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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36)화 (136/172)



<136>

“어머나, 네리아 양.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섭섭해요. 저도 피해자인걸요? 배 속의 아이를 잃었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란타나를 바라보았다. 슬펐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그다지 영양가가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어차피 듀이를 찾을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함일 뿐.

그러나 그녀는 느긋한 모습으로 내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이 대화가 언제까지 이어진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지금쯤 내가 데려온 호위들이 듀이를 찾아다니느라 아네모네 궁을 들쑤시고 있다는 걸 란타나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내가 계속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적당한 시점에 나와 내 일행을 강제로 쫓아내 버릴 줄 알았는데.’

“더 물어볼 건 없나요?”

“…란타나 님은 여유로우시네요.”

그랬기에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란타나는 나를 봐주고 있다. 왜 그녀는 저렇게나 여유로울 수 있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렇게 보이나요?”

“네. 어째서 저를 아직도 봐주고 계신 건가요? 친구가 되고 싶기는 해도, 진지하게 싸울 상대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인가요?”

“그런 게 아니에요.”

상당히 직설적인 질문에 란타나가 후후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만, 중간에 사소한 사고가 생긴다고 해도 최후에는 제가 이긴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으니까?”

“대단한 자신감이시네요.”

“음, 그러니까 네리아 양도 어서 마음을 바꿔 주지 않을래요? 저는 당신과-”

란타나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약간이지만 바닥이 흔들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기분의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란타나 역시도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걸 보니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지진이라도 난 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바닥의 흔들림이 더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바깥에서 소음이 들리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불안감에 나는 테이블을 짚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듀이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

“란타나 님!”

그리고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란타나의 시녀와 시종이 심각한 얼굴로 나타났다.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어요!”

“제가 느끼기에도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작년에 보수 작업을 끝낸 건물이 무너지고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란타나 님, 그건…….”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란타나의 표정은 아무런 동요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리고 방금 달려온 시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속닥 그녀에게 무언가를 보고했다.

혹시라도 듀이가 사고에 휩쓸린 건 아닐지 확인하고 싶어 같이 귀를 세웠지만, 시녀의 목소리가 나에게까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뭐라고요……?”

시녀의 보고가 끝나자, 란타나의 미간이 아주 조금 찌푸려졌다. 어쩐지 시중인이 전해 준 소식을 듣고는 화가 난 것 같았다.

란타나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표정을 구기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도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다만 지금 이 상황이 란타나에게도 반가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쨌거나 당장 이곳을 떠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칫하다간 휘말려서 몸을 다치실 수가 있어요.”

“그래야 할 것 같군요.”

란타나가 시녀의 말에 수긍하며, 불편한 듯이 팔로 자신의 배를 감쌌다. 그녀는 방을 벗어나기 직전에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네리아 양도 어서 피하는 것이 좋겠어요. 복도 왼쪽에 바깥으로 내려가는 지름길이 있으니, 참고하도록 해요!”

“란타나 님, 어서……!”

시녀는 란타나를 부축하듯 한쪽 팔로 그녀를 감싼 채, 다른 쪽 손에는 작은 칼 하나를 쥐어 들었다. 호신용으로 보이는 은색 단검이었다.

‘어……? 저 은색 칼은?’

그런데 어쩐지 단검의 모양이 내 눈에도 익숙했다. 왠지 저거, 이 세계의 네리아가 가지고 있던 칼과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

내가 평행세계로 온 지 이틀째가 되던 날, 네리아의 침대 밑에서 발견했던 칼이 있었다. 칼날에 핏자국이 검게 묻어 있던.

‘물론 우연히 비슷한 모양의 단검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응접실에서는 란타나의 모습이 사라졌고, 내가 서 있는 바닥은 또다시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일단은 밖으로 나가야겠어.”

나는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낡은 편지를 집어 들었다. 란타나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레오니트 황태제의 약점이다.

레오니트에게는 지금까지 도움을 받은 일이 많으니 이걸 돌려주며 보답하는 게 좋겠지.

나는 편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품속에 안전하게 넣고는 빠른 속도로 응접실을 벗어났다.

“란타나가 복도 왼쪽에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이 있다고 했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녀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역시나 곧바로 1층으로 직행하는 계단이 있었다.

막 계단에 발을 디디려 할 때였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복도 끝의 방문 하나가 부서져 내렸다.

“이게 대체… 콜록, 콜록!”

눈앞을 가린 먼지를 헤치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니, 커다란 크기의 잠금쇠로 잠겨 있던 방문이 너덜거리며 떨어져 나와 있었다.

내 위치가 조금만 더 방문과 가까웠더라면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놀람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뱉을 때였다.

먼지가 가라앉은 방 안쪽으로 내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건… 금고?’

충격으로 무너져 내린 책장 사이로, 내 몸통만 한 크기의 금고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마력석이 박혀 있는 걸 보니, 마법을 이용한 금고 같았다.

그런데 왜였을까.

무심코 지나칠 수 없었던 나는 기어코 엉망이 된 방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살다 보면 종종, 이유도 모를 직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 그랬다.

이곳은 란타나가 사용하는 별궁이다. 여느 방과 달리 거대한 잠금쇠가 채워져 있던 방 안에, 마력석으로 잠겨 있는 금고라니.

어쩐지 저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어 볼까?”

마법 금고는 지정된 해제 장치 혹은, 잠금에 사용된 마력보다 더 큰 해제 마법을 사용하여 열 수 있다. 그런데 마침, 나에게는 세사르에게 받은 팔찌가 있었다.

“이걸로 해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지?”

원래는 별궁에 있을지 모를 함정 마법을 피하려고 가져온 것이지만 용도가 달라져도 상관은 없다.

나는 창문 너머와 금고를 번갈아 보았다. 곧 무너질 듯이 위험하게 흔들리는 건물과 정체 모를 요란한 소리들. 아직 찾지 못한 듀이까지.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당장 이곳을 나가야 하는 게 맞았지만, 이 금고를 그냥 지나쳤다가는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야.

빨리 끝내면 되겠지. 나는 팔찌를 꺼내 금고 가까이에 가져갔다. 그러자 팔찌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아직 금고는 열리지 않았다.

‘동력이 부족한 건가?’

팔찌의 무효화 능력을 쓰려면 사용자의 피가 필요하다. 나는 지니고 있던 호신용 칼을 꺼내 또다시 손바닥을 그었다. 어차피 상처 치료약이 있었기에 고민은 없었다.

손에서 흐르는 붉은 액체가 팔찌에 계속 스며들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피를 흘렸는데도 아직 금고는 잠긴 상태 그대로였다.

“얼마나 강력한 마법이 걸린 거야?”

금방 나갈 생각이었건만, 이렇게 되니 초조함이 느껴졌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

어쩔 수 없지.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게 더 아까운 상황이 될 터였기에, 나는 칼을 꺼내 아까보다 더 깊이 상처를 냈다.

왈칵, 쏟아지다시피 한 피가 고스란히 팔찌에 흡수되었다. 그 영향으로 팔찌가 내뿜는 푸른빛이 더 짙어졌으나 그럼에도 금고는 열리지 않았다.

나는 미간을 구겼다. 도대체 동력이 얼마나 더 필요한 거야? 이래서야 내가 위험하게 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철컥-

드디어 금고의 마법이 풀렸다. 흘린 피가 많아서일까, 기쁘기보다는 어디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 들어 있는지 봐 주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금고의 문을 열었더니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오래되어 보이는 책 한 권이었다.

“겨우 책 한 권을 이런 데 보관한 거야?”

눈을 찌푸렸다. 상처 치료약을 꺼내 상처에 뿌린 뒤, 피는 드레스에 대충 닦고서 책을 꺼냈다. 오래됐지만 보관이 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언어지?”

책에 적힌 것은 내가 본 적이 없는 문자였다. 다만, 책장을 휙 넘기는 동안 시선을 끄는 삽화 한 장을 발견하기는 했다.

청록색 머리카락에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아주 아름다운 여성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거 설마.’

벨라 일족과 관련된 책?

그 순간, 또다시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렸다. 이제는 진짜 나가야 한다. 나는 책을 챙겨 들고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런데 피를 많이 흘려서일까, 눈앞이 어지러워지며 몸을 휘청였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과 함께 건물이 흔들리며 바깥에서 쾅쾅거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이 소리들은 대체 뭐야?”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채 상황을 좀 더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꼭 감았다 뜨는 것으로 어지러움을 떨친 뒤, 투명한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바로.

“듀이……?”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변했다고 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젖히고는 상체를 내밀 수 있을 만큼 내밀었다.

마물들의 시체가 늘어진 곳 근처에서, 듀이가 사람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설마? 안 돼……!”

부딪치는 대상 중에 그레이 경이나 세사르까지도 속해 있는 걸 보니, 듀이는 아마도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중인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쪽 사람들이 듀이의 움직임을 막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 란타나의 수하들로 보이는 자들은 듀이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누군가가 듀이의 사각에서 그의 등 뒤를 공격했다.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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