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꼬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쪽이야! 빨리, 빨리!
꼬마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자신을 재촉하는 요정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아무것도 없이 깜깜하기만 하던 주변의 공간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꼬마는 자갈길을 걷기도 하고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그리고 꼬마는 요정이 안내해 준 장소로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다 왔어! 여기야!
그곳에는 문 하나가 있었다. 요정이 뿌듯한 듯 허리에 양팔을 얹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넌 운이 좋은 편이야! 이곳에 왔으면서도 출구를 찾지 못해서 죽는 사람들이 꽤 있거든.
“…….”
-이제 여길 나가기만 한다면, 그동안의 기억은 전부 잊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어. 누구보다도 강해지는 거야!
“…….”
-아마 바깥에서 널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될걸? 어때 설레지?
“…….”
-응? 왜 아무런 반응이 없어? 넌 기쁘지도 않아?
“응. 기쁘지 않아.”
꼬마는 요정이 가리키는 출구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요정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저 문을 지나가기만 하면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꼬마는 직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곳을 지나 버린다면, 무언가 잊어서는 안 되는 걸 영원히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게 뭐였지?’
꼬마가 눈을 찌푸렸다. 무척이나 소중한 무언가였던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꼬마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이 뭐였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그러고 있어? 빨리 여길 나가도록 해!
“너 혹시 내 이름이 뭔지 알아?”
-이름? 몰라. 하지만 어차피 저 문을 지나면 모든 걸 잊게 될 거야! 이름 같은 건 새로 만들면 돼!
“…안 나가.”
-응? 뭐라고 했어?
“난 안 나갈 거야!”
꼬마는 결심했다. 그게 뭔지 떠오를 때까지는 이곳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나가 버렸다가는 분명 후회할 거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늦어지면 아예 죽을 수도 있다니까? 무의식의 공간이 무너져 버린단 말야!
옆에서 요정이 시끄럽게 외쳤으나 꼬마는 무시한 채 상념에 잠겼다. 나는 누구지? 이름은 뭐지?
‘트레스……?’
그리고 그때, 꼬마는 무언가를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트레스? 맞아.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어. 그렇지만.
“아니야. 트레스가 아니야.”
꼬마가 고개를 거세게 휘저었다.
트레스 따위가 아닌 다른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물어보던 사람이 있었다.
그때, 꼬마의 머릿속에 언뜻 분홍색이 스쳐 지나갔다.
“분홍색?”
꼬마가 멍청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있다. 꽉 막힌 것 같은 가슴을 따듯하게 두드리는 기억이. 꼬마는 계속 입 속으로 ‘분홍색’을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기억이 잡힐 것 같기도 한데…….
조금 더 노력하면 떠올릴 수 있을 거야. 꼬마는 출구가 아닌 반대쪽으로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너 어딜 가는 거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뒤에서 요정이 급하게 쫓아오며 날개를 파닥이는 소리가 들렸으나, 꼬마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듀이의 의식이 무의식의 공간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을 때.
그가 잡혀 있었던 아네모네 궁 내부의 깊숙한 지하에서는 기현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그르릉…….”
“키엑! 키에에엑?”
듀이가 자리에서 일어선 채 최상급 마수들에게 검을 겨눴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텅 빈 것처럼 초점이 없었고, 갈색 머리카락은 뿌리에서부터 천천히 은색으로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마수들은 그런 듀이를 경계하듯 움직임을 멈추고는 자신들끼리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이 듀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방금까지의 상황과는 전혀 달라진 분위기였다.
마수들은 자신들의 앞에 있는 ‘무언가’를 보며 본능적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낀 것이었다.
이는 듀이가 각성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변화였다.
의식이 몸을 떠나가 있는 동안, 현실에 남은 빈 육체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르릉! 그르릉-!”
그러나 생존의 위기를 느낀 마수들 역시, 듀이에게 지지 않기 위해 맞서며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서걱-
듀이가 휘두른 검이 최상급 마수의 다리를 깔끔하게 베어 냈다. 마치 푸딩이라도 자르는 듯, 유연하고 가벼운 동작이었다.
“키엑! 키에에엑!”
그러나 잘린 다리는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고, 그사이에 나머지 마수들이 듀이를 없애기 위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쾅-! 듀이의 검이 최상급 마수들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지하실 내부에 고막이 터질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해, 주변의 공간이 사정없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
비슷한 시각.
“잠깐 실례합니다.”
“네?”
“제가 아네모네 궁에 오는 게 처음이어서인지,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성 동쪽 내부의 한적한 복도에서 그레이가 우연히 마주친 하인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못난 제자를 찾아오기 위해 그레이가 네리아를 따라서 아네모네 궁으로 입성했을 무렵.
그녀를 따라온 호위 인력들은 모두 본인이 수색을 맡은 구역으로 능력껏 뿔뿔이 흩어졌다.
‘네리아 아가씨의 옆에 남을 사람도 있어야 할 것 같았지만…….’
자신은 괜찮으니 다들 듀이를 찾는 데 힘을 보태 달라는 네리아의 명령을 모두가 거스르지 못했다.
‘오늘 제가 아네모네 궁에 방문한다는 건 비밀이 아니에요.’
네리아는 이곳에 오기 전, 갈 생각이 없던 티 파티 초대장 하나에 일부러 답장을 보냈다.
‘디르케의 별궁에 초대를 받아 아쉽지만 참석이 어렵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디르케가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자신의 별궁을 방문한 손님을 해하고도 무사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랬기에 네리아가 란타나와 같은 공간에서 동석하고 있을 때, 그레이는 화장실을 가는 척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다면 손님 입장인 그레이가 디르케의 궁을 제멋대로 활보하고 다닐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세사르는 마법을 써서 어떻게 잘 다닐 것 같고, 황태제 전하께서 보내 주셨다는 자객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 잘만 이동하던데.’
몸을 숨기는 건 그레이의 전공이 아니었다. 기척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런 건 이런 한정된 내부 공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레이가 선택한 방법은 근처를 지나가는 하인을 대충 붙잡는 것이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제 주인이 계신 곳까지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안내는 어렵지 않지만, 화장실을 가느라 여기까지 오셨다고요?”
그레이를 바라보는 하인의 눈에 의심의 빛이 들어섰다. 그레이가 꿀꺽 침을 삼켰다.
하기야 지금 이곳과 네리아가 있는 곳은 거리가 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변명이기는 했다.
“죄송하지만 믿기지 않습니다. 화장실은 이쪽이 아닌데, 그걸 핑계로 어디를 가셨던 것인지.”
“…….”
그레이와 아네모네 궁의 하인. 두 사람 사이에 거북한 눈빛이 오갔다. 한적한 복도에 긴장감이 들어서-
“미안합니다!”
…지는 않았다. 그레이에게는 긴장감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손날로 하인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치자, 남자가 한순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레이는 주변을 살펴본 뒤, 쓰러진 하인을 빈방에 끌고 들어가 옷을 벗겨서는 자신이 갈아입었다.
“흠, 옷이 조금 끼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들어는 간다.
기절한 하인은 적어도 5시간은 푹 잠들어 있을 예정이었기에 그레이는 평화롭게 빈방을 벗어났다.
복장은 의외로 소속감을 준다.
게다가 황태제의 부하가 전해 준 정보에 따르면 아네모네 궁은 일꾼이 자주 바뀐다고 하던가.
그래서인지 손님인 그레이가 궁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의외로 그를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일부러 바쁜 척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더니 굳이 말을 거는 사람조차 없었다.
‘여기는 없는 것 같고. 여기도 아니야. 제자 놈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이 모지리 같은 놈!’
그레이는 초조한 심정이 되어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듀이를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신호를 보내기로 되어 있었지만, 아직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후…….”
그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뿐인 제자의 몸이 성하기는 할는지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네모네 궁 바깥에는 추가 지원을 위한 인력들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듀이를 발견하지 못해서야…….
그레이가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음? 이거 뭐냐?”
바닥 아래에서 걸리적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가 바닥에 얼굴을 바짝 붙여서는 귀를 가져다 댔다. 아래쪽에서 미세하게 빈 공간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여긴 혹시 지하실?
“…….”
그레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가진 야생의 감이 말했다. 이 아래쪽에서 수상한 냄새가 난다고.
“드디어 제자를 찾은 것 같군.”
다만 아까 봤던 지도에는 이런 공간이 없었는데, 디르케가 지내는 동안 새로 구축하기라도 한 걸까.
그레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지하실 안으로 들어갈 입구를 뜯어내려고 할 때였다.
어쩐지 아래에서 급격하게 광음이 울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기쁜 나머지 환청을 들은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쾅-! 와르르-!
그레이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래에서 뭔지 모를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체 모를 파열음은 계속 커지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레이가 서 있던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듀이를 찾으러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하건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새 바닥이 쩌저적 갈라지고 있었다. 그레이가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몸을 뒤로 뺐다.
그러고는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먼지로 자욱해졌다.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였다.
“젠장, 어떻게 된 거야? 듀이!”
이미 그가 있던 방은 반이 무너져 있었다.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듀이! 살아는 있는 거냐!”
그레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먼지가 바닥으로 가라앉았을 때, 그는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의 반 정도가 은색으로 변한 그의 제자가 최상급 마수들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듀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이런 별궁 안에 최상급 마수가 있어? 그리고 듀이는 저게 어떻게 된 꼴이고?
의문점이 많았으나 일단은 제자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레이가 짐인 척 자루에 넣어 가져왔던 검을 꺼냈다.
“듀이! 네가 저쪽을 맡아라!”
하지만 제자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돌아보니 듀이는 여전히 마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젠장, 내 목소리를 못 듣는 건가.”
그레이가 욕설을 내뱉고는 듀이의 뒤로 달려드는 마수를 힘껏 공격했다. 전투의 여파로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으나, 뒷일까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