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21)화 (121/172)



<121>

“알렉사 양, 안녕하세요!”

그녀의 이름은 알렉사 로닐로, 저번 수확제에서 라일라 무리의 사주를 받아 내가 걸고 있던 목걸이를 연못에 버린 적이 있던 소녀였다.

그때의 일 때문이라면 좋을까?

알렉사는 자신이 사교계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며, 황궁 도서관의 사서가 되기 위해 공부하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오랜만이에요, 네리아 양! 여전히 예쁘셔서 멀리서도 한눈에 바로 알아봤어요!”

“반가워요! 그동안 잘 지냈나요? 혹시 저번에 보내 주신 편지처럼, 정말 사서가 되신 거예요?”

“아직은 견습이에요. 정식 사서가 되어서 네리아 양에게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알렉사가 수줍은 듯 웃었다.

원래도 책을 좋아하던 그녀는, 수확제 행사에서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밝아 보였다.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리아 양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 도서관이니 책을 보러 오신 거겠군요.”

“네, 아무래도 그렇죠.”

“찾으시는 책이 있다면 제가 도와 드릴게요!”

“괜찮아요. 찾을 건 다 찾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서-”

알렉사는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듯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책에는 이미 용건이 끝났기 때문에 적당히 거절하려던 찰나, 다른 질문거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자비에 님의 이동 동선을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같은 도서관에서 일하는 그녀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담인 척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말끝을 흐리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렉사가 아쉬운 듯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신가요? 그럼… 출입구까지라도 같이 가요! 저도 마침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좋아요, 같이 가요.”

걸어오던 방향이 전혀 달랐던 것을 생각하면, 알렉사가 가려던 곳은 출입구 방면이 전혀 아닌 것 같았으나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나를 동경하는 영애들이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이런 식으로 기회를 만드는 일은 흔했고, 어차피 나도 그녀에게 물을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렉사 양은 아실까요? 그 천재라는 자비에 님이요. 그분도 황궁 도서관에 계신다던데.”

그랬기에 나는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잡담을 위한 가벼운 화제인 척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도서관에 있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있으려나요?”

“자비에 님이요? 그분은 개인 독실에서 나오는 날이 거의 없다 보니 지나가다가 마주치긴 어려울 거예요. 그런데 그분은 어째서……?”

“음,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한 번쯤은 뵙고 싶다고나 할까요.”

독실에서 나오는 날이 거의 없다고? 그렇다면 나올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건가……?

알렉사에게는 평범하게 대답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어요!”

“네?”

“저, 사실은 지금 자비에 님에게 가는 중이었거든요. 네리아 양도 저랑 같이 가실래요?”

응?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너무 의외의 제안이었기에 잘못 들었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제가 들고 있는 책도 자비에 님의 심부름으로 가져가는 것이었거든요. 견습 사서는 이런 잔심부름을 하는 것도 일이라서요.”

“…….”

“설마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건가요? 저는 수확제 때의 목걸이 일이 아직도 죄송해서,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아뇨, 알렉사 양!”

다급하게 부인했다.

괜한 말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일이 번거로워지겠다고 생각했는데, 가능하기만 하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런데 외부인인 제가 가도 되는 건가요? 마음대로 사람을 데려왔다고, 알렉사 양이 저 때문에 꾸중이라도 들으면 곤란하잖아요.”

“그건 괜찮아요. 어쩌다 보니 제가 예전에 자비에 님의 목숨을 구해 드린 일이 있었거든요.”

“네……? 목숨이라고요?”

목숨이 오갈 만큼 심각한 일이 있었어? 당황하여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무거운 책장에 깔려 하루 내내 움직이지 못하던 자비에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도와주었다고.

“그 위치는 사람들이 거의 안 다니는 곳이어서, 제가 없었으면 진짜 죽었을 수도 있어요.”

“…….”

“아무튼 그 일을 계기로 자비에 님과 꽤 친해질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친구를 데려가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아, 네리아 양, 이쪽으로 가면 돼요,”

“네…….”

…세상에는 책장에 깔려 사망하는 사람도 있는 걸까. 멍하게 생각하다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어쨌거나 찾고 있던 사람을 이렇게나 빨리 만날 수 있게 된 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수확제 때, 알렉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호의를 베푼 건 아니었는데 그때의 일이 이렇게 돌아오다니.

역시 사람들과 잘 지내서 나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알렉사를 따라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

살아 있는 도서관, 걸어 다니는 사전, 다리스 제국의 현자 등.

대단한 칭호들을 수식어로 달고 있는 그 사람의 첫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알렉사 양이죠? 고마워요. 가져오신 책은 저쪽에 대충 던져 놔 주세요. 쿠키 먹고 갈래요?”

황궁 도서관 내부, 자비에가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는 개인 독실.

그곳의 문을 열자, 처음 보는 어떤 여성이 옆으로 편하게 드러누워서는 쿠키를 주워 먹는 동시에 뒹굴뒹굴 책을 읽고 있었다.

“…….”

저 사람이 자비에 님?

알렉사에게 눈으로 묻자, 그녀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사 또한, 처음 봤을 때는 의외였다는 입 모양이 함께였다.

안경을 쓰고는 책상에 각 잡힌 자세로 앉아 독서 하는 지적인 모습을 예상하고 있었건만…….

“쿠키는 됐고, 자비에 님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 친구가 있어요.”

“친구? 귀찮은데…….”

인기척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그녀가, 일주일은 안 감은 것 같은 머리를 벅벅 긁고는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오, 맙소사.”

그러고는, 성가심은 구름 너머로 사라지기라도 한 듯이 이번에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눈을 비볐다.

“사람? 사람인가? 그림인가?”

“네리아 발렌티스입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그, 그림이 말을 했어……!”

“자비에 님, 정신 차리세요! 네리아 양, 이해해 주세요. 자비에 님이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물다 보니, 사회성이 조금 부족해요.”

“…….”

음? 방금 심한 말을 하지 않았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알렉사가 넋이 나간 자비에를 테이블에 앉혔고, 나 역시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이것만 치우고 다시 올게요.”

“가, 가지 마요, 알렉사 양! 이런 미인이랑 둘만 있으면 부담돼!”

그녀가 애타게 알렉사를 붙잡았다. 그러나 알렉사는 자비에의 손을 냉정하게 떼어 내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

결국, 독실의 테이블에 남은 사람은 그녀와 나, 둘이 되었다.

“…피, 피샤 자비에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유명하신 분의 실물을 뵙게 되어서 진심으로 영광이에요.”

“저, 저야말로 이런 미인을…….”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는지 큼큼, 헛기침했다.

“자비에 님은 37개 국어가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 지금은 2가지가 더 늘어서 39개 국어가 가능하긴 한데.”

“정말요? 어떤 언어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차세대 사교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던 나에게, 낯선 사람과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갔고, 어느덧 자비에가 평온한 상태를 되찾았을 무렵.

“그래서, 네리아 님은 저에게 뭔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저를 찾아오신 거지요? 뭐가 궁금하신가요?”

“네? 아뇨, 저는.”

“괜찮아요. 많은 분이 지식을 구하기 위해 저를 찾으시니까요.”

첫 만남부터 다짜고짜 궁금한 걸 물어보는 건 몰염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게다가 알렉사 양의 친구시잖아요. 알렉사 양에게는 크게 도움 받은 일도 있다 보니, 저도 협조하고 싶거든요. 황가의 일이나 위험한 일이 아닌 이상은 알려 드릴게요.”

“…….”

그러고 보니, 다시 돌아오겠다던 알렉사가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아마도 내가 자비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눈치채고는,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것 같았다.

하기야, 나 같은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닐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러시다면.”

알렉사에게는 나중에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비에 님은 ‘벨라 일족’에 관해서 알고 있으신가요?”

“벨라 일족? …본 적이 있기는 해요. 오래전에 멸망한 북부의 어떤 왕국에서 쓰인 책이었을 거예요.”

그녀가 잠깐 눈을 감았다.

듣기로 자비에의 머릿속에는 가상의 도서관 같은 게 있어, 필요할 때마다 기억을 꺼내 본다고 했다.

추측이지만 그녀는 지금, 기억 속의 지식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벨라’라는 이름의, 분홍색 눈을 가진 어느 요정의 후계라고 했어요. ‘요정’의 실존 여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평범한 사람들 이상으로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게 그들의 특징이라고 했고요. …응?”

그렇게 설명하던 자비에가 나를 보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분홍색 눈이랑 매우 아름다운 외모? 그거, 딱 네리아 님 아니에요? 설마……?”

“글쎄요.”

나는 하하 웃으며 대답을 흐렸다.

나한테 그렇게 물어봐야, 나도 그걸 알고 싶어서 그녀를 찾아온 것이니까.

“어쨌거나 계속 설명을 잇자면.”

나는 흥미로운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자비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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