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황태후의 취향이 반영된 고풍스러운 식탁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하나씩 올려졌다.
라일라가 준비한 메인 요리는 고소한 버터의 풍미가 가득한 랍스터 구이였고, 네리아가 준비한 디저트는 신선한 과일이 올라간 타르트였다. 거기에 마실 음료수로 남부산 와인이 곁들여졌다.
방 안이 맛있는 냄새로 가득해졌다. 황태후는 흡족해진 얼굴이 되어서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요! 안 그래도 오늘쯤 해산물 요리가 먹고 싶던 참이었거든요. 고마워요.”
“네, 폐하.”
우연의 일치였지만 칭찬을 들었다. 주요리로 랍스터를 준비한 라일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다만, 평소와는 다르게 표정이 굳어 있기는 했다. 조금 뒤면 황태후에게 문제가 생길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긴장되는 게 사실이었다. 라일라는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고자 주머니 안에 든 유리병을 몰래 만지작거렸다.
덕분인지 쿵쿵 뛰고 있던 심장이 한결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럼 잘 먹겠어요. 역시나 맛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군요.”
황태후가 식사를 시작했고, 라일라는 네리아와 나란히, 식탁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섰다.
황태후의 식사를 방해해서는 안 되지만, 그녀가 불렀을 때는 곧바로 다가가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우아한 손동작으로 포크를 움직이고 있던 황태후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라일라와 네리아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제 급한 일은 다 끝냈으니, 내일이나 모레쯤에 시녀 아이들을 모두 불러 티 파티를 할까 하는데, 어떤가요?”
“저희는 언제든 영광입니다! 폐하께서 명령하신다면, 다른 시녀들에게도 통보하고 준비하겠습니다.”
네리아는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으며 잘도 대답했다.
‘준비는 해서 뭘 하겠어? 언제가 되었든 티 파티는 못 갈 텐데.’
라일라가 네리아의 옆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숨기고 있었는데,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가 조용히 들어왔다. 클로이 에모리 공녀였다.
“아직 식사가 안 끝나셨네요.”
원수인 네리아와 친한 사이인 데다 황태후궁에서 시녀로 만난 첫날부터 부딪치기까지. 썩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랬기에 클로이의 등장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건만, 그녀가 라일라와 네리아 사이를 파고들어 그 중간에 섰다.
그 과정에서 라일라와 클로이의 어깨가 부딪치기도 했는데, 고의로 한 행동이었는지 클로이에게서는 사과조차 없었다.
‘같이 서 있을 거면 가운데 말고 네리아의 옆에 서든가 하지.’
그 실례되는 행동에 짜증이 치밀었으나 황족 앞에서 다툴 수는 없는 법이었기에 참아야 했다.
“클로이 양? 어쩐 일이에요?”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내일 아침에 폐하께서 입으실 드레스를 같이 고르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일찍 온 것 같네요.”
“뭐, 같이 기다리면 되죠.”
두 사람이 속닥속닥 잡담을 나누고 있었으나, 라일라는 거기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어느새인가, 황태후가 디저트인 타르트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리아가 준비하고, 라일라가 몰래 땅콩 가루를 뿌린 바로 그 타르트였다.
라일라가 꿀꺽 침을 삼켰다.
황태후는 식사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느릿느릿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폐하? 뺨이 붉어지신 것 같아요. 방이 더우신가요? 창문을 열도록 할까요?”
황태후는 술을 먹는다고 얼굴이 붉어지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네리아가 그녀의 이상 상태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으나 황태후는 고개를 저었다. 식사 중에 목이 말랐는지, 잔에 들어 있던 와인을 전부 마신 뒤였다.
“덥지는 않은데… 그보다 마실 것을 더 주겠어요? 입 안이 마르는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폐하.”
네리아가 식탁으로 가, 빈 잔에 와인을 한 잔 더 따른 뒤 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쨍그랑-
식탁 쪽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황태후가 들고 있던 은식기를 바닥으로 떨어트린 것이었다.
카펫이 있었기에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식탁으로 향하기는 충분했다.
“가, 갑자기 숨이-!”
“황태후 폐하?”
“폐하! 황태후 폐하-!”
그리고 드디어, 라일라가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 벌어졌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황태후가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숨을 컥컥대는 황태후의 모습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숨이, 숨이 안 쉬어져…….”
“폐하!”
“서, 설마 독살 시도인가? 황궁의를 모셔 와요! 지금 당장이요!”
당연하지만, 황족이 쓰러지며 그녀의 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공황에 빠졌다.
그러나 라일라는 이 상황을 보면서도 황태후를 부르며 놀란 척을 했을 뿐 동요하지 않았다.
‘계획대로야.’
황태후는 타르트를 먹고 쓰러졌고, 황궁의 검사관이 조사하면 타르트에 땅콩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금방 발견할 터였다.
‘디저트를 준비한 네리아는 황족을 위험에 빠트린 죄명으로 큰 벌을 받겠지.’
그러나, 라일라의 계획에는 한 가지 위험성이 있었다. 네리아가 벌을 받는 건 좋지만, 만약 황태후가 죽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황족을 살해한 죄에는 연좌제가 적용될 수도 있었다.
재수가 없으면 네리아만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발렌티스 가문 전체가 벌을 받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라일라는 고민 끝에 새로운 계획을 떠올렸다. 알레르기 약을 미리 준비하여, 네리아로 인해 위험에 빠진 황태후를 구하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라일라는 황족을 구했다는 공적을 세울 수도 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작전이었다.
‘그 보상을 받아, 감옥에 갇힌 부모님을 풀려나게 할 수도 있어! 부모님은 지은 죄에 비해 너무 큰 벌을 받으셨잖아?’
게다가 황태후의 은인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사교계 활동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대체 그 누가 감히 라일라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제 황족을 뒷배로 두고 있는 몸인데.
“황태후 폐하-!”
네리아는 그걸 위한 제물이었다.
라일라는 자신에게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황태후에게 약을 먹이고자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녀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유리병이 바로 알레르기 약이었다.
그런데.
“폐, 폐하가 쓰러지셨어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에모리 공녀?”
라일라는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바로 옆에 있던 클로이가 라일라의 팔을 꽉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해요? 이거 놔요!”
“폐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황태후궁에 들어온 사람이 전부 벌을 받을 수도 있어요!”
“전부? 제가 왜 벌을 받아요? 그보다 팔 놓지 못해요? 저는 황태후 폐하께 가야 한다고요!”
“우리 큰일 났어요!”
“놓으라니까요! 미쳤어요, 공녀?”
이 여자, 진짜 미친 건가? 왜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 이래? 붙을 거면 네리아에게나 붙을 것이지!
클로이는 큰 충격을 받은 건지 머리가 돌아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게다가 어찌나 힘이 센지, 라일라가 억지로 떼어 내려고 해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니, 미쳐 버릴 것 같아진 사람은 오히려 라일라가 되었다.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황태후 폐하가 더 위험해지기 전에 빨리 약을 먹어야 하는데!
“황태후 폐하.”
그리고 라일라가 클로이에게 붙잡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제가 폐하를 살펴볼게요. 어떻게 되신 건지 알 것 같거든요.”
황태후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다. 네리아가 황태후의 상체를 부축해 그녀의 머리를 본인의 다리에 올렸다.
‘저 애, 지금 뭐 하려는 거야?’
“피부의 홍조, 입 안이 마르는 것, 그리고 호흡 곤란까지. 급성 알레르기 증상이에요.”
“네?”
네리아가 내린 진단에, 황태후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알레르기라니. 음식에 견과류라도 들어 있었던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분명, 조리실에는 견과류가 없었는데요……. 그보다 폐하, 이걸 드세요.”
어느새, 네리아가 어딘가에서 액체가 든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황태후의 입으로 흘려 넣었다.
정체도 모를 액체였지만, 사람들이 말릴 새도 없었다.
“레, 레이디 발렌티스? 방금 폐하께 뭘 먹이신 건가요?”
“알레르기 약이에요. 효과가 정말 좋은 약이라서, 금방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황궁의는 아직인가요?”
“곧 오실 것 같긴 한데, 아?”
“폐하? 황태후 폐하의 호흡이 안정되었어요! 폐하, 괜찮으세요?”
네리아가 황태후에게 정체 모를 무언가를 먹이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황태후의 얼굴이 편안해지더니 그녀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괜찮, 괜찮단다.”
기력이 없어 보였으나 의식은 처음부터 잃지 않은 상태였기에, 황태후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리아 양? 방금 저에게 준 것이 알레르기 약이었다고요?”
“네, 폐하. 그렇습니다.”
“황태후 폐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고 상태는 어떠십니까?”
그리고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며, 황궁의 세 명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이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움직임으로 황태후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조금 뒤, 황궁의들은 황태후는 멀쩡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약속이라도 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단 한 명.
‘뭐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얼굴로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지금 꿈이라도 꾼 건가? 라일라가 멍청한 표정이 되어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때였다.
“폐하께서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죠?”
스르륵, 클로이가 라일라의 팔을 놔 주었다. 답지 않게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였다.
라일라는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미 상황이 전부 끝나 버린 뒤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라일라가 한 행동은, 클로이를 떼어 내느라 실랑이를 벌인 것이 전부였다.
***
아무리 황태후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한들, 황족이 쓰러진 이상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황태후궁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고, 황궁의 검사관들이 찾아와 조사를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라일라는 조사를 기다리는 동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족을 구한 공로가 네리아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타르트에 땅콩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될 테니, 시녀로서 애초에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책임을 물어 어떻게든 네리아에게 타격을 주도록-
“방금 조사를 마쳤습니다!”
“폐하의 식사에서 땅콩 가루가 검출되었습니다. 정확하게는, 랍스터 구이입니다.”
“네?”
검사관들의 발표를 들으며, 라일라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땅콩 가루가 랍스터 구이에서 나왔다고? 타르트가 아니라? 아냐, 그럴 리가…….
라일라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
그녀, 네리아가 라일라를 보며 웃고 있었다. 네 생각 따위는 전부 알고 있었다는 표정을 짓고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