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하지만 듀이가 빠르게 몸을 돌려서는 상대편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나 곧장 뒤따라 붙은 또 다른 적의 연계 공격 때문에 어깨를 다치고 말았다.
“안 돼……!”
끔찍한 기분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잡혀 있는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리카락 색깔이 변했다는 건, 이미 듀이가 각성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하기도 싫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듀이는 이제 나를 알아보지도, 기억하지도 못하겠지.
그러나 지금 당장 내 머릿속을 채운 걱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듀이가 상처를 입고 있다. 온몸의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건 머리가 새하얘질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해! 듀이를 공격하지 마-!”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당연하게도 내 목소리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지금 바로 듀이에게 가 봐야 해!
나는 방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듀이에게 가서 뭐……?”
멈칫하며 나 자신에게 물었다. 간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어?
나에게는 듀이의 폭주를 멈추게 할 능력이 없다. 검도 쓸 줄 모르고 마법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전쟁터에 뛰어 들어가 봤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비에 님께 각성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봤을 텐데.”
후회했지만 늦었다.
듀이는 언제나 내 옆에서 나를 지켜 주고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는데, 정작 나는 중요한 순간에 듀이를 도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몸이 움직였다. 반쯤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래도 가야 해. 내가 듀이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도, 적어도 가까운 곳에 있어 주고 싶었다.
나는 발이 휘청거리는 중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는 건물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몇 번인가 넘어지고 휘청거리며 바깥으로 나오니 폭발음이 더 크고 심하게 들렸다.
“이럴 수가…….”
창문 너머로 보았던 풍경은 여전했고, 아네모네 궁은 아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듀이, 이 망할 제자 놈이! 정신 차리지 못해? 네리아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젠장! 모두 동시에 공격해! 저놈의 의식이 깨어나기 전에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왔다!”
“뭐? 이놈들이 죽이긴 누구를 죽인다고? 우리 제자 건들지 마라! 네놈들이나 뒈져 버려!”
혼란해진 싸움터는 언제 끝날지도 모를 정도로 격렬했다.
그래, 죽이긴 누구를 죽여?
나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 옆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듀이가 나를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그런 건 상관없다고 느껴졌다. 그저, 제발 듀이가 죽지 않기를. 다치지만은 않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듀이에게로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어?”
걷고는 있는데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빈혈의 영향인지 머리가 계속 어지러웠다. 옆을 돌아보니, 떨어진 건물의 잔해에 드레스 자락이 끼어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이런 때에.”
짜증을 느끼며 드레스를 빼내기 위해 잡아당겼다. 그런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차라리 칼로 찢어 버릴 생각으로 단검을 꺼냈을 때였다.
“네리아 아가씨-!”
멀리서 전투 중이던 그레이 경의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하필이면 아네모네 궁의 건물 근처를 걷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더니 건물의 커다란 장식물이 내가 있는 위치로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맙소사.
“네리아 아가씨-! 아가씨가 위험해! 뛰어가기에는 늦습니다! 세사르 님! 마법으로 어떻게 좀 해 보실 수 없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캐스팅을……!”
사람들이 뭔가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늦은 것 같다. 이미 위에서 장식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실제로는 짧은 순간이겠지만, 어째선지 그 모습이 무척이나 느리게 느껴졌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나는 최대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운이 좋다면 죽지는 않을 수도 있다. 크게 다치기는 하겠지만.
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금고 같은 거 열지 말 걸 그랬어. 그렇지만 이번에도 후회해 봤자 늦었다. 나는 눈을 감고는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빨리 듀이에게 가야 하는데.”
그렇게 읊조리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보호하듯 강하게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마치 착각 같은 감각이었다.
곧, 근처에서 쾅-! 하는 파열음이 들렸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리와 함께 폭발적으로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났다. 이제 정말 끝인 걸까.
‘미안해, 듀이. 미안해요, 모두들.’
청각이 마비된 것 같은 먹먹함 속에서 나는 나로 인해 애쓰고 있는 모두에게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멎고,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도 내가 아프거나 다치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어째서인지 바로 옆에서 항상 맡아 왔던 익숙한 체취가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듀이가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어……?
꿈을 꾸는 것 같아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도 눈앞의 소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껴안고 있는 온기 역시도.
다만, 근처에 떨어져 아찔하게 부서져 있는 거대 장식물만이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알게끔 했다.
“…듀이?”
“…….”
“어떻게 왔어?”
“…….”
눈앞의 소년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눈동자는 텅 비어 버린 것처럼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듀이는 아직도 의식을 되찾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날 구해 주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내가 위험한 것 같으니까?”
“…….”
“그런 거야?”
그냥,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나 존경하는 스승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의식조차 없는 상태였는데, 그런데도 단지 나를 구하기 위해서.
“정말이지 너는.”
이런 기분, 이미 예전에도 몇 번이나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아직도 나를 보호하듯 껴안고 있는 소년으로 인해서.
둥실둥실. 구름처럼 하늘을 날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계에 듀이와 나, 두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듀이는 선물이었다.
사지석화증으로 죽은 뒤, 가족도 지위도 재산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막막한 세계에 홀로 떨어졌다.
듀이는 그런 나를 가엾이 여긴 신이 보내 준 하나뿐인 선물이었다.
내가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이 기뻤다. 눈앞의 소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져 나 역시 팔을 뻗어 그를 껴안았다.
머리카락 색깔이 변해도, 기억을 잃고 감정이 사라진다고 해도 듀이는 듀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듀이.”
없어진 감정이 다시 생길 만큼, 행복한 기억을 다시 잔뜩 만들어 줄 테니까.
“이제 돌아와.”
그에게 그렇게 말해 주던 순간이었다.
텅 비어 있던 듀이의 금색 눈동자에 빛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네리아 님?”
***
꼬마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달렸다. 어떻게 해서든 잊고 있던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
-거기 서! 제발 멈추라고! 야! 출구에서 멀어지고 있잖아!
“싫어! 나는 잊고 있는 기억을 다시 찾아야 해!”
-그래 봤자 어차피 출구를 나가면 기억을 전부 잊는다고! 쓸데없는 짓이야!
“아냐!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다른 출구가 어딘가에 있을 거야! 찾을 수 있어!”
-아니라고 했잖아! 이 쪼끄만 걸 때릴 수도 없고!
“나보다 네가 더 작으면서!”
-지금 그런 소리나 할 때인 줄 알아?
요정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손톱만큼 작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다. 그런데도 꼬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분홍색, 분홍색.”
꼬마가 중얼거렸다. 힌트는 분홍색이다. 잊고 있는 게 뭘까.
-분홍색이 왜?
“분홍색은… 생각났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야.”
그런데 어쩌다가 분홍색을 좋아하게 된 걸까?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야! 피해! 아래에!
“응?”
요정의 외침에 꼬마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꼬마가 서 있던 돌바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으, 으앗!”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꼬마가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멍하게 돌바닥이 무너진 곳을 쳐다보았다.
요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꼬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말했잖아! 여기 계속 있다가는 무의식의 공간이 무너진다고! 그러면 너 진짜 죽어!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못 믿겠어?
“…아냐, 믿어.”
-그럼 어서 다시 출구로-
“그래도 거기로는 안 가.”
-야!
꼬마는 또다시 요정의 말을 무시하며 반대쪽 길을 향해 달렸다.
요정은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는 걸까? 세상에는 죽기보다 싫은 게 있다는 것을.
꼬마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으려 애쓰며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출구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요정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기에, 시시때때로 목숨이 위험해질 만큼의 위기가 꼬마를 찾아왔다.
걷고 있는 다리가 무너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갑자기 나타난 마수들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기어오르고 있는 산 벽이 갑자기 뜨거워지는 바람에 손을 놓쳐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꼬마는 목 놓아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다. 무의식의 공간은 갈수록 파괴되고 있었고, 어느새 함께 있었던 요정도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꼬마는 혼자였다.
차라리 이제 그냥 포기할까? 그러면 편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거세게 고개를 휘저었다.
그러면 안 돼! 마지막까지 포기하면 안 돼! 약한 마음 가져서도 안 돼! 왜냐하면 나는-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오를 듯 머릿속이 번뜩였다.
꼬마가 얼굴에 엉망으로 묻어 있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을 때였다.
‘듀이-!’
허공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마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흐를 만큼 그리운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