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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22)화 (122/172)



<122>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초인 ‘벨라’라는 요정은 아버지인 요정왕에게 무언가 저주를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일까요? 후계인 벨라 일족도 평화롭지만은 않았고, 결국은 동족상잔으로 멸족했다고 하네요.”

뒷부분은 아까 전 책에서도 봤던 내용이었다. 동족상잔이라니, 역시나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전쟁이 벌어지기라도 했던 걸까.

“그런데 특이하게도, 벨라 일족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고 해요. 마법이랑은 다르고, 굳이 분류하자면 주술에 가까운 능력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네요. 다만.”

다만?

특히나 궁금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게끔 더욱 귀를 세웠다.

“그 능력은, 본인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고 했어요.”

“대가가 생명? 그렇다면, 그 힘을 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죽게 된다는 뜻인가요?”

“맞아요. 그래서 그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요. 하지만 당연한 거겠죠? 자진해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죠.”

“제가 아는 건 이 정도예요. 워낙 폐쇄적인 집단이어서인지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거든요. 네리아 양에게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네요.”

“물론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데 혹시, 그 일족은 전부 분홍색 눈을 가졌던 걸까요?”

“확실하게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요정의 눈이 분홍색이라고만 했지, 일족의 눈 색깔이 전부 분홍색이라는 서술은 없었거든요.”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듯 팔짱을 끼고 눈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일족의 눈 색깔이 전부 똑같은 건 중요한 특징일 텐데도 특별히 언급이 없었던 걸 보면, 그건 아니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건 단순한 제 추측이지만요.”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드려요, 자비에 님.”

많은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었지만, 그 주술적인 능력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된 건 상당한 소득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다른 궁금한 점이 생긴다면 언제든 편하게 절 찾아 주세요! 저는 매일 매시간을 거의 여기서 머물고 있답니다.”

자비에 역시 웃는 얼굴로 나에게 화답했다.

그러나, 말은 그렇지만 황제 폐하의 조언자인 그녀를 마음대로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만큼 인사치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궁금한 점이 없어도 놀러 오셔도 돼요.”

“…네?”

“아시겠죠? 꼭이에요! 네리아 양을 보고 있으니까, 매일 책만 읽느라 황폐해진 제 눈과 마음이 모처럼 정화되는 느낌이 들어서……!”

“…….”

“알렉사 양도 참. 이렇게 예쁜 친구가 있었으면 나한테도 진작 소개해 줄 것이지.”

“…….”

재방문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그녀를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자비에 같은 사람과 알고 지내면 내 쪽이 더 이득이지 않은가. 게다가 첫인상부터 재미있어 보이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네, 다음에 또 올게요.”

“약속했어요!”

나는 새로운 지인이 생겼다는 사실에 반가워하며 그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마차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방금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겼다.

그 주술 같은 능력은 본인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만약, 란타나가 멸족했다고 알려진 벨라 일족의 일원이라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예전 세계의 지하실에서 란타나와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반짝이던 유리 조각과 어느 순간부터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비릿한 쇠 냄새.

‘그건 피 냄새였어.’

추측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들고 있던 유리 조각으로 손목, 혹은 급소가 되는 부위에 상처를 낸 것이었겠지.

그곳의 란타나는 지하에 갇힌 자신이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며 나에게 그런 저주를 걸었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자 또다시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런데…….”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나 역시도 란타나와 같은 일족이라면-

‘나는 이렇게 태어난 내가 싫어. 차라리 누가 날 대신해 줘!’

내가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뜨던 날,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 이곳의 네리아가 외치던 원한 서린 목소리였다.

그녀가 자신이 이어받은 핏줄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알았든, 무의식적이었든,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로 그 힘이 발현된 건 아니었을까?

“…네리아는 그때, 누가 날 대신해 달라고 말했었어.”

그렇기에 때마침 예전 세계에서 사망했던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녀를 대신하기 위해서.

나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평행세계로 떨어진 것은 이유 없는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솔직히, 진심으로 놀랐다.

‘알게 되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주술을 쓰는 게 가능하다면, 다시 예전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가가 내 생명이라면 불가능할 것이 당연했다.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네리아의 목숨을 대가로 치렀기에 가능한 것이니까.

그렇지만, 아직 란타나에 관한 의문점이 전부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 애, 이름이 칼로스였지?”

‘코르’를 먹지 못하는 건, ‘벨라 일족’의 종족적인 특징이나 공통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란타나가 미인 수집으로 데려온 그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도 같은 일족일 확률이 높다.

그녀는 같은 일족을 데려와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설마…….’

혹시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타인의 목숨을 취해서 그 능력을 쓰는 것도 가능한 것은 아닐까?

돌이켜 보면, 이곳의 내 어머니에게는 칼에 심장을 찔린 흔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란타나의 모친이나 자매들 역시 칼에 심장을 찔려 사망했다고 했다.

…부위가 같다.

그게 우연일까?

어쩐지 피부에 소름이 돋아 몸이 춥게 느껴졌다. 마차에는 창문이 전부 닫혀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사람,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사람일지도.’

당연하지만 이 모든 건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내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좀 더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 벨라라는 요정이 아버지인 요정왕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뭐야?”

애초에 요정이란 존재가 정말 있기는 한 걸까? 그냥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나 전설이 아니고?

“…….”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있으니, 어느덧 마차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발렌티스 저택에 도착한 것이었다.

“네리아 아가씨, 다녀오셨어요. 외투는 저에게 주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리아 님.”

어느새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사샤와 듀이가 본관 앞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저주니, 일족이니 하는 것들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응, 다녀왔어.”

“도서관에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글쎄.”

이건 반만 해결이 되었다고 해야 할지. 그러다가 문득, 듀이의 얼굴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듀이, 다음부터는 내가 황궁에 갈 때도 호위로 따라와 줘.”

“네, 알겠습니다.”

황궁으로 가는 길은 딱히 위험하지 않기에 그동안은 듀이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란타나의 목적을 모르는 이상, 지금부터라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그런데 표정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아프신 건 아닌가요?”

“아픈 건 아니고, 란타나 님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그냥 머리가 조금 복잡해서 말야.”

듀이와 사샤, 두 사람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란타나 님이라면 디르케를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건국제에서 그분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랬어?”

듀이가 가볍게 꺼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황궁에 있었으니 지나가다가 마주치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언제?”

“네리아 님이 휴게실에 계셨을 때요. 그런데 그분이 저한테 이상한 말을 했었어요.”

“이상한 말? 설마, 무슨 해코지라도 당한 거야? 내 기사라고?”

“아뇨, 짧은 대화뿐이었어요. 그런데 저보고 그냥 기사가 아니라고…….”

“그래?”

란타나가 듀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찜찜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듀이가 힐더 경과 얼굴이 닮은 걸 알아보기라도 한 건가.

‘그런데 힐더 경이라면.’

이렇게 이름을 떠올리고 있으니, 동시에 예전 일이 떠올랐다.

나는 란타나에게 황태후 폐하의 선물을 전하러 서궁으로 갔을 때의 일을 회상했다.

‘폐하의 자서전을 읽던 때였지?’

책장을 넘기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곳에 온 지 시간이 상당히 흘렀는데도 힐더 할슈리트 경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그러다가 응접실로 들어온 칼로스가 책을 뺏어 가는 바람에 힐더 경에 관한 건 까맣게 잊었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어째서 이 세계에서는 힐더 경의 활약상이 들려오지 않는 건가, 라고.

“디르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기는 해. 다들 힐더 할슈리트 경에 관해서는 알고 있지?”

듀이와 힐더 경은 혈연으로 추측할 만큼 얼굴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천재 검사라는 실력 역시도.

그동안은 듀이가 그 사실에 부담감이라도 느낄까 봐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기사 시험에도 합격했으니 말해도 되지 않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왜 힐더 경의 언급이 잘 없는 건지 묻는 것을 겸해서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들려오는 대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힐더 할슈리트 경이요? 저는 듣지 못했던 분인데, 어떤 분이신가요?”

“…응?”

사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힐더 경을 모른다고? 듀이는?”

“죄송합니다, 네리아 님. 저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에요.”

“농담이지? 정말 몰라? 대륙 최강, 제국의 최연소 군단장이잖아? 왜, 그 은발 금안의 천재 소년 검사 말이야.”

힐더 할슈리트 경은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기사인 듀이나 수도의 귀족은 전부 꿰고 있는 사샤가 모를 리가 없지 않아?

하지만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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