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17)화 (117/172)



<117>

메모에 적힌 장소는 황궁 연회장 바깥의 야외 정원이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조명 아래 늘어선 정원수 근처에서 데이브가 홀로 서 있었다.

“네리아……?”

하지만 그는 쪽지를 보내고서도 내가 벌써 나타날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

“고마워할 건 전혀 없어.”

그가 나를 보며 반가움을 드러냈으나, 나는 싸늘하면서도 적대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말했었잖아. 앞으로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말라고. 네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해 주러 온 거야.”

“네리아.”

그러나 데이브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애절한 시선을 보냈다. 나와 대화하게 된 것만으로도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여긴 것 같았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 나도 다음부터는 너에게 말을 걸지 않을게. 하지만 예전에 있었던 일에 관해서 사과 정도는 하고 싶어.”

“무슨 사과?”

“네가 체스터 저택에 찾아왔을 때, 너를 도와주지 못했던 일 말이야. 그 일이 오래도록 마음에 계속 무겁게 남아 있었거든.”

그가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고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널 그렇게 쫓아낸 건, 절대 내 의지가 아니었어.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너를 돕는다면 당시의 발렌티스 가주였던 네 백부를 적대하는 행위가 되는 거잖아.”

“…….”

“두 가문이 대립하게 만들 수는 없었어. 난 후계자로서의 선택을 했던 거야. 네리아, 너도 귀족이니까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걸 말이야.”

…참, 개소리가 술술 잘도 나오는구나. 물론, 나 역시도 다른 의도가 있어서 이 자리에 나온 건 맞다.

하지만 데이브의 저 되지도 않는 핑계를 듣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황급히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너를 그렇게 돌려보내고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몰라. 하지만 믿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너는 명백한 피해자고, 내 말을 이해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

“다만, 널 상처 입혀서 미안했다는 말 정도는 하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며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그의 눈빛에서 일순 처연함과도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예전 세계의 데이브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던 나는 쉽게 알았다. 저건 진심 따위는 전혀 담겨 있지도 않은 가식이라는 것을.

오히려 나에게 환심을 사서, 나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속마음이 너무나도 잘 느껴질 정도였다.

‘뭐,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같이 박자를 맞춰 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데이브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쩍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자, 어떤 나무의 잎이 바람의 방향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사실 이해는 해.”

그랬기에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고는, 데이브의 애처로운 눈동자를 보며 감정에 휘둘린 척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심을 가장하기 위해 눈에는 적막한 감정을 담은 채였다.

“난 백부님에게 배척받는 처지였고, 그런 상황에서 네가 나를 도와줬다면 네 입장이 곤란해졌겠지.”

“네리아? 그 말은, 오해를 풀어 주는 거야?”

“말 안 끝났어. 머리로 아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어린 시절에 사이가 좋았던 만큼, 널 원망하고 배신감을 느꼈던 건 사실이야.”

“그건……!”

“사과는 받을게. 하지만 앞으로도 우리 사이가 좋아질 일은 없을 것 같아. 용건 끝난 것 같으니까 나는 이만 돌아갈게.”

“왜 사이가 좋아질 일이 없을 거라고 단정하는 거야?”

그에게서 몸을 돌려서는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데이브가 내 손목을 붙잡고는 나를 가깝게 끌어당겼다. 뿌리칠 수 있기는 했지만, 일부러 그가 하려는 대로 놔두었다.

“데이브?”

“우린 태어나기 전부터 약혼 관계였잖아? 난 우리가 예전처럼 다시 가깝게 지냈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난 지금도 내 약혼녀는 너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쓰레기 같은 네 백부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데이브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마치 소설 속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에게나 나에게나, 연극의 현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둘 중 한 명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까.

“데이브… 너한테는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영애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은 거야?”

“안 괜찮을 건 뭐가 있겠어? 아직 약혼을 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말했잖아. 우리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결정된 일이야.”

“하지만…….”

“네리아,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모로도 가문 같은 시골뜨기 따위와 한 약혼은 물릴게. 난 우리가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 늦게나마 네 상처를 없앨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할 테니까-”

“네, 좋아요. 약혼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해요. 물리죠.”

데이브가 그렇게 헛소리를 이어 나가던 때였다. 어둑한 뒤편에서 잔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로도 가문 같은 시골뜨기 따위? 그런 소리를 들어 가면서 약혼을 강행할 이유는 없어요. 어차피 결혼이 급한 건 그쪽 가문이지, 저희가 아니거든요.”

“…크, 클라라 양?”

데이브의 예비 약혼녀, 클라라 모로도였다. 나온다면 지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였다.

“귀책사유는 당신에게 있어요. 알죠? 제 귀로 확실히 들었으니까 발뺌할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자, 잠깐 클라라 양-!”

예상외의 인물이 등장한 것에 데이브가 당황하는 동안,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씩 미소를 흘렸다.

내가 하녀를 통해 쪽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클라라 모로도였다.

이 약혼은 체스터 가문이 주도한 것이다. 그런 만큼 모로도 영애가 데이브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고 있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랬기에 나는 쪽지에 이런 내용을 적었다. 만약 약혼을 원하지 않거나, 예비 약혼자의 약점을 잡고 싶다면 어느 시간까지 이 장소로 조용히 나와서 숨어 있으라고.

모로도 영애가 예비 약혼자의 실체를 보고도 약혼을 성사시킬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이 되든 데이브가 손해를 볼 것임은 확실했다.

그런데 이렇게나 바로 파기를 결정하다니. 돈줄이 급한 체스터 가문이 상당히 난처해지겠군.

나와 모로도 영애, 두 사람을 놓고 이득을 저울질하던 데이브에게 어울리는 흡족한 결말이었다.

“그리고 저기… 발렌티스 양.”

데이브에게는 칼같이 통보를 내리던 모로도 영애는 정작 날 보며 볼을 붉히고 있었다.

그녀는 북부 출신에 수도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식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얼굴이 익었다.

나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애 중 한 명이었는데, 그녀의 몸에는 내가 만든 도자기 액세서리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혹시… 약혼 논의를 엎을 때, 필요하다면 증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무, 물론 발렌티스 양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요!”

“네, 기꺼이요.”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데이브를 응징할 수 있는 데다 공방의 소중한 손님인데 그 정도를 못 해 줄 리가 없지.

데이브는 모로도 영애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닭 쫓던 개처럼 바라보다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 너 설마… 일부러 이런 비겁한 짓을 한 거야? 날 곤란하게 하려고?”

“일부러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리고 비겁은 무슨. 입에 발린 소리로 나를 꾀어내어 발렌티스 가문의 돈을 노리려던 인간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내가 모로도 영애를 부른 건 맞아.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상대가 있는 남자를 단둘이서 만나는 건 조금 그렇잖아? 오해받거나 추문이 생기는 건 싫었거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 우리 사이가 좋아질 일은 영원히 없을 거야. 이번에는 알아들었길 바라. 나도 이만 돌아갈게.”

“네리아, 너-!”

뒤늦게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가 화를 내며 나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나한테 위협이라도 가하려는 듯이 내 어깨를 잡았을 때였다.

“듀이.”

어두운 조명 아래, 정원에 서 있는 사람은 나와 데이브 두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것도 야외인 장소까지 나 혼자서 왔을 리가 있나.

“이딴 이간질을 하다니. 이번 일은 가문 차원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아악-!”

정원수 뒤에 숨어 있던 사람은 모로도 영애뿐만이 아니었고, 어디선가 나타난 듀이가 곧바로 데이브를 제압했다.

연회장에서 ‘그 사람 손, 더 아프게 잡고 있을 걸 그랬어요.’라던 듀이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데이브는 단지 붙잡혀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호소했다.

“체스터 공자, 제 레이디께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놔! 알았으니까 놓으라고!”

나는 한참이 지나고야 듀이에게 그를 놔도 된다고 지시했다. 데이브는 좀 당해 볼 필요가 있었다.

“데이브.”

나는 무릎을 굽히고는, 정원 바닥에 내팽개쳐져 넘어진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가문 차원에서 항의? 상관은 없는데, 해서 어쩔 건데? 난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나에게 치근덕거린 것도, 모로도 가문을 모욕한 것도 데이브였다.

“항의하고 싶으면 해. 네 부모님을 통해서 말야. 그리고 다신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마. 네 얼굴 보면 진짜 역겹거든.”

“…….”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건지, 데이브는 벙찐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제는 엮일 일이 없으려나?’

어차피 모로도 영애의 마음을 돌리든가, 가문의 빚을 갚을 새로운 방법을 찾느라 몹시도 바쁠 테니까.

할 말을 전부 끝낸 나는, 개운해진 기분이 되어서는 데이브를 뒤로하고 야외 정원을 벗어났다.

***

오늘 무도회의 마지막 일정은 황궁 내부의 휴게실에서 레오니트 황태제를 만나는 일이었다.

황태제와 내가 손을 잡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야 할 사항이었기에, 드러내 놓고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물론, 루체테의 칼리를 통해 연락하면서 도움은 많이 받았지만.’

그랬기에 이런 황궁 행사는, 우연히 마주친 척 황태제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마침 란타나에 관해서 묻고 싶은 일도 있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듀이는 잠깐 다른 곳에 있을래? 근처라면 아무 데라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네리아 님.”

다른 때였다면 어디가 되었든 듀이를 데려갔겠지만, 오늘은 만나는 상대가 황족이었다.

그런 자리에 개인 호위 기사를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적당한 위치에서 듀이와 헤어져서는 휴게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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