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32)화 (132/172)



<132>

“그럼 바로 출발하죠.”

“네리아 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져올 게 있습니다.”

아네모네 궁으로 향하기 위해 저택을 나서려던 때였다. 세사르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본인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잊은 물건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세사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나타난 그가 나에게 팔찌 하나를 내밀었다.

다만 장신구라기에는 상당히 투박한 모양새를 가진 물건이었다.

“가지고 계십시오, 네리아 님.”

“세사르 님? 이 팔찌는 뭔가요?”

“마도구 비슷한 물건인데, 혹시 몰라서 가져와 보았습니다.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네? 황가가 아닌 개인이 마도구를 소지하는 건 불법인데요……? 하지만 급하니까 자세한 대화는 마차로 이동하는 사이에 마저 하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사르가 들고 있던 팔찌를 낚아챈 뒤, 재빠르게 마차 안으로 탑승했다.

철썩-!

마부가 채씩을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최대한 빠른 속도로 거리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재개하도록 해요. 이 팔찌는 용도가 무엇이고, 사용하는 방법은 어떻게 되나요?”

“네리아 님? 아까 불법을 지적하신 것 치고는 상당히 적극적이신 것 같습니다만……?”

“긴급 상황이니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불법이라는 사실을 지적했지, 하면 안 된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듀이의 신변이 위험한 상황인데 고작 그런 것이 뭐가 문제가 될까.

“대비책은 사소하다고 해도 많을수록 좋죠. 그럼 세사르 님, 설명을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팔찌는 제가 마탑에서 마법을 배우던 시절에 만든 물건입니다.”

세사르에게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마법사라기엔 마력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그는, 마탑의 동기들에게 반편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마법을 사용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이 팔찌를 개발했습니다. 동기들의 마법 공격을 무효화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무효화? 그렇다면 그 팔찌로 해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다만 알고 계신 마도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팔찌의 동력으로 사용되는 건 마력이 아니라 사용자의 피라는 것입니다.”

팔찌에 피를 많이 먹일수록 마법 무효화 능력도 상승한다. 과연, 타고난 마력량이 적은 그가 만들 수 있는 해결책이었다.

‘그렇지만 동력원이 마력이 아닌 피라니…….’

흔히 알려진 상식을 아예 벗어난 일이었다.

새삼 느끼지만, 눈앞의 남자는 역시 천재였다. 또 다른 천재인 자비에도 그렇고 세계는 참 넓구나,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마력이 차단된 장소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기존의 마도구와는 작동 원리가 전혀 다르기에 엄밀히 따져 보면 딱히 불법도 아닙니다.”

“대단하시네요. 진심으로요.”

“하하. 어쨌거나 아네모네 궁 입구에 잠금 마법이 걸려 있다길래, 궁 내부의 다른 시설에도 함정 마법이 걸려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어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팔찌가 필요한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요. 상처 치료약은 챙기셨지요?”

“물론이에요. 귀한 물건을 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원하시면 아예 가지셔도 되고요.”

그러면 더 고맙지. 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품속에서 호신용으로 가져온 단검을 꺼냈다.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준비해 놓는 게 좋겠지. 나는 칼로 손바닥을 그어 일부러 상처를 내고는 팔찌에 피를 흘려보냈다.

“…….”

붉은 액체가 팔찌에 흡수되는 장면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상처가 생겼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듀이에 대한 걱정이 더 커서 그런 것이겠지만.

‘다친 곳이 없으면 좋을 텐데.’

나는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이 세계에 오게 된 것을 ‘새로 태어났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내 곁에는 언제나 갈색 머리의 소년이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항상 듀이가 있었다. 때로는 나란히 손을 잡고 걷기도 했다. 언제 어느 때고, 우리는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런 듀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옆에 선다고?

더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싫다. 끔찍하다. 고통스럽다.

그것은 정말,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괴로워지는 일이었다.

‘듀이를 되찾아 올 거야. 반드시.’

나는 고개를 돌리고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마부는 마차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을 올리고 있었으나, 나에게는 꽉 막힌 번화가를 달리는 속도보다 더 느리게 느껴졌다.

***

“어서 오십시오.”

아네모네 궁 앞으로 도착하자, 언제나 란타나를 따라다니는 회색 머리의 시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름이 렌이라고 했던가.

“여기까지 오시는 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레이디 발렌티스.”

“네, 반가워요.”

“란타나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쪽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렌이 시선을 옮겨 내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레이 경과 세사르를 포함한 6명의 인원이 나란히 내 뒤를 지키고 있었다.

“제 호위를 맡은 분들이에요. 전부 같이 들어가도 되죠?”

“…….”

“낯선 곳은 무서워서요. 디르케께서도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겠죠?”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타인의 거처 안으로 들어가는데 호위를 6명씩이나 데려가는 건, 적대적인 관계에서나 이루어지는 상당히 무례가 되는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란타나에게는 나와 동행하는 호위의 수를 제한할 자격이 있었다. 어차피 칼을 쥔 쪽은 내가 아닌 그녀이기도 했다.

과연 란타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네모네 궁 내부로 6명을 전부 데려가느냐 마냐에 따라 이후의 작전이 달라진다.

적의나 다른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더니, 조금 뒤에 렌의 입이 열렸다.

“예, 이해해 주실 겁니다. 모두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끼익. 성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시종을 따라 건물 내부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다면 시작하는 건 작전 2. 그렇지만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아네모네 궁으로 온 내가 듀이를 되찾으려 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란타나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호위 인력을 전부 들여보내 준 건, 듀이를 빼앗기지 않을 확신이 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 쪽도 전부 실력이 확실한 정예들이다. 충분히 승산이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어떤 방 앞에 도착했다.

“란타나 님은 안쪽에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도 혼자 계신 만큼, 안쪽까지 호위를 데려가실 수는 없습니다.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몸을 뒤로 돌려 일행들과 모종의 시선을 교환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지금부터다.

“그럼 다녀올게요.”

“예, 아가씨. 대화가 끝날 때까지 저희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로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앞을 보려고 했을 때였다. 세사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세사르 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저 회색 머리의 시종 말인데, 처음 보는데 묘하게 낯이 익어서요.”

“그래요?”

닮은 사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거나 갑자기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럼, 레이디 발렌티스.”

그러는 사이에 문이 열렸고, 그 너머로 란타나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로 발을 들이자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네리아 양! 이렇게 다시 만나서 진심으로 기뻐요.”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란타나 님.”

“우선은 앉아서 차를 들도록 할래요? 향과 품질이 우수한 찻잎을 선별해 만들었답니다.”

그녀가 권하는 대로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물론, 찜찜하니 실제로 먹지는 않고 적당히 마시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제 편지는 잘 받았나요?”

“네. 그런데 협상이라니, 어떤 의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희, 얼마 전에 네리아 양의 공방에서 만났었지요? 그때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아요.”

그녀의 붉은 빛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듀이 경을 저에게 넘겨주세요. 저는 그 대가로 네리아 양에게 최고의 귀족 자리를 줄게요. 제 제안은 아직 유효하답니다.”

“…….”

“어때요? 생각이 바뀌었나요?”

백 번을, 천 번을 똑같이 물어도 내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듀이는 절대 넘기지 않는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터였다.

하지만, 내가 당장 그녀에게 내뱉을 말은 거절의 답변이 아니다.

내가 란타나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안, 나와 동행했던 자들은 흩어져서 각자의 방법으로 듀이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서 내 역할은, 그들이 듀이를 찾을 때까지 란타나를 붙잡아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이건 ‘협상’ 자리니까. 적어도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듀이가 안전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대답하기 전에 란타나 님께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뭐든 물어봐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란타나 님은 이미 듀이를 데리고 있어요. 듀이가 광전사인 사실을 알고 계시니, 아마 각성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요.”

“정답이에요! 네리아 양의 말처럼 저는 듀이 경을 각성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답니다.”

“그러면 그냥 하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또다시 불러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거죠?”

“으음. 제가 듀이 경을 강제로 뺏어 간다면, 네리아 양이 저를 싫어하게 될 거 아니에요?”

맞는 말인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했다. 나는 이미 그녀를 싫어하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말해 줄게요. 저는 네리아 양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우리는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란타나 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친구도 동반자도 될 수 없어요. 제 부모님을 살해한 원수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아, 그 일 말이죠.”

란타나가 생긋 웃었다.

내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듯 평온한 태도였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죄책감이라고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나는 이를 악물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래, 실컷 웃던가 해.’

언제고 그녀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해 줄 거니까.

“그건 미안해요.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목적이 있잖아요? 저도 제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었답니다.”

“…네?”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참 한결같이 뻔뻔한 사람이었다. 목적이야 있었겠지만, 본인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자 앞에서 대놓고 할 소리는 아니지 않아?

“늦었지만 사과할게요.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협소하지만, 대신 네리아 양에게 선물을 하나 줄게요.”

란타나가 옆에 있던 줄을 잡아당기자 문이 열리며 갈색 머리의 시녀가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그녀는 란타나에게 낡은 편지 봉투 하나를 건네고는 다시 바깥으로 모습을 감췄다.

“네리아 양, 받도록 해요. 제 성의랍니다.”

“이 편지는 뭔가요?”

“설명하기보다는 네리아 양이 직접 읽어 보는 게 빠를 거예요.”

어서요, 하고 채근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봉투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이건……?”

나는 편지를 전부 읽고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란타나가 그런 내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