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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13)화 (113/172)



<113>

란타나가 황태후궁에는 도대체 무슨 일로 온 걸까? 게다가 아까 그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보였던 태도는 무엇이었고?

란타나라면 백부 일가와 손을 잡고 이 세계의 부모님을 살해한 사람이다. 그런 만큼, 듣자마자 경계심부터 생기는 게 당연했다.

나 역시 클로이를 따라 휴게실의 문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란타나가 수상하다고 해서 시녀인 내가 황태후의 접견을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기에 그로부터 시간이 더 지나서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식당에서 동료 시녀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먹으며, 나는 손님 접견 업무를 맡은 영애에게 단순한 잡담인 척 질문했다.

“오늘 폐하께 손님으로 디르케가 찾아왔었다면서요? 무슨 용건이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되긴 한데, 딱히 대단한 용건은 아니었어요. 그냥 안부 인사요.”

“안부 인사요?”

“네. 폐하께서 얼마 전에 견과류를 먹고 쓰러지신 적이 있었잖아요? 건강을 잘 챙기시라면서, 약재를 선물로 주고 갔어요. 꽤 비싸고 구하기 힘든 약재였어요.”

“아… 그런가요?”

나는 말끝을 애매하게 흐렸다.

안부를 묻는 일이라면, 황궁에서 지내는 사람끼리 당연히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이었다. 오히려 아랫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하기야 디르케가 황태후 폐하께 대놓고 무슨 짓을 할 수도 없을 테니.’

란타나가 워낙 미심쩍은 상대이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경계를 했던 것 같았다.

다만, 라일라가 황태후에게 견과류를 먹일 수 있도록 시녀 선발에 개입한 자가 그녀 아니었던가.

그런 주제에 폐하께 건강을 잘 챙기라며 약까지 챙기다니.

황가의 웃어른에게 당연히 보여야 할 예의이긴 하지만, 사정을 아는 나로서는 그 사실이 어쩐지 우습게 느껴졌다.

증거가 없으니, 폐하께 말씀드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오늘의 공식적인 일과도 전부 끝마쳤기에 휴식을 위해 내가 사용하는 개인실로 들어서려던 때였다.

“발렌티스 양!”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시녀장 헤론 후작 부인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 역시 본인의 방으로 돌아가던 중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시녀장님.”

“네, 안녕하세요. 오늘 새로운 업무는 처음이었을 텐데,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없었나요? 고생이 많지요?”

“전혀 없었어요. 그리고 황태후 폐하를 모시는 일이니까요. 만약 힘든 일이었다고 해도 고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 같아요.”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발렌티스 양은 참 기특하기도 해요.”

헤론 부인이 그렇게 말하며 웃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 서궁으로 선물을 보내야 하거든요.”

“서궁이라면, 디르케의 궁이요?”

“네. 오늘 디르케가 폐하께 진귀한 약재를 선물로 가져왔거든요. 그래서 답례로 찻잎을 보내려는데, 발렌티스 양이 가 줄 수 있나요?”

“제가요?”

황태후가 내리는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가는 건, 시녀들이 원래 해야 할 업무가 맞았다.

하지만 심부름을 가는 장소가 란타나의 궁이라니. 솔직히 말해서, 굳이 가고 싶지는 않았다.

‘부탁을 받은 것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고.’

하지만,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거나 아픈 것도 아니지 않은가.

“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랬기에 고민하지 않았던 척 웃는 얼굴로 수락했다. 하지만 그 뒤에 부탁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런데, 다른 시녀와 같이 가도 될까요? 다른 궁으로 심부름을 가는 건 처음이라, 제가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서요.”

“발렌티스 양이라면 전혀 실수 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신경 쓰인다면 다른 시녀를 데려가도록 해요! 제가 말해 놓을 테니까요.”

찻잎이라면 먹는 음식이다.

혹시 란타나가 차를 마시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내가 찻잎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증인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물론, 란타나가 나를 공격한다거나 표적으로 삼았다는 정황이나 확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괜히 유난을 떠느라 사서 걱정하는 행동 같기는 했다. 그렇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시녀장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헤론 부인에게 인사했다.

***

다음 날.

헤론 부인에게 받은 찻잎을 들고서 클로이와 함께 디르케가 거주하는 서궁으로 향했다.

미인인 주인을 닮은 건지 정원이 특히나 아름다운 장소였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귀한 발걸음에 감사드립니다!”

클로이도 나도 처음 오는 곳이었지만, 황태후의 사자로서 방문한 것인 만큼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미리 선약을 잡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송구스럽게도, 디르케께서는 지금 황제 폐하를 뵈러 가셨기에 궁을 비우셨습니다.”

“금방 오실 것 같은데,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응접실로 갈게요.”

란타나 본인이 부재중이었다.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황족이 내리는 선물은 받는 본인에게 직접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 법도였다.

클로이와 나는 어쩔 수 없이 서궁의 시종을 따라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같이 와 줘서 고마워요, 클로이 양.”

“아니에요. 오늘은 오전에 딱히 일도 없잖아요? 혼자 왔으면 기다리느라 심심했을 텐데, 같이 오기를 잘했어요.”

비어 있는 응접실에 클로이와 나란히 앉아 늘 그렇듯 쑥덕쑥덕 이야기를 떠들던 중이었다.

“어? 저 책은?”

소파 끄트머리에 책 한 권이 늘어트려진 것을 발견했다.

붉은색 가죽 커버에 황금색 금속 장식이 박혀 있는 화려한 책이었는데, 상당히 익숙한 물건이었다.

“폐하의 자서전 아닌가요?”

“그럴걸요. 저렇게 생긴 책은 하나뿐이죠. 네리아 양은 봤나요?”

“네… 읽기는 했죠.”

4년 전이었던가, 황제 폐하의 취미 생활로 발간된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필독서라고 불리는 책이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도 책을 쓰셨다니. 괜스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클로이 양도 읽었죠?”

“읽기만 했겠어요? 전부 외웠죠. 어느 페이지에 어느 글자가 있는지도 알고 있을 정도예요. 이 책에 한해서는 자비에 님과 지식을 경쟁할 수도 있다고 자신해요.”

“그 정도예요?”

부모님의 강요였다며 진저리치는 클로이를 보며 웃었다.

어차피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시간을 보낼 겸 책을 가져와 펼쳐 들었다.

다리스의 젊은 황제는 눈앞에 펼쳐진 두 갈래 길을 바라보았다.

왼쪽은 수도로 향하는 지름길.

반면 오른쪽은 거리가 더 길지만 아름다운 호숫가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있었다.

젊은 황제는 아주 잠깐 어느 쪽으로 말을 몰 것인지를 고민하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앞에 어떤 만남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한 채로.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갈래 길 중 어떤 방향을 고를 것인가?’

이것 역시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주 사소한 결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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