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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39)화 (139/172)



<139>

아무래도 황족의 앞이니 여러모로 불편한 걸까? 조심스럽게 옆을 힐끔대며 듀이를 살피고 있었는데, 어느새 레오니트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져 있었다.

“그럼, 레이디 발렌티스. 저에게 시간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제가 먼저 부탁드린 일인걸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레오니트가 에스코트하듯 내민 손을 붙잡았다.

듀이에게 얼른 쉴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도 용건은 가급적 빨리 끝마치는 게 좋겠지.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황태제와 함께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그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제 부하를 통해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레이디께는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충분할지 모르겠군요.”

“보답이라니요. 오히려 그동안 전하께서 저를 도와주신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답례가 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 적힌 내용에 관해서는…….”

“죽을 때까지 함구하겠습니다.”

문제의 편지에는 레오니트의 친모가 란타나에게 수상한 케이크를 보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트의 친모는 이미 몇 년 전에 사망했고. 그녀가 정말로 위험한 독을 썼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란타나의 계략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레오니트가 유독 니나렛을 챙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니나렛과 죽은 황후 폐하께는 죄가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어쨌거나 확실한 건, 이 모든 일에 레오니트 본인의 잘못이나 책임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흑발의 미인을 생각하며 표정을 굳혔다.

‘친해지고 싶다고? 나랑 친구가 되고 싶다고?’

란타나는 그 아름다운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게다가 선물이랍시고 황태제의 약점을 건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기만이야.’

예전 세계에서 나에게 저주를 건 사람도, 이 세계에서 내 부모님을 죽인 사람도 전부 그녀였으니까. 란타나는 내 비극의 원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게다가 강력한 전사를 제 휘하에 두겠답시고 듀이를 납치하고 위험에 빠지게 만들기까지.

‘이렇게까지 얻어맞았는데 나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란타나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나는 절대 그녀와 평화로운 관계가 될 수 없다. 단지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을 뿐.

나는 레오니트를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디르케는 테라핀 숲에서 훈련 중인 기사를 납치한 데다, 별궁 내부에 사적으로 최상급 마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미리 조사한 결과, 지하실 내부에 확실한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그건 아무리 총애받는 디르케라고 해도, 황제 폐하가 감싸 줄 수 없는 수준의 중죄였다.

듀이가 갑작스럽게 각성하며 소동을 일으킨 건, 란타나의 원래 계획에는 없었을 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덕분에 그녀는 실패했고, 그 여파로 이렇게 증인과 충분한 증거들을 남기게 되었다.

“전하, 이 증거물을 근거로 디르케를 고발하고 싶습니다. 잘못을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니까요.”

“예,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렇게나 증거가 명확해서야, 디르케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겠군요. 다음 정무 회의 때 발의할 수 있도록 제가 확실하게 준비하겠습니다.”

레오니트의 얼굴에 유쾌하고도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란타나가 말했었다. 중간에 사소한 사고가 생긴다고 해도 최후에는 본인이 이긴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고.

‘미안하지만 그럴 일 없어. 이제 당신은 끝이야.’

내 입가에도 역시 웃음이 걸렸다.

“레이디 발렌티스.”

“예, 전하?”

“저의 비가 되어 주실 마음은 정말 없으신 겁니까? 다시 생각해도, 레이디라면 저와 잘 맞는 황후가 되실 것 같은데 말이지요.”

“말씀만 감사히 듣겠습니다.”

예전에 건국제에서 했던 말이 농담이 아니었어? 하지만 내 대답이 달라질 일은 없었기에, 나는 이번에도 레오니트의 말을 웃음으로 흘려 넘겼다.

***

황궁의 서궁.

란타나는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언제나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던 그녀인 만큼, 답지 않은 그 싸늘한 눈동자에 서궁의 온도가 내려간 것만 같았다.

“린도 경.”

“라, 란타나 님……!”

“저는 웬만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아요. 어째서인지 아나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 무궁히 긴데, 사소한 일에 일일이 감정을 소모할 수는 없기 때문이에요.”

란타나가 의자에서 일어나 남자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가까워질 때마다 린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런데 저는 지금 무척이나 화가 났답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린도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돌바닥에 처박았다.

그는 죄인이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란타나의 명령을 어기고 듀이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결과는 최악의 실패로 돌아왔다.

린도의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흘렀으나 란타나의 싸늘한 태도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린도 경, 저는 제 말을 듣지 않는 가축은 필요하지 않아요.”

“란타나 님! 그 기사를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 버리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 기사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겠습니다!”

린도가 란타나의 발치에 매달렸다. 그의 눈동자가 흡사 광기에 차 있었다. 죽는 건 무섭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그녀에게 버림받는다는 사실은 죽음 이상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란타나는 그런 린도가 더러운 오물이라도 되는 듯, 그를 발로 쳐 내고는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늦었어요. 경이 무슨 수로? 당신 같은 버러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광전사를 이길 수 없어요.”

“란타나 님,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저는……!”

“젠, 렌. 이거, 버리도록 해요.”

“명령 따르겠습니다.”

“란타나 님!”

버리겠다는 말은 죽인다는 의미와 같다. 그녀의 시녀와 시종이 저항하는 린도를 끌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란타나의 방 안에 린도의 비명 소리가 남았으나, 그녀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한참을 침묵했다.

“…그 기사가 각성에 성공했다니.”

좋지 않다. 란타나는 극도의 짜증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 기사는 언젠가 그녀의 계획에 방해가 될 것이 확실했다.

“…….”

문득 느껴지는 복통에 란타나가 자신의 배를 두 팔로 감쌌다.

“란타나 님!”

때마침, 린도를 어딘가에 가두고 돌아온 그녀의 시중인들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라며 달려왔다.

“화내지 마세요. 몸이 상하실까 염려가 됩니다! 황궁의를 부를까요?”

시녀 젠이 화들짝 놀라서는 란타나를 부축했다. 회색 머리의 시종 렌은 그런 그녀의 앞에 복종하듯 무릎을 꿇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란타나 님께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정말 방해가 될 때는 제가 직접 그 광전사를 제거하겠습니다.”

“그래요. 저에게는 렌이 있었죠.”

드디어 여유를 되찾은 듯, 란타나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아네모네 궁으로 다시 가 보니, 그 책이 없었다고요?”

“네, 마법 금고가 확실히 파손되었고 책은 사라졌었습니다.”

“삼중, 사중으로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인데 그걸 파훼하다니. 하기야, 광전사에게는 그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겠죠. 그리고 그 책은 네리아 양이 가져갔을 테고요.”

란타나가 테이블에 앉아서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네리아와는 대립하게 되려나.

“으음,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그녀가 네리아와 비슷하게 생긴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다랗고 검은 속눈썹을 깜빡였다.

***

레오니트가 정무 회의 때 란타나를 고발할 자료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아네모네 궁에서 발견한 의문점들에 관해 생각했다.

우선은 그 책.

‘마지막 몇 장은 찢어져 있기는 했지만.’

청록색 머리카락에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 그려진 삽화가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책이었다.

다만, 나로서는 해석할 수가 없는 문자였기에 황궁 도서관의 자비에에게 보내 번역을 부탁했다.

‘이건 북대륙의 언어가 변형된 문자인 것 같은데… 조금 연구하면 제가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답례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이렇게 특이한 책을 읽는 건 저한테도 즐거운 일이거든요.’

고맙게도 그녀는 흔쾌히 내 부탁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란타나의 시녀가 가지고 있던 은색 단검.

다시 기억을 되새겨 보아도 네리아의 하녀 숙소에 떨어져 있던 칼과 모양이 같았다. 그게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마지막으로는 란타나의 별궁에서 발견된 마수들이나, 훈련 도중 마수들이 부자연스럽게 나타나서는 듀이를 공격한 일에 관해서였다.

‘상당히 인위적인 출현이라고 했었지…….’

게다가 듀이가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말 역시도 나에게는 몹시도 마음에 걸렸다.

‘테라핀 숲에서 만난 상급 마수를 보고서는, 어쩐지 보육원에서 헤어진 친구를 떠올렸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

나는 집무실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는 눈을 찌푸렸다. 만약의 이야기지만, 혹시 인간을 마수로 만들 수도 있는 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는 고개를 휘저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애초에 너무 위험한 발상…….

“…….”

너무 위험하다고?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분명, 라일라가 수도원으로 쫓겨난 뒤에 세사르와 대화를 나눴을 때였다.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렌샤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너무 위험한 고유 마법을 가졌다면서, 스승님께서 직접 렌샤의 목숨을 거두셨거든요.’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한 고유 마법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아? 세사르를 다시 만나보는 게 좋으려나.

거기까지 생각을 끝냈을 때였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사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황궁으로 출발하실 시간이에요.”

“그래? 늦지 않게 가야겠어.”

나는 모처럼 반가운 기분이 되어서는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궁의 정무 회의에서 디르케의 잘못을 고발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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