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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40)화 (140/172)



<140>

정무 회의가 열리는 황궁의 대회의장에서 내가 앉게 된 곳은 테이블의 중간 정도가 되는 위치였다.

사실 암묵적인 규칙에 따르자면, 오늘은 황태제에게 공식적으로 요청을 받아 디르케를 심문할 관계자로 참석한 것이기에 원래라면 구석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어차피 나는 성인이 되면 발렌티스 가문의 가주가 될 예정인 데다, 책에서만 나오던 광전사를 기사로 두게 되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았기에 나름의 특혜를 받은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조금 뒤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까지만 해도 소란스럽던 황궁의 대회의장에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들 자리에 앉으시게. 오늘의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폐하, 그 전에 먼저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황제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착석했으나, 그중에서 앉지 않고 여전히 자리에 일어서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레오니트 황태제는 상석 바로 옆에 선 채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최근에 있었던 초임 기사 훈련과 아네모네 궁에서 디르케가 저지른 만행에 관해서입니다.”

그 말에 회의장이 시끄럽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듀이가 화려하게 일을 저질러 준 덕분에 황가 소유의 별장 하나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 사실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미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퍼진 상황이었다.

‘그날 내가 레오니트 황태제를 곧바로 아네모네 궁으로 부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

혹시라도 란타나 측 세력에게 수사권을 뺏길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 전에 증거를 수집할 수 있도록 황족인 그를 부른 것이었다.

“허락하겠다, 황태제. 말해 보도록.”

황제 폐하 역시 이미 대강은 알고 있다는 듯, 씁쓸함이 내비치는 것 같으면서도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우선은 초임 기사 훈련이 있었던 테라핀 숲에서 기사를 납치한 건입니다.”

수석 합격자인 듀이를 일부러 마수가 많은 곳으로 유인하여 거짓으로 사망 처리한 뒤에 아네모네 궁으로 납치한 것까지.

레오니트는 그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발표했다.

만약 란타나의 계획이 마지막까지 성공했다면, 듀이는 죽거나 기억을 잃었을 테니 이 일은 흐지부지 넘길 수 있었을 터였다.

‘각성한 듀이를 손에 넣었다면, 머리카락 색깔도 달라졌으니 다른 사람이라고 우기면 됐을 거야.’

하지만 피해자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다. 그런 만큼 란타나가 쏘아 보낸 독화살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되돌아간 것이다.

“그럼 기사단장과 로트 백작은 증언을 부탁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전하.”

황태제에게 지명을 받은 두 사람이 기립했다.

총 기사단장은 자신이 책임을 맡은 일에 타인이 개입하여 일을 벌인 것에 항의를, 로트 백작은 아끼는 차남이 그 일에 휘말려 부상을 당한 것에 분노하여 적극적으로 증언에 참여한 것이었다.

‘로트 백작의 경우에는, 그레이 경이 차남을 살리느라 애쓴 것에 감사를 표시한 것도 있지만.’

나는 두 사람이 발언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제 증언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상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우선 납치 사건의 범인인 린도 경은-”

“레벤 후작, 그만. 반론은 황태제의 보고가 전부 끝난 뒤에 듣도록 하겠네.”

물론, 란타나 측도 조용히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의 핵심 세력인 레벤 후작이 격양된 목소리로 피력했으나 황제에게 제지당해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황태제는 계속하도록 하게.”

“예, 폐하. 다음으로는 디르케가 폐하께 하사받은 별궁에 마수들을 숨겨 놓은 사실입니다. 여기, 증거 자료들이 있습니다.”

레오니트가 준비해 온 서류를 황제에게 제출했다. 그 외에도 그가 데려온 증인들까지.

여태껏 란타나에게 약점을 잡혀 있었기에 수면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지 그의 일 처리에는 빈틈이 없었다.

‘역시 황태제.’

이것도 란타나가 나에게 레오니트의 친모가 쓴 편지를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부모님을 죽인 것에 대한 보상이다, 이따위의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며 여유를 부리더니 지금쯤 후회하고 있지 않으려나. 저절로 조소가 지어졌다.

“이의 있습니다! 폐하, 발언할 수 있도록 허락을 부탁드립니다.”

“레벤 후작, 발언하게.”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하겠습니다. 이번 납치 사건의 범인인 린도 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이 일은 자신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자필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자살이라는 증거는 있습니까? 사실은 디르케가 린도 경의 입을 막으려고 그를 자살로 위장해 살해한 것은 아닙니까?”

“디르케께서 기사를 죽였다니! 당신이야말로 증거를 가지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멀쩡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지 말고 말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별궁에 마수를 데리고 있었다는 게 무슨 문제입니까? 우리 다리스 제국에 개인이 사적으로 마수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이 사람이! 정부 하나를 감싸겠다고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귀족들에게 수도 내에 둘 수 있는 기사의 숫자를 제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맞습니다, 폐하! 지하실에 몰래 마수를 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건 황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당장 디르케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제국에는 개인이 사적으로 마수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새로운 법을 제정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디르케에게는 소급 적용을 하면 될 테고요.”

“동의합니다. 설마 여기에 반대하는 멍청이는 없겠지요? 수도 귀족들이 사이좋게 저택에 마수를 몇 마리씩이나 두고 있으면 나라 꼴이 잘도 돌아가겠습니다?”

란타나를 지지하는 자들과 다른 귀족들 사이에 격렬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란타나가 저지른 잘못이 명명백백한 만큼, 그녀의 세력이 논쟁에서 조금씩 밀리는 형세였다.

‘뭐, 란타나가 중앙 정계에서 영향력을 키워 갈수록, 그녀를 경계하는 귀족도 많아졌으니까.’

오늘을 계기로 황태제의 편에 서게 되는 귀족도 있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 황제는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폐하로서는 아끼는 정부에게 벌을 내리기가 싫겠지만.’

란타나에게는 이번 잘못을 사면받을 수 있는 공적 같은 것도 없다. 아무리 폐하라도 그녀를 감싸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레벤 후작을 필두로 한 귀족들이 란타나의 편을 들고는 있지만, 그녀가 처벌을 받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감옥행이겠지. 다행인 일이야.’

이 세계의 부모님을 죽이거나 듀이를 데려간 것에 복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벨라 일족들을 데려와 무언가 수상쩍은 짓을 꾸미는 등. 그녀에게는 여러모로 찜찜한 점이 많았다.

란타나가 무언가 큰일을 벌이기 전에 치워 버리는 것이 맞았다.

“폐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테이블에 앉은 귀족들이 침을 튀기며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황궁의 시종장이 조용히 황제에게 다가왔다.

“시종장? 무슨 일인가?”

“디르케가 바깥에서 정무 회의에 참석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란이? 지금?”

“예, 당장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디르케가 왔다고?

화제의 중심인 란타나가 언급된 것에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상석으로 쏠렸다.

“폐하, 참여를 허락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여기까지 변명을 하러 온 것 같은데, 어디 당사자의 이야기도 들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변명이라니요? 해명이라고 표현을 고쳐 주시지요! 디르케께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확정이 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아직도-!”

“그만! 조용히들 하게! 시종장, 디르케에게 입실을 허가하겠다고 전달하도록 하게.”

황제의 외침에 회의장에는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적막 속에서 란타나가 나타났다.

“폐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잘못을 빌어 보기라도 하려는 걸까. 그녀는 평소보다 수수한 상아색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당연하지만, 옷차림이 수수하다고 해서 그녀의 아름다움이 숨겨지는 일은 없었다.

“폐하.”

란타나가 천천히 황제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그녀의 빛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아무리 빌면서 용서를 구해 봐야 이미 늦었다.

“무슨 일인가, 디르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변명, 혹은 잘못했다며 납작 엎드리기.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그러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란타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제가 아이를 가졌어요.”

…뭐라고?

“너무 기쁜 일이라 폐하께도 어서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왔답니다!”

“…….”

란타나가 배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봄꽃처럼 생긋 웃는 동안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귀를 의심했다.

아이를 가졌다고? 란타나가? 그게 말이 돼? 황제 폐하는 불임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임신을?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다른 귀족들 또한 나와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 않은지, 그들 또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눈을 찌푸렸다. 듀이의 각성으로 아네모네 궁이 무너지던 때, 그녀는 어쩐지 팔로 배를 감싸고 있었다.

설마, 배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던 거였어?

“…가, 감축드립니다. 폐하! 제국의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이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운을 틔운 사람은 란타나의 세력인 레벤 후작이었다. 테이블 군데군데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라, 란. 그게 사실이오?”

“네! 배 안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 황궁의에게도 확인을 받았답니다.”

“잠깐!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디르케의 배 속에 들어있는 아이가 과연…….”

그들은 똑바로 말을 잇지 못했으나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황제의 아이가 맞느냐는 것. 황제는 불임으로 알려져 있으니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의문이었다.

“황궁의!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번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회의장 구석에 앉아 있던 황궁의에게로 향했다.

정무 회의는 황제를 비롯한 제국의 고위 귀족과 핵심 관료들이 참석하는 자리이기에, 만일을 대비해 황궁의가 동석하기 때문이었다.

“저기, 그것은.”

이번 회의에 참석한 황궁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불임에도 여러 가지 증상이 있는데, 폐하의 경우 아이가 생길 확률이 한없이 낮다는 것이지, 완전한 0%라는 의미가 아니었거든요.”

불임 판정을 받고도 기적적으로 아이를 가진 사례가 더 있다며, 황궁의가 설명을 덧붙였다.

“정말 기쁜 일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란타나의 시선이 어째서인지 나를 향해 있었다. 귓가에 별궁에서 란타나와 나눴던 대화가 환청처럼 들렸다.

‘다만, 중간에 사소한 사고가 생긴다고 해도 최후에는 제가 이긴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으니까?’

아, 그렇단 말이지?

처음부터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그런 말을 했던 거였나.

‘…와, 재밌네.’

이대로는 끝이 아니다 이거야?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 역시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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