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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05)화 (105/172)



<105>

“가족? 당신에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클로이는 이 결론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놓고 빈정거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당사자인 내가 결정한 일이었기에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한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라일라와 함께 황태후 폐하의 식사 준비 역할을 맡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자, 그렇다면 각자가 맡은 역할에 관해서 설명하도록 할게요. 우선은 발렌티스의 두 영애부터.”

그 뒤로는 간단한 교육을 위해 같은 일을 맡은 사람들끼리 붙어 앉도록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헤론 부인에게서 안내 사항이나 기억해야 할 점들이 자세하게 적힌 설명서를 전달받았다.

“식사 준비 역할이라고 해도 그렇게 힘들거나 복잡한 부분은 없을 거예요. 황태후 폐하는 입맛이 까다로운 분이 아니시거든요.”

황족의 시녀는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말처럼 업무가 특별히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본격적인 요리는 황궁의 요리사가, 주방 보조 역할이나 잡다한 일처럼 힘든 역할은 전부 하녀나 하인들이 맡는다.

시녀가 하는 일은 식사 메뉴를 결정하거나 조리실을 감독하고, 음식을 최종 점검하는 정도뿐.

황태후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들도 전부 설명서에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기에, 이 정도를 숙지해 두면 될 것 같았다.

“만약 황태후 폐하께서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음식이 있다면, 그걸 가장 먼저 반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시녀장 님.”

“폐하는 너그러운 분이시기에 과하게 부담 가질 것도 없답니다. 그럼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러 와요!”

헤론 부인은 거기까지 설명을 마치고는, 손님 접견을 담당한 영애들에게로 자리를 이동했다.

“네리아,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함께 남아 있게 된 라일라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방금 전까지 클로이에게는 뾰족하게 날을 세웠던 것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궁내부의 통보라서 거절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온 건데, 다른 영애들에게 자존심을 눌리기는 싫었거든.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남들보다는 가족이 낫다는 생각이 드네.”

라일라가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고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였다.

이건 동정심에 호소해 나를 방심시킨다는 새로운 작전인 건가. 그래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

‘그보다 가족이 낫기는 무슨.’

백부 일가를 보며 세상에는 남보다도 못한 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인데.

애초에 궁내부의 통보라는 그녀의 말부터가 거짓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괜히 라일라를 들쑤셨다가 그녀가 계획을 바꾸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기에, 나는 상식적인 반응을 보여 주기로 했다.

“글쎄…….”

“네가 날 싫어하는 거 이해해. 그렇지만 그동안 혼자 지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거든. 그래서 내린 결론인데, 미안해. 진심이야.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았어.”

“사과?”

“응. 우리 부모님과 레비가 한 짓도 대신 사과할게. 대가를 치르고 가문에 도움이라도 되기 위해서라도 네가 정해 주는 혼처에 순순히 따르도록 할 거야.”

“…….”

“그러니까 지금은, 발렌티스 가문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황태후 폐하의 시녀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같이 협력하자.”

진심이어도 받아 주지 않을 사과였건만, 진심조차 아니었다.

들어 봤자 우습기만 할 뿐이었기에, 나는 라일라의 말을 흘려들으며 적당히 대답했다.

“그래. 적어도 마지막 말만은 동의해. 그동안은 사건 사고가 잦았지만 더는 가문의 평판을 떨어트리면 안 되잖아?”

“…고마워.”

은근슬쩍 백부 가족을 책망하는 발언에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녀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식사는 나눠서 준비할래? 그쪽이 더 효율적인 것 같거든. 메인 요리는 내가,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는 네가 하는 걸로. 어때? 반대로 바꿔도 난 상관없어.”

“나도 상관없어. 내가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를 맡도록 할게.”

“응, 열심히 하자.”

라일라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기에 나 역시 따라서 웃었다. 각자의 다른 의도가 담긴 미소였다.

***

다음 날 저녁, 예정대로 황태후 폐하가 수도 황궁에 도착했다.

나를 비롯하여 시녀들과 일꾼들이 전부 바깥으로 도열하여 황태후궁의 주인을 맞이했다.

“황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환영해 줘서 고마워요.”

황태후는 흰색과 갈색이 섞인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는 편안한 여행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헤론 부인의 말처럼 실제로도 인상이 좋아 보였다.

“다들 반갑군요! 아는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고……. 음? 그런데 당신은?”

마중 나온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던 황태후가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즈 발렌티스 백작 부인……?”

“…의 딸인, 네리아 발렌티스입니다. 황태후 폐하를 모시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딸? 분홍색 눈까지, 정말 똑같이 생겼군요! 로즈 부인이 살아서 돌아온 줄만 알았답니다.”

나를 처음 만난 사람들이 보이는 평범한 반응이었기에, 늘 내놓던 대답을 내놓자 그녀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죠. 그런데 로즈 부인에게 딸이 있었다니, 처음 알았군요?”

“네, 폐하. 그동안은 오해가 있어 사생아로 지내다가, 다시 신분을 인정받아 귀족이 된 것이거든요.”

“오해? 대체 무슨 오해가 있었길래……. 저도 들어 보고 싶군요. 하지만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저도 여독으로 몸이 피로하니…….”

황태후가 고개를 들어 어둑해진 하늘을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화는 다음에 나누도록 하지요! 일단은 쉬어야겠어요. 헤론 부인만 날 따라오고, 다른 사람들은 돌아가서 쉬도록 해요.”

“예, 따르겠습니다, 폐하.”

늘어선 사람들 사이로 황태후가 걸음을 옮겼다.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지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도 방으로 돌아갈게요.”

“네, 내일 봐요!”

사람들이 줄줄이 황궁 입구를 떠나는 사이, 어느새 클로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네리아 양, 오늘은 누구 방으로 가서 놀까요?”

“제 방으로 가요. 오늘 조리실에 갔다가, 주방장에게 간식으로 쿠키를 받아 왔거든요.”

“오? 식사 준비 역할에 그런 장점이? 오늘은 쿠키를 먹으면서 새벽까지 실컷 떠들죠!”

“꼭 소풍이라도 온 것 같네요.”

“제 말이요! 임시 시녀라고 어려운 일도 안 시키잖아요. 어머니께 잔소리 들을 일도 없고 너무 좋아요. 이러니까 매년 신청자가 몰리는 거였어요.”

복도를 걸으면서도 클로이와 끊임없이 수다를 떨다가 내 방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은 폐하께서 오시는 날이라 일이 많아서 청소가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침, 내 방에서 나오던 하녀를 마주쳤다. 그녀의 손에 청소 도구가 들려 있었다.

“바쁜 걸 뻔히 아는데, 죄송할 필요 전혀 없어.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레이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런 하녀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 그 하녀, 본궁이 아니라 황태제궁 소속 표식을 달고 있던데, 황태제 전하께서도 하녀를 파견하셨나 봐요.”

“그런 것 같네요. 아니, 그런데 클로이 양은 어디서 쿠키를 찾아온 거예요? 숨겨 놨었는데.”

“에이. 뭘 그런 쉬운 걸 물어요. 숨겨 놓는 장소들이 뻔하죠.”

“하기야, 책상 서랍은 쉬웠나요? 어쨌거나 클로이 양, 그 쿠키를 먹었군요. 사실 그 쿠키는 평범한 디저트가 아니라 뇌물이었답니다. 그러니 제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겠어요.”

“세상에, 이게 뇌물이었다니……! 그렇다면 어차피 받은 뇌물, 최대한 많이 먹어 치우겠어요.”

클로이가 내 농담에 응수하듯, 쿠키 2개를 동시에 입에 털어 넣고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무슨 부탁이에요?”

“음, 어려운 건 아니고요.”

듣는 사람도 없건만, 나는 클로이의 옆에 앉아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너는 왜 이렇게 움직이는 게 굼떠? 실수는 안 해서 다행이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원래 청소 담당인데, 엘리스가 아파서 제가 대신 왔거든요. 빨리 움직일게요!”

황태후궁의 주방.

주변이 소란스러웠지만, 라일라는 그에 아랑곳없이 황태후에게 올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식자재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부터 완성된 음식의 맛을 시식하는 것까지. 라일라의 움직임이 꽤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황태후가 수도에 온 지 이미 4일째가 된 것도 있지만, 2년 전에 시녀 일을 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다소 큰 일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라일라가 고개를 돌려, 주방장의 옆에 선 네리아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황태후에게 땅콩 가루를 뿌린 음식을 먹이는 것.

마음 같아서는 첫날에 당장 실행하고 싶은 일이었다.

‘네리아를 치워 버리고 싶은 것도 있지만, 다른 영애들이 나를 고의로 무시하는 것도 참기 힘드니까.’

하지만 그동안은 황족들이 황태후궁을 찾아와 함께 식사했기 때문에, 황태후가 혼자 저녁을 먹는 오늘이 기회였다.

두근두근. 라일라의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네리아, 디저트는 아직이야?”

“잠깐만 기다려! 거의 다 됐어!”

황태후는 메인 요리와 디저트를 동시에 먹는 식습관이 있었기에, 음식을 같이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네리아를 조금 재촉했더니, 그녀가 조금 뒤에 타르트가 담긴 접시를 가져와 트레이에 올렸다.

“이제 출발하자.”

“잠깐, 네리아.”

주방을 벗어나려는 네리아를 라일라가 붙잡았다.

“주방장이 널 찾는 것 같은데? 뭔가 빠진 거라도 있어?”

“빠진 건 없을 텐데……. 주방장은 불 앞에 있어서 못 움직이니까 내가 가 봐야겠어. 금방 다녀올게.”

주방장 이야기는 핑계였다.

라일라는 네리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디선가 자그마한 봉투를 신속하게 꺼냈다.

그러고는 그 안에 들어 있던 땅콩 가루를 네리아가 준비한 타르트에 몰래 뿌렸다. 다행스럽게도 목격자도 없었다.

‘이걸로 됐어.’

라일라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란타나는 라일라에게 힌트를 주는 것과 그녀를 시녀로 만들어 주는 것 외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일이 잘못될 때를 대비해야 하니까.’

손은 쓰지만, 직접 가담하지 않는 것. 라일라도 그녀의 추종자들에게 늘 해 왔던 짓이기에 이해했다.

게다가, 음식에 땅콩 가루를 섞는 것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었으니까.

작업을 무사히 끝냈더니, 네리아가 다시 트레이로 다가왔다.

“주방장은 날 찾은 적 없다던데? 네가 제스처를 오해한 것 같대.”

“그런가? 잘못 알려 줘서 미안.”

“됐어. 이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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