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나는 아무 말 없이 갈색 머리 소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분노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듀이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없었다.
게다가, 사샤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듀이를 열심히 꾸며서 무도회로 보내겠다더니.
‘그냥 써 놓은 말이 아니었구나?’
나는 듀이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언제나 흐트러져 있던 갈색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뒤로 넘긴 상태였고, 내 드레스와 세트로 맞춘 예복이 듀이에게 몹시도 잘 어울렸다.
순진무구한 강아지처럼 보이던 평소와 다르게 어쩐지 어른스러워 보이는 낯선 모습이었다.
어색한 것 같기도, 홀린 것 같기도 한, 그런 기분이 되었다.
“당신은 평민 출신 기사가 아닙니까? 그쪽이야말로 제 손을 놔주면 좋겠습니다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듀이를 좀 더 지켜보고 싶었으나 옆에서 또다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찮지만 우선은 저 방해꾼을 멀리 치워 버리는 게 먼저겠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데이브는 듀이에게 손을 잡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듀이를 쳐 내려고 팔에 힘을 주고 있는 것 같기는 했으나, 슬프게도 기사인 듀이의 완력을 이기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평민 기사.”
“…….”
데이브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우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방금까지 나를 억지로 잡고 있었으면서, 정작 본인이 똑같은 짓을 당하니 기분이 나쁘다는 건가.
게다가 평민 기사라고?
명백한 비하의 목적이 담긴 호칭인 데다, 심지어 그는 듀이를 멸시하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감히 평민 따위가?’라는 감정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저런 주제에, 예전 세계에서는 잘도 착한 척 평민 구호 활동을 했었군. 속으로 혀를 찼다.
“네리아 님.”
듀이는 데이브의 행동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나를 불렀다.
대놓고 질문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데이브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나에게 의견을 묻고 있었다.
“듀이 경, 이제 놔주도록 해요. 황족분들도 계신 장소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네리아 님.”
듀이가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데이브를 떨쳐 냈다. 데이브가 화를 참는 얼굴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던 때였다.
“데이브.”
굳이 쓸데없는 말을 들어 주느라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늘 그렇듯, 말은 빨리하는 사람이 먼저였다.
“너, 기억나지? 네 입으로 내가 더럽고 불결하다고 말했었잖아.”
“네리아, 그때 일은-!”
“그런데 나도 동감이야.”
그렇게 말하며 방긋 미소 지었다.
“나도 네가 더럽고 불결하거든. 앞으로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역겨우니까.”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는 보란 듯이 듀이에게 팔짱을 꼈다.
데이브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와락 구기고 있었는데, 단순한 짜증을 넘어 마치 자신의 것을 빼앗기기라도 했다는 듯한 기색이 느껴질 정도였다.
기가 찼다. 네가 뭔데?
‘…클라라 모로도 영애라고 했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장래에 약혼자가 될지도 모르는 인간이 다른 여자에게 주기적으로 추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듀이 경, 이제 가죠.”
“네.”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듀이와 함께 연회장 중앙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데이브가 계속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네리아 님.”
옆에 있는 듀이는 자신을 자책하며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런 불쾌한 일 겪지 않으시도록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아냐, 딱 적당할 때 왔어.”
“그런데 아까 그 사람, 네리아 님에게 정말 그런 말을 했었나요?”
“더럽고 불결하다고 했던 거? 응, 뭐. 그래도 지난 일이니까.”
“…그 사람 손, 더 아프게 잡고 있을 걸 그랬어요.”
“그러네.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인간의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잡고 있어 줄래?”
“네, 네리아 님.”
농담으로 내뱉은 말이건만, 듀이가 반드시 그러겠다는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듀이는 듀이다. 어느새 데이브 때문에 불쾌하던 기분도 사라졌다.
“듀이, 황궁의 무도회는 어때? 황제궁 요리사가 만든 레몬 케이크랑 커스터드푸딩이 엄청 맛있는데, 먹어 봤어?”
“아뇨. 실은 긴장이 안 풀려서 아침부터 음식이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았어요.”
“처음은 그렇지. 배고플 테니까, 나중에 같이 먹으러 가자.”
그렇게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음악이 끝나며 악공들이 악보를 교체하는 동안,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이 플로어에서 내려왔다.
나는 듀이를 보며 반 정도가 비어 있는 플로어를 가리켰다.
“금방 다음 곡 시작할 테니까, 우리도 올라갈까? 그동안 연습 열심히 했잖아. 드디어 실전이네.”
“실전…….”
긴장했는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듀이의 손을 잡고는 비어 있는 플로어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가장 커다란 샹들리에가 내뿜는 환한 빛을 받아 듀이의 모습까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문득, 갈색 머리의 소년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어설프게 말을 더듬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엿한 기사님이 되어 있었다.
꼭 귀공자 같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내년부터는 듀이를 소년이라고 부르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고,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네. 사샤가 도와줬지?”
“네.”
듀이는 머리 모양이나 입고 있는 예복이 어색했는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건, 저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아니, 잘 어울려.”
제국 최고라고 칭송받는 얼굴을 매일같이 거울로 보다 보면, 자연히 미를 평가하는 기준치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타인의 외모에 감탄하는 일은 거의 없건만.
“멋있어. 거짓말 아니야.”
하지만 오늘의 듀이는 정말로 멋있었다. 이 장소에서 제일이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그…….”
듀이는 양 볼을 붉게 물들이고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네리아 님도 아름다우세요.”
“나도 알아. 그럼, 듀이 경.”
나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짓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에게 당신과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네. 그런데 방금 대사는 제가 해야 하는 말이 아닌가요?”
“음. 보통 그렇기는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렇게 말하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더니, 어느새 악공들이 다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듀이와 나는 서로의 손을 잡고는 흐르는 음악 속에서 몸을 움직였다.
***
데이브 체스터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귀족들이 왈츠를 추고 있는 플로어를 바라보았다.
가장 중앙에서, 그의 어린 시절 약혼녀였던 네리아 발렌티스가 춤을 추고 있었다.
황금을 녹인 것 같은 금발이 물결처럼 흔들렸고 선명한 분홍색 눈동자는 생기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운 광경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홀린 듯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네리아는 미인이었고, 이 장소의 주인공이었다. 연회장에 모인 그 누구에게 물어도 이견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네리아를 바라보는 데이브의 심정은 복잡했다.
놓친 물고기가 더 커 보인다는 말이 있지만, 네리아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해도 대어였다.
아름다운 외모는 당연하고 어느 순간 발렌티스 가문의 가주 내정자가 되더니, 지금은 황녀나 황태후와 친분을 쌓기까지.
게다가 예전에도 액세서리 사업을 성공시킨 적이 있었으나, 이번 마법약 사업은 특히나 노다지였다.
발렌티스 가문이 돈을 쓸어 담을 거라는 소문이 벌써 자자했다. 네리아 발렌티스는 지금, 수도에서 손꼽는 최고의 배우자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속이 쓰렸다.
네리아와 파혼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냉대하며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네리아를 부인으로 삼아 그것들이 전부 내 것이 되었을 텐데.’
억울했다. 한순간의 판단 착오였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체스터 저택을 찾아왔을 때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작…….’
데이브는 자신의 약혼녀가 될 클라라 모로도의 얼굴을 떠올리며 표정을 찌푸렸다.
‘모로도? 수도에서는 졸부로 더 유명한 시골 출신 가문 따위.’
급이 다르다. 체스터 가문이 사업에 실패하지만 않았더라도 자신과는 엮일 일이 없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제 가문이 모로도 가문에 결혼을 부탁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 몹시도 자존심이 상했다.
‘수도의 명문 체스터 백작가 출신인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클라라 모로도가 아니라 네리아인데.’
데이브가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가 춤을 추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벌써부터 네리아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아예 가망이 없는 건 아니야.’
네리아는 과할 정도로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옛말에 그런 표현이 있지 않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저렇게 싫어한다는 것 자체가, 좋든 나쁘든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애초에 그와 친밀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서 네리아가 그를 찾아왔던 게 아니겠는가.
싫은 감정은 좋은 감정으로 바꾸면 된다. 그는 분명히, 다른 귀족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게다가 혼담이 오가거나 특별히 만나고 있는 남자도 없잖아?’
지금도 파트너랍시고 데려온 게, 저런 평민 출신 호위 기사였다.
네리아가 일에 빈틈이 없이 보이기는 해도, 오히려 저런 부류야말로 한 번 남자에 빠지면 감정에 쉽게 휘둘리기 마련이었다.
‘무도회가 끝나기 전에 다시 네리아를 만나 봐야겠어.’
데이브가 그렇게 결심했다. 공을 들일 가치는 있었다.
약혼 예정자인 클라라는 네리아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예비용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
듀이의 춤은 완벽했다. 한 치의 실수조차 없는 훌륭한 리드였다.
“대단했어! 사교댄스로는 스승님인 그레이 아저씨를 벌써 뛰어넘었어.”
“네? 그 정도까지는…….”
아낌없이 나오는 칭찬에 듀이가 수줍어하면서도 기뻐했다.
“이제 다 적응했지? 다음 사교계 행사 때도 잘 부탁할게.”
“다음… 알겠습니다, 네리아 님.”
“이제 레몬 케이크 먹으러 갈까? 아, 잔이 뾰족한 음료수는 알코올이니까 마시면 안 돼.”
“네, 스승님께 들었어요.”
명성이 아깝지 않은 각종 디저트로 배를 채운 후에는 듀이를 주변 귀족에게 소개하고 다녔다.
올해의 기사 시험 수석 합격자인 그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로는 다른 귀족들을 만나며 친분을 쌓거나 사업에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슬슬 휴식을 취하려고 할 때였다.
“네리아 발렌티스 님. 체스터 영식께서 레이디께 이것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연회장의 하녀가 나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체스터?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종이를 펼쳤다.
네리아, 저번에 있었던 일에 용서를 구하고 싶어. 나에게 사과할 기회라도 주지 않겠어? 연회장 바깥의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데이브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