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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12)화 (112/172)



<112>

당연한 말이지만, 반갑다는 표현이 반드시 긍정적인 뜻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은 바쁘기도 했고 딱히 엮일 일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되다니. 뜻밖의 만남이었다.

“오랜만이시네요, 도나 님!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바, 발렌티스 양……?”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녀와 나 사이에 어떠한 시선이 오갔다.

순간, 도나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스쳤는데, 지은 죄가 있는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었다.

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후 폐하의 건국제 의상을 만들기 위해 대단히도 정성을 들였다더니, 어째서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황태제비로 유력했던 라일라와 그 모친인 멜비나 부인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수확제 전이라 의상실이 바쁜 시기였을 텐데도, 나에게 드레스랍시고 쓰레기를 주는 장난질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도나가 열심히 줄을 대고 있었던 라일라와 멜비나는 죄인이 되어 귀족 사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 그녀는 이번 건국제를 기회로 황태후와 인맥을 쌓으려고 한 것이다.

황태후는 수도보다 남부에서 머무는 기간이 더 길지만, 황제의 모친이자 황가의 큰 어른으로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도나는 이미 수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의상실의 주인으로서 자리를 잡은 자였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황족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연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권력이나 더 높은 위치를 원한다는 거겠지.

“그러네요. 말씀처럼 오랜만이시네요, 발렌티스 양!”

도나 헤런드 역시, 여기서 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난감함이 섞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발렌티스 양은 폐하의 식사 담당 시녀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이 자리에……?”

“어제까지는 그랬었는데, 오늘부터 치장 담당으로 역할이 바뀌었어요.”

“그…러셨군요.”

응접실에 어색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옆에 있던 클로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며 흥미롭게 변한 얼굴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런데 말이죠, 발렌티스 양! 저번에 있었던 일 말인데-”

내가 자기 일에 재를 뿌리기라도 할까 봐 염려되었던 건지, 도나가 지금 와서 그때의 일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멜비나 전 백작 부인이 강제로 시켰다든가 하는 식의 변명이라도 할 생각이겠지.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황태후궁의 주인이 나타났다.

다른 치장 담당 시녀인 헤론 영애가 황태후를 모셔 왔고, 사람들의 시선이 곧장 그쪽을 향했다.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그쪽이 헤런드 부인이군요! 반가워요. 보내 준 디자인 스케치는 제 마음에 들었답니다. 그러면 바로 시작하도록 할까요?”

황태후의 명령에 따라, 도나 헤런드가 챙겨 온 스케치북을 펼쳤다.

황태후의 취향을 기반으로 과하지 않은 변주를 준 디자인이었는데, 확실히 폐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만도 했다. 하기야 실력은 처음부터 확실한 사람이었으니까.

“오늘은 디자인을 확정할 예정입니다. 혹, 폐하께서 바꾸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시녀분들께서도 같이 의견을…….”

그녀는 이야기하는 동안 은근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몹시도 많겠지.

하지만, 수확제 때는 도나에게 신세를 졌던 만큼 똑같이 돌려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이 장식물은 거추장스러워 보이는데 빼는 게 어떨까요?”

“대신 소매의 러플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게 좋겠어요.”

사람들이 드레스에 관한 의견을 내는 동안에도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입을 떼지 않았다. 얼굴에는 일부러 흐린 표정을 지은 채였다.

“가슴에는 카메오 브로치를 달아도 좋겠어요. 그런데 네리아 양은 왜 아무 의견이 없어요? 어머나! 표정이 왜 그래요?”

클로이가 나를 돌아봤을 때였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내 표정을 보자마자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짓궂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감추고서는 사람들의 주의가 나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네리아 양,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거 아닌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도나 님과 있다 보니 예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요…….”

나는 애써 웃는 척, 여전히 흐린 표정에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은편에 앉은 도나의 얼굴색이 점차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무슨 짓을 할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이제부터는 저도 적극적으로 참여할게요.”

“네? 무슨 일이 있었길래요?”

“그냥 조금… 하지만 별건 아니에요. 다시 시작하도록 할까요?”

“네, 네! 다시 시작하도록 하죠!”

도나가 급히 대답했으나, 사람들의 관심은 나에게 쏠린 뒤였다.

“왜요? 뭔데요?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답답하니까 그냥 말해 봐요! 그렇죠, 폐하?”

이미 내 태도에 답답함을 느낀 그들은 나를 채근했고, 황태후 역시 궁금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사람들이 물어보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뭐, 이를테면 황태후 폐하에게 하는 고자질이었다.

“제가 수확제에 갈 때, 도나 님께서 저에게 데뷔탕트 드레스를 만들어 주신 적이 있었거든요.”

“바, 발렌티스 양! 그 일은 제가 나중에 다시 설명을-!”

도나가 아까보다 더 새파래진 얼굴로 나를 만류했으나, 그녀에게는 내 입을 막을 힘이 없었다.

결국, 그들이 내 데뷔탕트를 망치려고 일부러 나에게 전시품 수준의 드레스를 만들어 주었다는 일화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맙소사. 백작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치졸한 짓까지 당했던 거예요?”

“정말 너무하네요!”

사람들이 멜비나 부인의 행동을 탓하고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도나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그렇게 유치하고 비겁한 짓에 동참하시다니, 어떻게 그런!”

“그건 괴롭힘도 괴롭힘이지만, 디자이너로서의 명예를 저버린 행동이 아닌가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건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멜비나 부인에게 협조하라는 압력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기는 무슨. 멜비나 백모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에 신나서 작정하고 동참했으면서.

“그렇다면, 나중에 네리아 양에게 사과는 하셨나요?”

“아직은 아닌데, 곧 하려고 생각을…….”

“사과할 생각이 없으셨군요?”

“그럴 리가요! 그동안 발렌티스 영애가 계속 바빴잖아요? 방해가 될까 봐 기다린 거예요!”

“사과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요? 진심으로 실망했어요, 도나 헤런드 님.”

“앞으로 저나 저희 어머니가 라 블루벨 의상실에 갈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때의 일이 생각나 속상하다는 표정을 짓고만 있으니, 뒷일은 클로이와 헤론 영애가 모두 해결해 주고 있었다.

나는 울적한 척 손을 들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췄다.

“헤런드 부인.”

그리고, 이 일을 지켜보고 있던 황태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부인과 제 의복을 만든다는 계획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세요.”

“폐, 폐하! 그 일은 저도 억울합니다! 멜비나 부인의 압력을 받아 저도 강제로-!”

“뒷사정에는 관심 없습니다. 다만, 제 시녀가 부인과 함께 있는 것이 매우 불편해 보이는군요.”

황태후가 내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녀에게는 알레르기 약을 이용해 환심을 사지 않았나. 황태후는 내 편이었다.

“시녀를 바꿀 생각은 없으니, 의상 제작자를 바꿔야겠지요.”

“폐하!”

“이만 돌아가세요. 세 번 말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

도나가 애절한 눈빛을 하고서는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일은 없었다. 어쩌겠는가. 그러게 줄을 잘 섰어야지.

결국, 그녀는 황족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고 황태후궁에서 반쯤 쫓겨나듯 떠나게 되었다.

이런 일은 금방 소문이 날 테니 도나 헤런드에게는 불명예가 붙을 것이고, 라 블루벨도 머지않아 수도의 3대 의상실이라는 위치에서 떨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미안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내 데뷔탕트를 망치려고 할 때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았으니까.

***

결국, 황태후의 건국제 드레스는 황궁의 장인이 만들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나도 적극적으로 회의에 참여했고, 모두가 만족스러워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곧바로 황태후 폐하께 손님이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기에, 클로이와 나는 응접실에서 벗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어차피 손님 접대 담당 시녀는 따로 있기에, 놀기 위해서였다.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은데, 급료를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뭐 어때요. 다리스 황가는 대륙에서 제일 부자잖아요. 그보다 네리아 양, 재미있게 살았군요. 데뷔탕트 드레스는 멀쩡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구한 거예요?”

“말하자면 길어요. 우선 라일라의 티 파티에 잠입해서-”

언제나처럼 클로이와의 수다가 이어졌고, 편한 장소를 찾아 황태후궁의 시녀 전용 휴게실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였다.

“어?”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선객이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잠깐 감탄했다.

무척이나 예쁜 소녀였다. 나이는 나랑 비슷하거나 한두 살이 어린 정도일까?

선명한 주황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을 가진 소녀였는데, 옷까지 녹색 드레스를 입어서인지 꼭 메리골드 꽃을 보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휴게실에 테이블은 하나뿐이었기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통성명이라도 하려고 했건만, 그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

소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놀란 듯, 다음으로는 당황한 듯, 마지막은 화가 난 듯 독기에 찬 얼굴이 되어 있었다.

‘…뭐야?’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감정의 변화였다.

“손님이신가요? 저는-”

다시 말을 걸었을 때였다.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테이블에서 홱 일어섰다.

앉아서 볼 때와 다르게 키가 작았다. 다시 보니, 나랑 비슷한 나이가 아니라 14살쯤이 되지 않으려나.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소녀는 나를 견제라도 하듯이 노려보고는 말없이 휴게실을 떠나 버렸다.

‘…진짜 뭐야?’

상당히 무례한 태도였지만, 지적할 새도 없었다.

“…클로이 양. 방금 저분, 저를 노려본 거죠?”

“그런 것 같아요.”

“누구인지 알아요? 저렇게 예쁜 얼굴이라면 수도에 소문이 났을 텐데도 전혀 모르겠어요.”

“저도 처음 보는 얼굴이긴 한데, 대충 알 것 같기는 해요. 디르케가 미인 수집으로 데려와서는 시녀로 놔둔 사람 같아요.”

클로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휴게실의 문을 쳐다보았다.

“오늘 황태후 폐하를 찾아온 손님이 디르케인가 보네요.”

디르케? 란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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