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나는 이만 돌아갈게. 수도원에 가서는 네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칠 수 있게 되길 바라!”
“사라져! 죽어! 너 같은 건 그냥 죽어 버려, 이 쓰레기야-!”
쓰레기라니 누가 할 소린지.
나는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라일라를 뒤로한 채 문을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안녕하세요. 두 분은……?”
복도로 나오자, 아까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병사 두 명이 서 있었다. 아마도, 라일라를 북부로 데려가기 위해 온 사람들 같았다.
“제가 병사님들을 기다리게 한 것 같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시는 거죠? 라일라를 잘 부탁드려요. 아 참! 그리고 이거.”
나는 팔에 걸고 있던 솜 외투를 병사들에게 내밀었다.
라일라가 북부까지 가는 동안 내 생각이나 하라고 가져온 것인데, 주는 것을 깜빡한 것이었다.
“라일라에게 전달해 주시겠어요? 북부는 춥다고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레이디! 그런 죄인까지 세심하게 챙겨 주시다니, 마음이 넓은 분이십니다.”
“대단한 것도 아닌걸요. 그럼.”
나는 손도 마음도 가벼워진 기분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얼마 후, 뒤에서 병사들이 라일라를 끌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더러운 평민들!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뭐? 네리아가 준 옷이라고? 필요 없어! 버려!”
“황태후 폐하를 위험하게 만든 죄인 따위가 건방지게 구는구나! 그리고 이건 레이디께서 주신 귀한 옷이다! 어디서 감히!”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더는 라일라에게 볼 일이 없으니까.
그저, 앞을 향해 똑바로 걸어갈 뿐이었다.
***
황궁의 서궁.
흑발의 아름다운 미인이 정원에서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라일라 영애는 오늘 수도원으로 출발했다고요?”
“네, 란타나 님.”
“결국은 그렇게 되었군요. 북부는 추울 텐데, 라일라 영애가 고생이 많겠어요. 정말 안타까워요.”
란타나가 미소를 지은 채,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말과는 달리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쉽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들 가족은 진작에 필요성을 다했으니까.
“그리고 그 아이, 네리아는 이번 일로 상을 받게 되었고요?”
“네, 그렇습니다.”
“대단하네요. 8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죽은 듯이 살았던 아이가 어느새 귀족이 되더니 가문까지 차지해 버렸잖아요.”
란타나가 테이블 위에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회색 머리를 가진 시종이 그녀의 잔에 새롭게 차를 따라 주었다.
“렌, 놀랍지 않나요?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변할 수 있다니, 주술의 힘이라도 쓴 걸까요?”
“…….”
“목숨이 붙어 있는 걸 보니, 그런 종류의 일은 아니겠지만요.”
란타나가 혼잣말처럼 말하고는 생긋 웃었을 때였다.
“란타나 님!”
선명한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란타나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소녀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칼로스.”
“안녕하세요! 란타나 님께 차를 만들어 드려도 될까요? 제가 오늘 차 우리는 법을 배웠거든요.”
“물론이죠! 칼로스가 얼마나 잘 배웠는지 확인해 줄게요. 렌은 찻잎과 뜨거운 물을 가져와요.”
“알겠습니다, 란타나 님.”
회색 머리를 가진 시종이 명령을 따르기 위해 걸음을 옮겼고, 소녀는 란타나의 앞에 앉아 재잘재잘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란타나 님, 황제 폐하는 차를 잘 끓이는 사람을 좋아하시겠죠?”
“네, 그렇답니다.”
“그럼 더 열심히 배울게요! 폐하의 눈에 들 수 있도록요!”
칼로스라고 불린 소녀가 차를 우리는 데 열중했고, 란타나는 입가에 의문스러운 미소를 띠고서 그 모습을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한참을.
“…란타나 님, 다 만들었어요!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차 향기가 좋네요! 그럼 어디-”
어느새 란타나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서는, 소녀가 긴장하며 내민 찻잔을 기꺼이 받아 들었다.
“맛있어요. 기대 이상인걸요?”
“정말요?”
서궁의 정원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즐겁게 이어졌다. 느긋하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
황태후 폐하로부터 특별히 3일간의 휴가를 받았다.
라일라의 일로 여러모로 마음이 심란할 테니 휴식이라도 취하라며 배려를 받은 것이었다.
‘딱히 심란하지는 않지만…….’
그러기는커녕 치워야 할 사람을 치운 것에 개운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휴가를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는 법.
대신, 황태후 폐하께는 3일 중에서 하루만 쉬겠다고 말을 올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는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네리아 아가씨?”
“네리아 아가씨가 오셨어!”
그리고 백작저에 도착한 후.
미리 연락하고 간 것이 아니기에, 사샤를 비롯한 하녀들이 놀라면서도 나를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라일라에 관해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 때문에 황궁의 수사관들이 저택에 들이닥친 적도 있지 않던가. 라일라는 이미 가문에서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가씨……! 어떻게 오신 거예요? 잠깐 들르신 거예요?”
“하루 휴가를 받아서 쉬러 왔어. 저택에는 별일 없었지?”
“별일 많았죠! 발렌티스 가문이 드디어 부활의 서막을 열었다면서 아주 축제 분위기였어요. 저희도, 가신 분들도요!”
“그랬어?”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들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전부 아가씨 덕분이죠!”
“음, 솔직히 그렇기도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벽 근처에 멀뚱히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세사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로비를 지나가던 중에 나를 발견하고는, 인사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네리아 님!”
“안녕하세요, 세사르 님. 저한테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나가셔도 괜찮은데요.”
“그래도 집주인이 오셨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게 웃는 세사르의 얼굴이 오늘도 역시 돈으로 보였다. 이번 일은 그가 만든 약의 역할이 컸으니까.
게다가 정식 판매 개시도 전에 황가에 마법약을 납품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에게 문의와 선주문이 쏟아졌다고 한다.
황궁에 상품을 공급한다는 것은, 황가에서 품질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었다.
‘로이엔 경의 말로는, 원금 회수도 금방 가능할 것 같다고 했지?’
정말이지 요정왕의 심장이 아깝지 않은 성과였다. 가신들의 말처럼 아주 보물이 따로 없었다.
“세사르 님은 그러셔도 괜찮아요. 이번 일도 정말 감사드리고요. 역시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하, 천재라뇨. 저는 단순히 약을 만드는 잔재주가 있을 뿐입니다. 진짜 천재는 렌샤 같은 마법사를 말하는 거죠.”
“렌샤?”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 세사르가 인정할 정도의 천재라면 분명 대륙 전체에서 유명세를 떨쳐야 마땅할 텐데,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누구지?
세사르는 내 호기심을 알아본 것인지 설명을 덧붙였다.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렌샤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너무 위험한 고유 마법을 가졌다면서, 스승님께서 직접 렌샤의 목숨을 거두셨거든요. 저 같은 건, 발끝에도 닫지 못하는 대단한 천재였는데… 참 아쉽습니다.”
“네?”
분명 평범한 잡담이었는데, 갑자기 심각한 일화가 튀어나왔다. 나는 당황하여 되묻고 말았다.
“스승이 제자를 죽여요……? 마법계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건가요? 렌샤라는 분이 무슨 고유 마법을 가졌길래요?”
“네? 잠깐! 마법계는 그런 위험한 곳이 아닙니다! 그 사건이 특별히 충격적인 일이었어요!”
내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듯, 그가 급하게 말을 이어 붙였다.
“렌샤의 고유 마법이 무엇이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님도 죄책감을 느끼셨는지 얼마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고요.”
세사르가 안타까운 비극이라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네요.”
“아니에요, 세사르 님.”
나는 그에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고유 마법이라면…….’
황궁 수석 마법사의 절대 방어술이라든가, 황제의 호위 마법사가 패밀리어인 초록새를 이용하여 기사 시험장을 감시했다든가.
그런 경우들이 떠올랐다. 종류는 모두 다르지만, 하나같이 개성적이고도 특별한 능력들이었다.
그런데 그 고유 마법이 얼마나 위험했길래 스승이 제자를 죽이기까지 했던 걸까? 솔직히 호기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망자에 관해 정도 이상으로 파헤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에, 호기심을 지워 버렸다.
나는 그런 식으로 세사르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이번에는 사샤와 함께 내 방으로 향했다.
편한 복장으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책상 위에 반갑지 않은 문양이 찍힌 편지가 한 통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체스터 가문에서 보낸 것이었는데, 정확한 발신인이라면.
“데이브구나.”
역시나, 내가 갓 평행세계에 떨어졌을 무렵에 나를 차갑게 외면한 바 있었던 전 약혼자였다.
봉투를 대충 뜯어 내용물을 확인하자, 나에게 건국제의 파트너가 되지 않겠냐고 권유하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는 근처에 있던 사샤를 향해 질문했다.
“얼마 전에도 체스터 영식에게 건국제 파트너를 신청하는 편지가 왔었지? 그때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가?”
“네. 그런데 이건 어제 도착한 편지예요. 체스터 영식께서 또 아가씨께 파트너를 신청하신 것 같아요.”
“어제?”
내가 황태후 폐하의 눈에 든 데다, 가문에서 준비 중인 사업이 번창할 것 같다는 소문을 듣고는 친분이라도 쌓고 싶었던 걸까.
어쩐지 데이브의 의도가 훤히 보이는 것 같다.
게다가 소문으로 듣기에는, 최근 들어서 데이브에게 구체적으로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영애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파트너는 약혼녀가 될 분이랑 하든가 하지. 귀찮게 구네.”
“그러게 말이에요. 이번에는 답장을 안 보내도 되겠지요?”
“응. 한 번 보냈으면 됐어.”
나는 편지를 반으로 찢어 버리고는 쓰레기통에 휙 던져 버렸다. 신경을 써 줄 가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