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08)화 (108/172)



<108>

“라일라… 갑자기 왜 네가 나까지 의심해야 한다고 몰아가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만면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서는 라일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난 코르에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만약을 위해서 약을 챙겨 온 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거짓말이었다.

세사르가 만들어 준 이 알레르기 약은 나에게 통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코르를 먹으면 심장이 아파진다. 약효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 삼아 먹어 보았지만, 약을 먹어도 증상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사르가 약을 잘못 만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사르의 약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수한 효능을 보였다. 약효가 듣지 않는 사람은 나뿐.

‘단순한 알레르기가 아닌 건가,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코르 때문에 알레르기 약을 챙겨 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알 게 뭔가. 나는 알아도 남들은 모르는 일인데.

그랬기에 거짓말을 하는 내 태도는 몹시도 당당했다.

“웬 새삼스러운 소리야?”

그러나 라일라 역시, 괜한 트집을 잡아 가며 내 말에 반박해 왔다.

“넌 식사에 코르가 나와도 쏙쏙 잘 골라내서 먹잖아? 그런데 약이 필요해? 그리고 에모리 공녀가 한 말. 오히려 네 이야기 아니야?”

“응?”

“황태후 폐하를 구했다는 공적을 쌓고 싶어서, 내가 준비한 요리에 땅콩 가루를 뿌린 거 아냐?”

“라일라… 그만해.”

나는 라일라와 똑같이 화를 내기보다는, 속상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타일렀다.

“네가 곤란하다고 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를 끌어들이지는 말아 줘. 나는 네가 준비한 음식에 손을 댄 적도 없어. 주방 하녀들이 증언해 줄 수도 있는 부분인데, 왜 억지를 부려?”

“억지? 말은 가려서 해!”

“그리고 시녀로 지내면서 황태후 폐하와 식사를 할 수도 있는데, 폐하께서 보는 앞에서 음식을 가리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만약 그럴 때는 코르를 먹고 약을 먹을 생각으로 챙겨 온 거야. 이걸로 대답이 되었을까?”

“그 말은 황태후 폐하를 나쁘게 보는 발언 아냐? 폐하께서 그 정도도 이해 못 해 주실 리가 없는데, 네가 뭔데-”

“라일라 양, 그만하세요.”

두 사람의 실랑이를 헤론 후작 부인이 제지했다. 라일라의 말도 안 되는 억지 트집에 그녀도 불쾌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네리아 양이 알레르기 약을 가지고 있는 경위는 알겠어요. 사실, 이미 전해 듣기도 했고요.”

헤론 부인이 옆으로 고개를 돌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수행 하녀를 쳐다보았다.

하녀 중에서 직급이 높은 그녀는 내가 황태후궁에 들어왔던 첫날, 나를 개인실까지 안내해 주기도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네리아 양은 이 하녀 아이가 못 먹는 음식이 없냐고 물었을 때, 황태후 폐하를 모시느라 바쁠 테니 본인에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었다지요?”

“네,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참 기특하다고 생각했답니다. 알레르기 약은 그런 일을 대비해서 챙겼던 거겠죠. 하지만 라일라 양.”

“…….”

“당신은 네리아 양처럼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약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니까 계속 말씀드렸다시피 만약을 위해서 상비용으로-!”

“그 ‘만약’이란, 황태후 폐하께 문제가 생겼을 상황을 말하는 건가요? 라일라 양은 그 일을 예상했던 것이고요?”

“…….”

“미안하지만, 라일라 양의 주장에는 근거가 빈약해요. 전혀 납득이 되지도 않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헤론 부인이 시녀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묻자, 클로이를 포함한 귀족 영애들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솔직히, 의견이 갈라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만약 황태후가 정말로 수상한 정황 없이 알레르기로 쓰러졌다면, 라일라는 준비성이 대단하다는 칭찬을 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땅콩 가루가 라일라의 방과 그녀가 준비한 음식에서 줄줄이 발견되었다. 이 정도의 연관성이면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라일라는 가족들이 감옥에 간 데다, 사교계에서도 배척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일을 꾸며서라도 공적을 세워야 한다는 동기 또한 충분하지 않은가.

범인으로 확정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용의자로 취급할 명분은 충분했기에, 헤론 부인은 근처에 있던 기사를 불렀다.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네요. 정확한 건 조사가 끝나면 알 수 있겠죠. 경?”

“예, 시녀장 님.”

“라일라 발렌티스 양을 본궁의 취조실로 데려가세요. 이 일은 황제 폐하께도 보고를 올려서 확실하게 내막을 파악할 거니까요.”

“시, 시녀장님! 저는 억울해요!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취조실에 가서 하도록 해요. 경!”

“알겠습니다.”

헤론 부인은 겉보기에는 온화해 보였으나, 그녀 역시 대귀족가의 안주인으로서 후작가를 이끌어 가는 만큼 동정심에 판단을 치우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라일라가 애타게 헤론 부인을 불러 댔으나 그녀의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고, 라일라는 황궁 기사에 의해 거의 반강제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아니라고요! 저는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는 기사에게 붙잡혀 굴욕적으로 퇴장하는 라일라를 보며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네리아 너……!”

라일라가 나를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끌려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이번 견과류 사건의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용의자가 1명으로 좁혀진 만큼,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라일라가 땅콩을 입수했다는 사실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는데, 이 일은 무척이나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라일라의 직속 하녀인 베키가 내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베키는 황궁의 수사관들이 그녀를 찾아왔을 때, 숨기는 것 없이 그들의 질문에 답했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라일라 발렌티스 영애가 최근에 땅콩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까?’

‘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땅콩을 사다 드렸어요. 시녀로 입궁하실 때도 제가 챙겨 드렸고요.’

‘그렇습니까? 그 땅콩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예? 그거야 아가씨께서 간식으로 드셨겠죠……?’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황태후 폐하께서 그 땅콩을 드시고 쓰러지셨습니다.’

‘…….’

워낙 위험부담이 큰일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라일라는 베키에게 땅콩을 구했다는 사실을 숨기라고 명령하기만 했을 뿐, 본인의 목적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 역시 베키에게 황태후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기에.

‘황태후 폐하께서요? 서, 설마 저희 아가씨께서……?’

황족이 언급된 것에, 조사를 받는 베키는 심각하게 몸을 떨었다.

직속 하녀인 자신까지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심으로, 웬만한 연기자가 아닌 이상은 따라 할 수도 없는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순순히 조사에 협조하기까지.

수사관들은 라일라가 황궁으로 오기 직전에 땅콩을 구했다는 증거를 잡았지만, 하녀인 베키에게는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덕분에 그녀는 라일라가 취조실에 잡혀 있는 상황에서도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걸 위해서 일부러 베키에게는 라일라의 목적을 말해 주지 않은 거니까.’

한편, 라일라는 베키의 소식을 듣고서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잘못을 잡아뗐다고 한다.

하지만 황태후궁의 조리실을 수색하고 주방 소속의 일꾼들을 심문한 결과, 범인은 라일라 외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자백을 받기 위해 라일라에게 고문이 가해지려고 했을 때.

‘제, 제가 한 짓이 맞아요! 황태후 폐하께 환심을 사서, 감옥에 계신 부모님을 풀어 드리고 싶었어요. 제발, 제발 용서해 주세요!’

결국,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

황태후궁의 메인 홀.

상석에는 황태후와 황제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에서 죄인인 라일라가 무릎이 꿇려 있었다.

언제나 귀족 영애답게 겉모습을 치장하는 그녀였건만, 취조실에서 생활하는 동안 고생이 심했는지, 라일라의 몰골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메인 홀의 측면에서 조용히 시립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쓰러진 황태후 폐하에게 약을 먹여 구한 공로 겸, 라일라가 속한 가문의 가주 내정자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었다.

“라일라 발렌티스.”

황태후가 엄격한 목소리로 라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라일라를 내려다보는 시선 역시 차갑기 그지없었다.

황태후는 황족치고도 너그러운 사람이었지만, 라일라는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고의로 위험에 빠트렸다. 그런 대상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감히 황족에게 위해를 가한 죄를 물어, 네 신분을 평민으로 격하하고 북부의 클레멘탈 수도원으로 보내겠다.”

처벌이 정해졌다.

황태후에게 견과류를 먹인 행위는 목이 날아가도 어쩔 수 없는 중죄였다.

하지만 부모님을 위해서 일을 벌였다는 점, 그리고 황태후가 위험하지 않도록 약을 준비했다는 부분 때문에 그나마 처벌의 수위가 참작된 것 같았다.

그렇지만, 황태후의 말을 들은 라일라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했다.

“크, 클레멘탈 수도원이요?”

뭐, 저렇게 반응할 법도 했다.

클레멘탈 수도원은 말이 수도원이지, 여자 죄인들을 가둬 놓는 수용소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따뜻한 수도와 달리 1년 내내 얼어붙어 있는 날씨, 그리고 의무적으로 해야 할 고된 노동까지.

귀하게만 자라 온 라일라가 과연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수준의 장소였다.

미래의 황족을 꿈꾸던 사촌 자매의 비참한 말로였다.

‘그래도 황궁의 지하 감옥보다는 낫겠지만. 아니, 가족이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감옥이 나으려나?’

뭐, 어느 쪽이 되었든 라일라가 죗값을 치르기 충분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폐하! 그 전에 한 가지 더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말하도록.”

“사실, 제가 땅콩 가루를 넣은 곳은 랍스터 요리가 아니었습니다. 타르트였어요! 분명, 네리아가 제 계획을 알고 이용한 것이 분명해요. 폐하께 견과류를 먹게 만든 건, 제가 아니라 네리아예요!”

“…….”

라일라가 검지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어차피 지옥으로 떨어진 인생, 혼자는 결코 죽지 않겠다는 듯 이를 악문 얼굴이었다.

황태후궁 메인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라일라의 손끝을 따라 내게로 붙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