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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09)화 (109/172)



<109>

“두 분 폐하, 저는 제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번 사건의 진범은 제가 아닙니다! 절대로요!”

“진범? 네리아 영애가?”

메인 홀이 한차례 술렁였다.

사람들이 나와 라일라를 번갈아 바라보는 동안에도 그녀의 주장이 이어졌다. 필사적인 목소리였다.

“상식적으로, 위험물을 섞는다면 남이 준비한 음식에 넣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제가 준비한 요리에 견과류를 넣는다면, 아무리 황태후 폐하를 구해 봤자 원인 제공은 제가 한 것이 되니까 공로가 되지 않잖아요?”

“…….”

“그런데 왜 랍스터 요리에서 땅콩 가루가 나왔을까요? 두 분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으세요? 부디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서 황태후 폐하를 위험에 빠트린 진짜 죄인에게도 벌을 내려 주세요!”

라일라가 상석에 앉은 황제와 황태후를 향해 그렇게 외쳤다.

본인이 견과류를 반입한 게 맞으면서 지금 와서 진범 따위의 단어를 운운하다니. 말하는 것만 보면 무슨 열사라도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라일라를 보며 비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숨겨야 했다.

“네리아! 내 말이 맞지? 네가 폐하의 음식에 손을 썼잖아!”

“…….”

“떳떳하다면 대답해 봐! 왜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어?”

뭐, 그거야 내가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으니까.

본인이 준비한 음식에 위험물을 섞을 리가 없다는 라일라의 말에 일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열심히 주장해 봤자, 내가 황태후의 음식에 견과류를 넣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같은 주장이라고 해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달라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라일라는 이미 잘못을 저질렀고, 그녀의 발언에는 신뢰성이 없었다.

“…….”

나는 황제와 황태후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사촌이 벌이는 무례에 면목이 없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역시나 조금 뒤, 상석에서 분노한 호통이 들려왔다.

“듣자 하니, 이 맹랑한 것이-!”

황제 폐하였다.

“내가 너희 발렌티스 백작가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줄 아느냐?”

“폐, 폐, 폐하? 저는……!”

“황족에게 위해를 가했으니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죄가 많은 부모일지언정, 그들을 위해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이 가엾어 곱게 보내 주려 했는데 어떻게 마지막까지……!”

“아닙니다. 폐하! 네리아에게 속으시면 안 됩니다! 저는 황가를 위해 진실을 밝혀내고자-”

“진실? 그리고 황가를 위했다? 너는 어디까지 우리를 기만할 셈이더냐? 안 되겠구나. 저것을 바깥으로 데려가 제대로 뉘우칠 때까지 매질하도록 해라!”

“폐, 폐하? 폐하-!”

기사 두 명이 양쪽에서 라일라를 붙잡았다. 라일라가 당황하며 소리쳤으나, 이제 그녀는 귀족이 아닌데다가 죄인이기까지 했다.

기사들의 움직임에는 자비가 없었고, 라일라는 그들에 의해 또다시 굴욕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아, 아닙니다. 폐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폐하!”

라일라가 뒤늦게 수습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홀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소음이라도 되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게 왜 또 입조심을 못 해서 굳이 매를 버는 걸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번에도 손을 흔들어 주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으니 참았다.

‘대신 북부의 수도원으로 떠나는 날에 배웅 정도는 해 줄 테니까.’

라일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고, 홀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네리아 양, 앞으로 오세요.”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라일라를 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온화한 말투였다.

“예, 폐하.”

나는 방금까지 라일라가 있던 장소로 걸어가 자진하여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물론, 다분히 의도적인 보여 주기식 행동이었다.

“늦었지만 발렌티스 가문의 책임자로서, 황태후 폐하께 저지른 잘못을 사죄드립니다. 벌을 내려 주신다면 겸허히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번 일은 개인의 잘못인 걸 아는데, 어떻게 가문에게까지 책임을 묻겠습니까? 나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랍니다.”

“폐하께서 내려 주시는 자비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비랄 것도 없지요. 네리아 양은 쓰러진 저를 구해 주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상을 내려야지요.”

“상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아뇨. 만약 저를 구한 사람이 네리아 양이 아니라 아까 그 아이여서, 이번 일의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라일라는 지금도 멀쩡하게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었겠지. 황태후는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는지 눈을 찌푸렸다.

“그러니 네리아 양에게는 상을 내리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머님.”

황태후가 고개를 돌려 동의를 구하자, 황제가 수긍했다. 그는 그걸 위해서 이 자리에 동석한 것이라며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전에 있었던 기사 시험 때, 발렌티스 가문의 전 가주였던 레고트가 저지른 잘못으로 백작가에 벌을 내린 적이 있었지.”

맞다. 그런 일이 있었다.

2년간 정무 회의 참석 금지 처분에 각종 특혜 몰수, 거액의 벌금까지. 가문이 망하겠다며 발렌티스의 가신들이 통곡했던 일이었다.

“그때의 명령을 전면적으로 철회하도록 하겠네. 당시에 물렸던 벌금은 상금으로 돌려주면 되겠군.”

“폐하!”

상을 받을 줄은 알았지만, 기대했던 이상이었다. 가신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벌써 눈에 보였다.

하지만 황족 앞에서 너무 기뻐하는 내색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은혜에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네리아 양? 저번에 내가 먹었던 알레르기 약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데요.”

“예, 폐하. 말씀하십시오.”

황제의 통보가 끝나자 이번에는 황태후가 말을 이었는데, 그녀의 표정에서 흥미가 비치고 있었다.

“내가 먹어 본 약 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았어요. 황궁의들도 놀라워하더군요! 어디서 구한 약인지 나에게도 알려 줄 수 있겠습니까?”

“그 약이라면, 저희 가문의 마법사가 만든 약이에요. 조만간 마법약 상점을 열 계획인데,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필요하신 만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호, 발렌티스 가문에서 마법약 사업을 시작하는군요! 하지만 어떻게 그냥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값을 치르겠다고 말하는 황태후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번 마법약 사업, 정식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성공한 것 같다고.

***

라일라가 갇혀 있는 곳은 황태후궁 내부의 어둑어둑한 독방으로, 황궁의 하녀나 하인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벌을 받는 장소였다.

나는 그곳에 도착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하인에게 질문했다. 왼손에는 솜을 넣어 만든 두툼한 외투를 든 채였다.

“잠깐 들어가도 돼? 라일라가 곧 수도원으로 떠나잖아. 마지막으로 인사를 해 두고 싶거든.”

“예, 물론입니다. 시녀님께서 물어보실 것도 없습니다!”

하인들에 의해 문이 열렸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았다. 라일라는 그곳에서 반쯤 쓰러진 자세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라일라.”

“…….”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분명 들었을 텐데, 의도적인 무시였다.

하지만 어차피 나야 내가 할 말만 하면 충분했기에, 아무 반응도 없는 라일라의 근처로 다가갔다.

“음식이 그대로네. 평민들이 먹는 음식은 먹기 싫어서 그런 거지?”

“…….”

“그런데 괜찮겠어? 클레멘탈 수도원에서 나오는 식사는 이것보다 훨씬 허름할 텐데……. 라일라가 걱정돼서 어떻게 하지?”

“…….”

“그리고 내가 널 찾아온 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야.”

“…뭐? 고맙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는지, 라일라가 고개를 들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에서 체념과 분노가 동시에 느껴지고 있었다.

“뭐가? 뭐가 고마워?”

“약속 지켜 줘서 고맙다고. 예전에 네가 말했었잖아? 가족들 대신 대가를 치르고 가문에 도움이 되겠다고.”

“그래서? 그게 뭐?”

“기사 시험 때, 백부님이 벌을 받았던 거 기억해? 그런데 정무 회의 참석 권한과 몰수당했던 특혜를 다시 돌려받았어. 그리고 그때 냈던 벌금은 상금으로 돌아왔지 뭐야? 심지어 2배로 말야!”

“…….”

“게다가 가문에서 마법약 사업을 준비 중인 거 알고 있지?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황궁에 약을 납품하게 되었지 뭐야? 라일라, 네가 일을 벌여준 덕분에 발렌티스 가문이 다시 부흥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고마워. 진심이야.”

“…그것참 잘됐네. 내 덕분인 줄 알면, 그렇게 말만 떠드는 게 아니라 날 구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라일라가 이를 갈면서도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뻔뻔한 태도였다. 정말이지 백부 일가는 마지막까지 반성이라고는 하지 못하는 족속들이었다.

‘뭐, 그렇다면야.’

기껏 왔으니 마지막으로 라일라의 속이나 뒤집어 줄까. 나는 입가에 떠오르려는 비웃음을 숨기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그렇게 생각했어. 원인이야 어쨌건, 네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었잖아? 가문 내에서 널 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넌 나한테 몇 없는 가족이잖아.”

“뭐라고……?”

“그런데 네가 수도원으로 영영 떠나 버린다니, 솔직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 폐하께 마법약으로 교섭하면 네가 받는 벌을 줄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진심인 척, 그렇게 말하자 라일라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작게나마 희망의 빛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저, 정말이야?”

“응. 네가 나한테 사과하면, 나도 지난 일은 전부 잊고 황태후 폐하를 뵙고 말씀드려 볼게.”

“네리아, 미안해!”

그래도 수도원에 가서 평생을 고생하는 것보다는 잠깐 자존심을 내려놓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걸까.

‘그’ 라일라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정말, 감옥에 계신 부모님과 레비가 불쌍해서……. 날 용서해 준다면, 앞으로도 네가 좋은 가주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진심으로 미안해. 응?”

“라일라…….”

그녀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라일라의 시선을 마주하며 방긋 웃었다.

“사과 잘 들었어.”

“네리아… 고마워! 네 말처럼,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가족-”

“그런데 다시 잘 생각해 보니까, 황족이 내린 결정을 일개 귀족인 내가 바꾸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뭐……?”

“안 되겠다. 방금 말은 없던 걸로 할게. 괜히 폐하께 반발했다가, 우리 가문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 미안해. 기껏 사과해 줬는데 도움이 되지 못해서.”

“…….”

그 말에 라일라의 표정이 또다시 변했다.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이해하고는 나에게 이를 드러냈다.

“너, 지금 날 가지고 논 거야?”

“글쎄.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네.”

“너… 너 미쳤어? 정신 나갔어?”

약 올리듯 떠들어 대자, 라일라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옆에 있던 빵 덩어리를 나에게 던졌다.

물론, 가볍게 피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야?”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니. 그건 예전부터 너희 가족한테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인데?”

나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게 착하게 살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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