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네……?”
“란타나 님도 그렇고,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도 코르를 못 드셨는데……. 코르를 못 먹는 사람이 생각보다 흔한가 봐요?”
“…….”
“그럼 다과 가져오겠습니다.”
생각이 나서 꺼낸 이야기일 뿐,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었는지, 칼로스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사라진 장소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코르를 못 먹는 사람이 흔해?
적어도, 예전 세계에서는 어머니와 나 이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의사에게도 몹시나 드문 체질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는데.
“…….”
나는 소파에 앉은 자세 그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황궁의 남쪽 정원에서 처음 란타나를 만났을 때, 그녀가 코르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먼 친척 관계라도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란타나가 사적으로 데려온 소녀 역시도 코르를 먹지 못한다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라고 해도,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를 찜찜함에, 방금까지 힐더 경에 관해 생각하고 있던 것을 전부 잊어버릴 정도였다.
“미인은 코르를 못 먹는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걸까요? 방금 그 건방진 아이, 하는 짓은 어처구니가 없어도 얼굴은 예뻤잖아요. 네리아 양 정도는 아니지만요.”
“그럴싸하네요. 처음 들어 보는 규칙이기는 하지만요.”
그랬기에 클로이의 농담에도 적당히 대답하기만 하며 웃어넘겼다. 건국제가 끝나면 조용히 뒷조사라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무렵, 다시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다과를 가지러 갔던 칼로스가 돌아왔다고 생각했건만 열린 문 너머로 가장 먼저 보이는 얼굴은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아니었다.
“황태후 폐하께서 보내 주신 분들을 기다리게 했네요! 송구합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눈앞에 서궁의 주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응접실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와 맑은 목소리는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어디선가 만난 것만 같은 기시감과 란타나를 본 순간부터 이상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박동도, 그때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되면 이러지 않을 줄 알았더니.’
나는 이유도 모르게 쿵쿵 뛰고 있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부모님의 원수라든가 의문스러운 점이 많은 상대라든가,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황태후의 사자로서 그녀를 만난 것인 만큼 예의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별말씀을요. 많이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양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보다, 제 시녀가 두 분께 무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어요. 칼로스의 주인으로서 대신 사죄드려요.”
란타나가 그렇게 말하며 클로이와 나에게 무릎을 살짝 굽혔다. 고개를 숙이는 것도 함께였다.
“앞으로 시녀 교육에 더 신경 쓰도록 하겠어요. 자, 칼로스 양도.”
“두 분께 결례가 많았습니다.”
란타나를 따라 들어왔던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 또한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클로이와 내가 고위 귀족가 출신이라고 해도, 란타나 역시 제국의 주요 세력가였다.
어찌 보면 자존심이 상할 법한 행동이었건만, 그녀는 불편한 기색은 티끌조차 없이 입가에 미안하다는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칼로스의 실수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문제 삼을 생각이 있었다고 해도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될 정도였다.
황제에게 총애받는 디르케가 먼저 고개까지 숙였는데 일을 크게 벌일 수는 없을 테니까.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는 상대였다.
“시녀분이 어려서 저지른 실수인 것을요.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황태후 폐하께서 보내신 하사품입니다.”
“이건 남부의 헤르닐 지역에서 생산된 찻잎이군요! 헤르닐은 폐하의 고향이지요? 귀하고 의미 깊은 선물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황태후 폐하께 말씀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칼로스의 일로 서론이 길어지기는 했으나 어쨌거나 란타나를 찾은 이유는 바로 이것. 가져왔던 선물을 건네는 것으로 목적을 마쳤고, 그 뒤로도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갔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같이 차라도 드시는 건 어떠신가요?”
차? 클로이와 함께 서궁을 떠나려고 하는데 란타나가 생긋 웃으며 티타임을 권유해 왔다. 나는 클로이와 눈을 마주치며 짧은 시간 동안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시간은 상대방에게 정보를 얻어 낼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란타나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대화를 통해 정보를 캐내는 것도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였다.
그랬기에 이런 상태로는 서궁에서 티타임을 가져 봐야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기만 할 확률이 높았다.
클로이 또한, 디르케에게는 큰 관심이 없는 것인지 심드렁한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그렇다면야.
“죄송하지만 곧바로 황태후궁에서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제안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신가요? 아쉽네요. 다음에는 꼭 같이 시간을 보냈으면 해요.”
“이후에라도 기회가 생기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저희는 이만.”
이 뒤로도 딱히 다른 일정은 없으나 거절에는 바쁜 척이 최고다.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란타나를 지나쳐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어……?’
란타나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시녀를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저 사람은?’
외모 때문인지 란타나에게만 시선이 쏠려 있다가 이제야 발견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녀의 외모가 눈에 익었다. 누구더라?
“…….”
“레이디 발렌티스?”
란타나를 볼 때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기시감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고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눈앞의 그녀에게는 왼쪽 뺨에 있던 ‘그것’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저 사람은 분명…….
“실례합니다. 혹시, 몇 달 전에 저를 만나지 않으셨나요?”
확실히 기억났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라는 평범한 외모를 가졌으나, 왼쪽 뺨에 칼에 베인 듯한 흉터가 눈에 띄게 남아 있던 여성.
니나렛의 튜터가 되기 위해 2차 면담을 하러 가던 날, 양손에 들고 있던 책을 와르르 쏟는 바람에 내가 도와준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란타나의 시녀였어?’
그런데 란타나의 시녀가 왜 황녀궁으로 가는 길에 있었던 거지? 게다가 지금은 왜 흉터가 없고?
“네, 만났습니다. 그때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갈색 머리의 시녀에게서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역시, 그 사람이 맞았다.
하지만 흉터의 유무 때문일까, 상당히 인상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뺨에 남아 있던 흉터는 어떻게 된 걸까?
묻고 싶었으나, 외모에 관한 문제를 본인 앞에서 입에 올리는 행동은 예의가 아니기에 침묵했다.
상처를 가리게 하는 것 정도라면 마법으로도 가능하기는 했으니.
“레이디 발렌티스? 제 시녀에게 용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결국, 다른 질문은 하지 못했다. 어차피 물어 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황태후궁의 개인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는 홀로 고민했다.
서궁과는 방향이 전혀 다른 황녀궁으로 가는 길에, 란타나의 시녀를 마주친 일이 과연 우연일까?
그리고 다른 의문이 하나.
사람이 길을 걷다가 들고 있던 책을 쏟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란타나의 수행 시녀가 그런 어리숙한 실수를 저지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 내가 책을 주워 주었는데도 받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만 하던 갈색 머리 시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란타나의 시녀는 나를 보러 왔던 게 아닐까? 지금까지 그녀로 인해 특별히 나에게 벌어진 일은 없었으니, 단지 나를 관찰하기 위해서.
만약, 그렇다면 왜 나를? 대체 무슨 목적으로?
“…….”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눈을 찌푸렸다.
어디서 본 것만 같은 기시감, 코르에 알레르기를 가진 공통점, 수행 시녀의 수상한 행동까지.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많은데, 나는 여전히 란타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우선은 란타나를 어디서 만났는지부터 떠올리는 게 먼저가 아닐까?’
예전에는 듀이 때처럼 지내다 보면 어련히 기억이 나겠거니 하고 넘겼건만, 이래서야 그저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책상 서랍에서 깨끗한 종이 한 장을 꺼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세사르에게 보내는 것으로, 혹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거나 들여다볼 수 있는 마법약을 만들 수는 없느냐, 그런 질문을 적은 것이었다.
***
건국제 무도회가 가까워지며 수도가 설렘과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황태후궁 내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고위급 귀족가의 영애들이 시녀로 모여 있다고는 해도, 그녀들 역시 꿈과 희망이 가득한 소녀들.
황태후궁의 시녀들은 서로서로 모일 때마다 건국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건국제 무도회는 제가 100살이 될 때까지도 제 로망으로 남을 거예요! 그래서, 발렌티스 양은 어느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맞췄다고요?”
“저야 항상 드레스는 노엘에서 구매하죠. 헤론 양도 그렇죠? 파트너는 누구를 데려가기로 했어요?”
“아버지와 같이 가기로 했어요. 부부 싸움으로 어머니께 버림받은 아버지를 제가 구명하기로 했거든요. 발렌티스 양은요?”
“저는 제 호위 기사님과 함께하기로 했답니다.”
“호위 기사님이라면, 기사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셨던 그분이죠?”
“네, 맞아요.”
“발렌티스 양에게 황금 장미를 선물한 분이잖아요? 멋져요! 게다가 꽤 잘생긴 분으로 기억하는데요!”
“그거야 뭐.”
듀이가 칭찬을 받을 때면, 내가 더 기쁜 나머지 어깨를 으쓱이게 된다. 헤론 영애의 칭찬에 아닌 척 뿌듯해하고 있을 때였다.
“레이디 발렌티스, 저택에서 짐이 도착했어요. 방에 옮겨 두고, 드레스는 구겨지지 않도록 옷장에 걸어 두었으니 나중에 확인해 주세요!”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가 나에게 소식을 전달했다.
짐이 도착했다니. 잘못 온 게 있다면 저택으로 다시 연락을 보내야 했기에, 나는 헤론 영애와 잠깐 헤어져서는 방으로 향했다.
건국제 당일에도 시녀들은 황족을 모시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무도회 준비 역시 저택이 아닌 황궁에서 하게 되었다.
그랬기에 사샤는 내가 건국제에서 착용할 드레스나 보석을 황궁으로 보냈는데, 확인한 결과 잘못 도착한 물품은 없었다.
그리고 가방 안에는 그 외에 편지가 두 통 섞여 있었는데, 먼저 위쪽에 있던 편지를 꺼냈다.
세사르가 보낸 답장으로, 기억을 되찾는 마법약은 예전에 이론을 만든 적이 있었기에, 실제 약으로도 만들 수 있도록 곧바로 연구를 시작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역시 가문의 보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래쪽에 있던 나머지 편지를 꺼내 들었다. 두 번째는 사샤가 쓴 편지였다.
“응……?”
무슨 내용이려나, 하는 가벼운 기분으로 내용물을 꺼냈건만, 나는 편지를 읽으며 눈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