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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41)화 (141/172)



<141>

대회의장 내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위기에 몰려 있던 란타나 측 귀족들이 순식간에 기세등등해져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다 성군이신 폐하의 치세에 신도 감격하여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경사가 생겼으니 축제라도 열어야 하겠습니다! 필시 제국민들도 기뻐할 테지요!”

“잠깐! 기뻐하기는 아직 이르지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디르케를 믿을 수 없습니다.”

“황궁의가 말했습니다. 비록 0%는 아니더라도, 폐하께는 후사가 생길 확률이 한없이 낮다고요!”

“레벤 후작은 디르케가 가진 아이가 폐하의 아이라는 것을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 불경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게다가 배 속의 황족에게 그게 무슨 무례인가 말입니까!”

이번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란타나가 가진 아이는 과연 황제의 진짜 핏줄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레오니트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레오니트 역시, 입가에 쓴웃음을 지은 채로 침묵하고 있었다.

어렵게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

이는 황제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번 잘못을 사면하거나 처벌을 미룰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게다가 친자 여부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야 가려낼 수 있을 테니, 적어도 그녀는 출산까지는 안전을 보장받을 터였다.

‘여기서는 황제 폐하의 결정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황제가 아직은 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굳이 더 기다리지 않아도 결론은 충분히 보였다.

내가 니나렛의 튜터가 되기 위해 면담을 준비하던 때였던가.

꼬마 황녀 전하의 마음을 열기 위한 협조를 구하고자 황제의 집무실을 찾아갔을 때, 그가 지나가듯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내 자리를 이어 줄 아들을 몹시도 원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졌지. 화가 났었다.’

그러니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 수도 있는 란타나를 내칠 리가 없겠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모두 조용히.”

드디어 황제의 입이 열렸다. 폐하의 정리된 표정을 보아하니, 란타나에 관한 처분을 어떻게 할지 결정을 끝낸 것 같았다.

회의장의 귀족들은 전부 침묵한 채 황제의 뒷말을 주시했다.

“나에게서 몇 년이나 후사가 없었던 만큼 그대들이 디르케를 의심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폐, 폐하!”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레드 스톤을 이용하여 친자 식별이 가능하지 아니한가. 그러니 그때까지 태아는 내 핏줄인 것으로 간주하겠네. 그대들도 디르케에게 괜한 스트레스를 주어 그녀와 태아의 건강이 위험해지는 일이 없도록 모두 주의하도록 하게.”

“폐하! 그렇다면 디르케가 이번에 저지른 죄는 어떻게……?”

“처벌은 출산 이후로 미루도록 하겠네. 지금은 무엇보다도 디르케의 안정이 우선이야.”

“…….”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네.”

역시.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았다. 회의장에도 상반된 반응이 담긴 웅성거림이 한 차례 일었다.

“란, 지금 내 궁으로 황궁의를 부를 예정인데 그대도 나와 동행해 주기를 바라오.”

“네, 폐하!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란타나를 에스코트하여 대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폐하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 참…….”

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 구렁이같이 빠져나갈 줄은 몰랐다.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디르케께서 황족을 출산하면 이번 일도 충분히 사면받을 수 있겠군요! 다들 애쓰신 것 같은데 아쉽게 되셨습니다.”

“너무 일찍 축배를 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만약 태어난 아기가 황족이 아니라면 후폭풍이 클 테니까요.”

“폐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무엄한 발언인지-!”

남아 있는 귀족들이 이어서 소란스럽게 말다툼을 벌이는 동안, 나는 레오니트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모종의 눈빛을 교환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대화를 나누자는 의미였다.

***

“레이디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디르케의 아이가 정말 폐하의 친자라고 보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레오니트와 함께 본궁의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그의 질문에 애매한 말투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모르겠다.

우연이라기에는 임신한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지만, 사건의 흐름에 따르면 이번 일을 면피하기 위해 꾸민 일은 딱히 아닌 것 같다.

더욱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는 간 큰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싶다가도, 그녀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으니까.

“…어쨌거나 전하께서 증거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까지 하시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허사가 되었네요.”

“그건 괜찮습니다. 처벌이 유예되었을 뿐이지 아예 백지가 된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수도의 유력 귀족 몇을 손쉽게 포섭할 수 있었으니 저에게는 결론적으로 이득이 되었지요. 아쉽게 생각하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에모리 공작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며 레오니트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말했다.

하기야, 이후로는 수도 정계가 크게 황태제 파와 란타나 파로 세력이 나누어져 실권 차지를 위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것임은 자명했다. 게다가 란타나가 가진 아이가 폐하의 친자가 맞기까지 한다면?

‘차기 황제 자리를 두고 더 큰 싸움이 벌어지겠지.’

오늘 란타나를 쳐 내기는커녕 물을 먹기만 한 것이 통탄스럽기는 했지만, 레오니트의 말처럼 아쉽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녀는 여러모로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약점을 파헤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존재했다.

‘우선은 아네모네 궁에서 빼돌렸던 그 책.’

분명, 자비에에게 해석본을 받는다면 란타나가 숨긴 꿍꿍이의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을 터였다.

게다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는 나 혼자서 백부 가족에게 맞서야 했으나 지금은 함께 싸울 같은 편이 많지 않은가.

그러니 짜증을 내거나 초조해할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또다시 옆에서 레오니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디르케의 일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이 늦었는데, 건국제에서 레이디께서 저에게 물어보셨던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릿속에서 예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건국제 때, 황궁의 휴게실에서 그를 만나 부탁한 것이 있었다. 분명.

“디르케가 미인 수집으로 데려온 사람들이 ‘코르’를 먹지 못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셨지요?”

“네, 전하.”

“서궁에 식료품을 보급하던 관계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궁이 워낙 폐쇄적인 곳이라 자세한 내부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코르에 알레르기를 가진 자가 더 있었다고 합니다. 디르케가 데려온 소녀와 우연한 기회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하면서요.”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 역시 나나 란타나와 같은 벨라 일족의 일원이었겠지. 어차피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그에게는 확인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음?”

레오니트에게는 감사의 표시를 전하려고 하던 때였다. 문득, 복도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가 바깥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저 은색 머리카락은, 레이디의 호위 기사인 듀이 경이 아닙니까? 여성분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많으시군요.”

“…….”

나는 레오니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흐리게 떴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평소의 듀이의 모습과 같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황궁의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점일까.

멀리 있어서 대화 내용이 들리지는 않았으나, 표정이나 행동만 보아도 그녀들이 듀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은 본궁 소속의 시녀인 만큼, 절대 신분이 낮지 않은 귀족 가문 출신의 여성들이건만.

“…….”

지켜보고 있는 내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듀이는 원래부터 외모가 나쁘지 않았고 검술 실력도 독보적으로 뛰어나 장래가 유망한 기사였다.

하지만 신분이 평민 출신이어서인지 듀이에게 특별히 이성적인 목적으로 접근하는 여성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광전사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이는 신분마저 뛰어넘는 대단한 가치였다.

‘생각해 보면, 예전 세계에서도 여러 고위 귀족 가문이 힐더 할슈리트 경에 혼담을 넣었었어.’

문득 깨닫게 되었다. 듀이는 이제 귀족들도 탐내는 최고의 배우자감이 되었다고.

“…….”

듀이의 주인으로서도 축하할 일이기는 한데… 대체 뭐지, 이 몹시도 유쾌하지 못한 기분은?

듀이는 그녀들의 접근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지만, 어떤 시녀 한 명은 듀이에게 선물 같은 것을 건네기도 했다.

‘가서 귀찮게 굴지 말라고 쫓아내기라도 할까?’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듀이의 사교 활동에 썩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어쩌면 좋을까. 갈팡질팡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저 사람, 디르케 아닙니까?”

“네?”

이번에는 레오니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대로 어디선가 란타나가 나타나서는 듀이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뭐야? 왜?’

마찬가지로 그녀가 듀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발이 먼저 움직였다.

“전하, 가 봐야겠어요!”

아까와는 종류가 다른 불쾌함이 밀려왔다. 한번 납치했던 상대에게 또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듀이를 보호해야 한다. 어차피 레오니트와의 대화는 적당히 마무리된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듀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다른 시녀들이 있으니 무슨 나쁜 짓을 할 수는 없겠지만.’

급한 마음에 황궁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구두 소리를 크게 내며 바깥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건물 안과 밖이라는 거리 차이 때문일까. 내가 듀이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란타나가 사라진 뒤였다.

“레이디 발렌티스……! 오늘도 예쁘- 헙, 황태제 전하!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듀이의 근처에 있던 시녀들은 나에게 알은척을 하려다가도, 곧바로 내 뒤에 나타난 레오니트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빠른 속도로 뿔뿔이 흩어졌다.

‘…근무 시간에 놀고 있는 모습을 고용주에게 들킨 상황이나 마찬가지니까.’

란타나에 이어 시녀들까지 사라지며, 건물 바깥의 잔디밭에는 갑작스러운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그 고요함을 깨며 듀이에게 달려갔다.

“듀이! 디르케가 왔다 간 걸 봤어. 아무 일 없었어? 뭐라고 시비를 걸지는 않았어?”

“별일은 없었어요. 그냥, 저번 일이 미안했다면서요.”

“미안하다고?”

남의 부모님을 죽이고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내뱉은 사과에 무슨 진심이 들어 있겠느냐마는.

어쨌거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어서 다행이긴 했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진 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군요.”

레오니트의 입에서도 나와 비슷한 의견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기사가 있으니, 마차까지 배웅해 드리는 것이 되레 실례가 되겠지요?”

“그런 건 아니지만… 오늘은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전하.”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레오니트가 신사답게 미소를 지으며, 내 손등에 짧게 키스하고는 본궁 안으로 다시 사라졌다.

‘…음?’

그런데 이번에도 내 기분의 문제였을까. 레오니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듀이의 표정이 어쩐지 미묘해 보이는 것 같았다.

“…….”

“네리아 님, 저택으로 돌아가시도록 마차까지 모시겠습니다.”

“응.”

뭐였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듀이가 갑자기 반대쪽 손으로 내 손등을 닦아 내는 것처럼 슥슥 문질렀다.

“듀이?”

“아?”

듀이는 스스로의 행동에 본인이 더 놀라며, 어쩐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네리아 님의 손등에 먼지가 붙어 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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