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인간을 마수로 만들 수도 있고, 그렇게 발생시킨 마수들을 사적으로 자신의 군대처럼 이용했다?
이건, 황족의 아이를 가진 것으로도 절대 용서받지 못할 중죄였다. 그 사실이 드러난다면 제국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확실한 증거만 있다면 말이지.’
나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세사르는 내가 꺼낸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는지 얼빠진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렌샤가 살아 있다고? 그때 본 시종이랑 얼굴은 그럭저럭 닮은 것 같지만, 스승님께서는 분명히 렌샤를 죽였다고 말씀하셨는데…….”
“세사르 님.”
“아니, 하지만 렌샤의 시체를 본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면 설마, 렌샤가 정말 살아 있는- 네? 네리아 님, 방금 부르셨습니까?”
“그 렌샤라는 분이 가진 고유 마법을 아는 사람은 없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옛일을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는지 조금 뒤에 고개를 저었다.
“없을 겁니다. 유일하게 알고 계신 스승님은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런가요?”
아쉬운 답변이라고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란타나에게 죄를 묻는 것도 그녀의 잘못을 증명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어쩔 수 없지. 이 문제는 레오니트와 협력해서 지금부터라도 파내 볼 수밖에.’
적어도 사람을 특정할 수 있으니, 조사하다 보면 꼬리를 잡을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건은 이게 다였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나중에 저택에서 다시 뵙도록 해요.”
“잠깐, 네리아 님!”
“네?”
“드릴 게 있습니다.”
자리를 뜨려다가 세사르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연구실의 테이블로 가더니 어떤 물약 한 병을 가져와서는 나에게 내밀었다.
“안 그래도 방금 약이 완성된 참이었거든요. 나중에 저택에서 드리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오신 김에 바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뭔가요?”
“저번에 부탁하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약’입니다. 이번에는 안전성까지 확보한 확실한 약이니 믿고 드셔도 됩니다!”
과거에 란타나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예전에 세사르에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후문의 지하실로 들어갔다가 자력으로 기억을 되찾게 되면서 잊고 있었는데, 그는 성실하게 약을 완성 시킨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세사르 님!”
그랬기에 나는 괜히 양심이 뜨끔해서는 잊지 않은 척,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물약을 받아 들었다.
그 뒤로 나는 저택의 내 방으로 돌아온 뒤, 투명색의 작은 유리병을 기웃기웃 살펴보았다.
“뭐,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라도 쓸모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약을 따로 보관하기 위해 테이블의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아.”
서랍 안에 두었던 물건 중, 은색 단검 하나가 보였다. 이 세계의 내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이었던 데다 칼 자체의 품질도 나쁘지 않아 지금껏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 단검은 란타나의 시녀가 들고 있던 것과 똑같았는데.”
나는 칼을 꺼내 들고는 눈을 찌푸렸다. 우연일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란타나의 측근과 관련된 문제인 이상, 마냥 우연으로 치부하기가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이 칼의 원래 주인이 실은 네리아가 아니라 란타나의 시녀였고, 둘은 이미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는 것.
‘…약, 먹어 볼까? 솔직히 짐작 가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세사르의 약은 복용자의 뇌를 건드리는 방식이라고 했으니, 이 약을 먹으면 죽은 네리아의 기억을 훔쳐볼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약이 또 필요해지면 세사르에게 다시 부탁하면 되기에, 고민 없이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는 한 번에 약을 들이마셨다.
나는 입 안을 맴도는 쓴맛을 느끼며, 약 제조실을 떠나기 전에 세사르가 알려 준 사용법을 떠올렸다.
‘으음, 그럼 이 칼을 처음 봤을 때로…….’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주변의 배경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나는 이 세계의 네리아가 되어 있었다.
***
그날은 네리아가 17살이 되는 생일날이었는데도, 생일을 맞이한 당사자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미 죽었고, 친척들은 남들보다 못한 관계다. 이 세계에서 네리아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그녀 본인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생일이든 뭐든 특별히 축하할 날도 아니야.’
네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기력하게 본관의 걸레질을 끝마쳤다.
그렇게 네리아가 하녀 일을 끝낸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작고 딱딱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렇게 살다가 언젠간 죽겠지.’
어차피 가족도 뭣도 가진 것도 없는 인생. 당장 죽는다고 해도 미련 같은 것도 없다.
네리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창문 밖의 별을 멍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슬슬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았을 때였다.
어느 순간 비좁은 방 안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뭐지? 네리아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할 수 있었다. 침대 옆에 조용히 서서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떤 사람을.
“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흐리게 보이는 얼굴이지만 처음 보는 자는 아니었다. 가끔 디르케의 명령을 받아 저택을 찾아오는 그녀의 시녀였다. 이름이 젠이라고 했던가.
“여, 여기는 왜?”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귀찮게 되었군. 소란을 피우면 곤란하게 될 테니까.”
“귀찮게 되었다니 뭐가-”
네리아가 그렇게 말을 이으려던 때였다. 젠이 네리아의 양 볼을 잡고는 억지로 입을 벌려 그녀의 입에 어떤 약을 흘려 넣었다.
“나, 나에게 뭘 먹-”
어?
네리아가 입을 뻐끔뻐끔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당황한 모습으로 젠을 쳐다보았다.
“널 서궁으로 데려갈 거야. 피차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반항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젠이 그렇게 말하며, 네리아를 기절시키고자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디르케의 시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도, 그리고 자신을 서궁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이유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상대방에게 납치를 당하게 된 다는 것.
네리아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당하게 될 거야! 그녀는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힘으로 젠의 손을 피했다.
“반항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싫어!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젠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허리에 단검 하나가 매여져 있었다.
‘저걸로라도!’
네리아는 젠에게 복종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허리에 걸린 칼을 꺼내고는 있는 힘껏 휘둘렀다.
평소의 네리아였다면 가능했을 일이 아니지만,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인 것이었다.
“…읏!”
하지만 네리아가 휘두른 단검은 젠의 뺨에 상처를 내기만 했을 뿐이었다. 자상이 깊었는지 많은 피가 흘렀지만, 젠의 움직임을 멈추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
“……”
눈이 마주쳤다. 젠은 그녀에게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공포심을 느낀 네리아는 칼을 방 안에 떨어트리고는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누가 좀 도와줘!’
그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절대 잡히지 않을 거야! 네리아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디르케의 시녀가 대체 나를 왜 데리고 간다는 거야?’
어릴 때였던가, 네리아는 그녀의 백부모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네리아를 내쫓지 않고 저택에 두는 이유는 디르케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지금은 왜?
적어도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좋은 일이라면 이렇게 납치까지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다른 사람의 숙소 문을 두드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금방 잡혀 버릴 것 같다. 그랬기에 네리아는 그저 달릴 뿐이었다.
그리고 우습다고 생각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인생에 미련 따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진짜 위기에 처하니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이.
‘저 사람에게 잡히지 않고 무사할 수만 있다면.’
네리아가 결심했다. 이제 무기력하게 살지 않고 발렌티스 저택을 떠나 어떻게든 열심히 살겠다고.
하지만.
“이제 더 도망갈 곳이 없는 것 같군.”
애석하게도 그녀가 도착한 곳은 저택의 옥상이었다. 도망칠 거라면 차라리 바깥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판단을 그르친 것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잡혀 가게 되는 걸까? 잡혀 가서 무슨 짓을 당하게 될 줄 알고?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젠을 보며 네리아가 뒷걸음질 쳤다.
“잠깐……!”
그런데 눈앞의 여성이 어째서인지 몹시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라고 생각했지만, 이유는 금방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새 네리아가 허공을 밟았고, 그녀의 몸이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아, 안 돼!’
이대로 죽는 걸까?
옥상에서 떨어지는 순간, 네리아의 머릿속에 지난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억울했다.
이번 위기를 벗어나기만 한다면 앞으로는 열심히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된다니.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해?’
그냥,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부모님이 죽은 이후로 인생에 좋은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는 이렇게 태어난 내가 싫어. 차라리 누가 날 대신해 줘!’
땅으로 추락하는 동안, 네리아가 눈을 붉게 물들인 채로 그렇게 생각했다.
***
“…아, 안 돼!”
정신을 차리니 내 방이었다.
나는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네리아가 죽기 직전까지 느꼈던 공포와 허무함, 분노 같은 감정이 나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자살이 아니었어?”
어제까지만 해도 몰랐으나, 이제는 책의 해석본을 본 이후였기에 짐작하기는 했다.
혹시 란타나가 미녀 수집으로 제국 곳곳에서 벨라 일족을 데려온 것처럼 네리아 역시도 데려가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이 칼…….”
나는 들고 있던 은색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거멓게 굳은 피가 묻어 있었다.
네리아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묻은 피인 줄 알았더니, 란타나의 시녀가 얼굴을 다치며 묻은 것이었다니.
나는 니나렛의 튜터 면담으로 황녀궁을 찾아갔을 때, 란타나의 시녀가 뺨의 흉터를 드러내고는 책을 흘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일은 설마.’
내가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지 떠보기라도 하려고 그런 행동을 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