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생각해 보면 황녀궁 앞에서 란타나의 시녀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녀는 내가 책을 건네주고 있는데도 받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더 고민해 볼 것도 없지. 일부러 뺨에 생긴 상처를 드러내며 내 반응을 확인하러 온 것이 확실했다.
그들이 납치하려고 했던 일개 평민이 귀족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들이 취할 행동이 달라졌을 테니까.
“…뻔뻔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아니, 인간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다. 그 당시에 네리아가 느꼈던 감정들이 나에게도 아직 생생하게 남아 괜히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세계의 나는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가 무사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었다.
“네리아는 뒤늦게라도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 위험을 겪은 일이 아니더라도, 네리아는 언젠가 다른 계기로 인해 마음을 고쳤을 게 분명했다.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지만 결국은 죽고 말았다. 새 삶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게다가, 만약 네리아가 그대로 납치를 당했더라면 란타나의 제물이 되어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겠지.
가족도 친구도 없는 평민 하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봤자 찾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친구가 되자, 같은 편이 되자, 이따위 소리를 해?”
실제로 납치해서 죽이려고 했던 상대에게? 란타나는 도대체 사람을 어디까지 기만할 셈이지?
“미친 인간 같으니라고.”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가여웠다. 이 세계의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목표가 있고,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 안 둬.
란타나 역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절대 이루게 되지 못할 거라고.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다짐했다.
***
다음 날은 레오니트를 만나기 위해 황태제 궁을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발렌티스 님. 전하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전번에야 황태제와 내가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숨기는 상황이었으니, 레오니트를 찾으면서도 안부 인사를 가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대회의장에서의 일로 그와 내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났기에, 나는 황태제궁 사람들에게 깍듯한 대우를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황태제 전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일이 이렇게 되니, 자주 얼굴을 뵐 수 있게 되어서 그건 기쁘군요. 레이디 발렌티스.”
“영광입니다, 전하.”
나는 적당히 웃는 얼굴로 레오니트에게 화답하고는 그의 맞은편에 테이블에 착석했다.
“듣자 하니, 수도의 중앙 귀족들은 벌써 세 군데로 파벌이 갈릴 조짐이 보인다고 하지요?”
“네, 레이디의 말씀이 맞습니다.”
가볍게 꺼낸 화두에 레오니트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군데’라고 한다면, 레오니트를 따르는 일파와 란타나를 따르는 일파. 그리고 헤론 후작을 필두로 한 중립파를 의미한다.
수도의 정계는 지금까지 특별한 구심점이 되는 대표가 특별히 없이, 다수의 파벌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란타나의 임신으로 판도가 급격하게 변하게 되었다. 만약 그녀가 아들을 낳기라도 한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차기 황좌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어.’
황녀인 니나렛은 모친인 황후가 사망하며 아이를 근본적으로 지지해 주는 세력이 없다.
하지만 란타나는 다르다.
그녀는 이미 자신을 따르는 귀족 무리를 거느리고 있다. 게다가 황제 폐하는 예전부터 자신의 뒤를 이을 황자를 원해 왔다는 의사를 보인 바가 있었다.
레오니트가 지금의 자리를 잃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 이제부터는 신변을 더욱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레이디께서 걱정해 주시니,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암살 시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라는 뒷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레오니트는 내 의사를 이해하고는 시원스레 긍정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겠지만요. 그런데 편지에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셨지요? 어떤 문제이십니까?”
“…디르케의 시종과 관련된 일이에요. 그 회색 머리를 한 사람, 이름이 렌이라고 했었는데요.”
슬슬 본론을 꺼낼 때다.
나는 입을 열어 그들이 사람을 이용해 마수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란타나의 시종이 세사르의 마탑 동기인 렌샤와 동일 인물일 수 있다는 것까지 전부 포함해서였다.
“사람을 마수로 만든다? 그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니… 놀랍군요. 믿기 힘든 일입니다.”
역시나 레오니트는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는 놀라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레이디 덕분에 그동안 몰랐던 일들을 알게 되는군요. 광전사의 존재부터 그렇게 위험한 고유 마법이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저 또한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걸요. 그래서인데, 그 시종의 뒷조사를 할 수는 없을까요? 그자가 마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증거를 잡아낼 수 있도록요.”
“뒷조사라면.”
그러나 내 말을 들은 레오니트는 난감한 듯 턱을 쓸었다.
“사실 이미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디르케나 그의 최측근들은 뒤를 파 보아도 얻을 수 있는 수확이 크게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꼬리가 밟히지 않도록 신변 정리에 힘쓰는 모양이라.”
“그런가요?”
“예. 하지만 디르케의 시종을 표적으로 다시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에모리 공작가의 협력을 받을 수도 있으니 다른 성과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네, 부탁드립니다, 전하. 저 또한 제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추적해 보겠어요.”
나는 레오니트에게 대답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대화를 정리한 뒤에는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집무실 의자에 앉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건가? 물론 관련된 증거들을 간단히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리고 레오니트에게는 말하지 못했으나 신경 써야 할 문제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란타나가 가지고 있을 칼의 존재였다. 요정 벨라의 영혼이 갇혀 있다는.
“그걸 찾아내야 할 텐데.”
만약 찾게 된다면, 칼의 존재를 아예 없애 버리는 것까지도.
세상에 두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따위 칼로 인해 나도, 나와 같은 일족들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더 이상의 쓸데없는 비극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책상 서랍 속에 보관해 두었던 서류를 꺼냈다. 자비에에게 받은 책의 번역본이었다.
팔랑팔랑 소리를 내며 종이를 몇 장 넘기자, 그곳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져 있었다.
‘사람들은 평화를 찾기 위해 벨라의 칼을 파괴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절대 없앨 수 없었다.’라고.
“‘절대 없앨 수 없었다.’라니.”
그 부분을 읽으며 눈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았기에 나는 무심결에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궁의 사신이 왔어?”
멀리서였지만, 정복을 입은 남자가 황금색 편지를 가져오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레오니트가 벌써 연락을 보낸 걸까?
나는 집무실 책상에서 일어나 황궁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저택의 로비를 향해 이동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저택에 계셨군요, 레이디 발렌티스. 이것을 받으시지요.”
나는 예의를 갖추고는 사신이 건네는 황금색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소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폐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사신의 말 그대로, 나에게 서신을 보낸 사람이 황태자가 아닌 제국의 황제 폐하였기 때문이었다.
***
편지 자체에 중요한 내용이 적혀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내일 오후에 시간에 맞춰 황제궁으로 입궁하라는 것뿐.
그랬기에 나는 다음 날이 되자 지정된 시각에 늦지 않도록 조금 일찍 황제궁으로 향했다. 당연하지만, 의아한 기분을 하루 내내 지우지 못한 채였다.
‘폐하께서 왜 나를 호출하신 거지?’
만일 다른 때였다면 니나렛의 학습 성취 과정을 묻는다든가, 아니면 발렌티스 백작가에 대한 대화를 나누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런 만큼 황제가 나를 부른 이유를 예상할 수도 없었다.
‘뭐, 가 보면 알게 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황제궁의 입구에 선 시종에게 인사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네리아 발렌티스가 폐하의 명을 받아 입궁하게 되었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이디 발렌티스. 저를 따라오시지요.”
나는 앞서 걷는 시종을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시종이 향한 곳은 황제궁의 건물 안쪽이 아닌 외부에 위치한 야외 정원이었다.
‘왜 야외 정원으로 가는 거지?’라고 생각한 시간은 짧았다.
조금 뒤, 정원 내부에 설치된 테이블에서 혼자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란타나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
“반가워요, 네리아 양! 오랜만은 아니지만, 잘 지냈나요?”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란타나는 황제궁의 시설이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양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군.
“계속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플 텐데, 편한 의자에 앉도록 해요.”
“저를 부른 사람이 란타나 님이셨나요? 폐하의 이름으로요?”
“네, 맞아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네리아 양은 제가 불렀으면 안 왔을 거잖아요. 그렇죠?”
틀린 말은 아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그녀였다면 분명 다른 이유를 들어 거절했을 테니까.
하지만 황제 폐하는 이런 일까지 허락해 줄 정도로 아이를 가진 란타나를 아끼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요. 란타나 님이 저를 오해하고 있으신 것 같네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녀 못지않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황제의 이름을 빌려 가면서까지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들어나 보자고 생각하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