 말이지.

“네. 기대되네요.”

나는 니나렛 황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흔쾌히 대답했다.

***

“뭐? 네리아 선생님이 서궁의 시녀가 된다고? 안 돼! 절대 안 돼-!”

다음 날, 늦은 오전.

황녀궁을 찾아 란타나와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하자, 니나렛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에서 불을 뿜어냈다.

“네리아 선생님이 가주가 된다고 해서 바쁠까 봐, 난 예법 수업 시간도 줄였는데 디르케는 선생님을 시녀로 삼아 독점하겠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내가 그 꼴을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전하,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해?”

어느새 볼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니나렛이 오리처럼 입을 삐쭉였다.

“그런데 선생님. 서, 설마 디르케의 시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되고 싶지 않아서 전하께 도움을 부탁드리려고 한 거예요.”

“응! 나만 믿어!”

너무 대놓고 의도를 드러낸 발언 같지만, 니나렛과 나 사이에서는 원래부터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랬기에 이 사랑스러운 꼬마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나에게 달려와서는 폭 안겼다.

“선생님, 나보다 디르케랑 더 친해지면 절대 안 돼. 알았지?”

“그럴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어쨌거나 이번 일은 내가 금방 해결해 줄게! 시녀장, 요즘 아빠가 계속 디르케랑 같이 점심을 먹는다고 했었지?”

“네, 전하. 오늘도 조금 뒤에 황제궁에서 두 분의 점심 식사가 계획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마침 잘됐네. 이런 귀찮은 일은 빨리 해결하는 게 좋지. 우리도 가자! 좋은 작전이 생각났거든.”

바로 출발하면 식사 시간에 맞출 수 있겠다며, 니나렛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귀엽지만 믿음직스럽고, 작은 악마같이 영악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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