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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04)화 (104/172)



<104>

“안녕하세요, 레이디 발렌티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건국제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수도 황궁 내부의 남서쪽에 위치한 황태후궁.

내가 당분간 머물게 될 하얀색 건물 앞에 도착하자, 입구에 서 있던 하녀가 나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시녀는 황족의 말벗 혹은 수행원과 같은 업무를 담당하기에, 청소나 세탁 같은 허드렛일을 맡는 하녀와는 역할이 전혀 달랐다.

그랬기에 이곳에서 생활하는 데에도 큰 불편함이 없게끔 황궁 하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저택에 있는 직속 하녀들처럼 편하게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황족을 위한 장소니까.

“레이디 발렌티스께서 사용하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앞서서 걷는 하녀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장소는, 귀족가 저택의 손님방과 비슷한 수준의 개인실이었다.

크기가 넓은 것은 아니지만, 사용하기 불편한 정도도 아닐뿐더러 1인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니나렛 황녀님의 튜터가 되며 황궁에 자주 드나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황궁에서 숙식까지 전부 해결하게 된 건 처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미리 보내 놓은 짐들도 무사히 도착하여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레이디, 황궁에서 지내시면서 불편한 점이 생긴다면 언제든 저희에게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응, 안내해 줘서 고마웠어.”

“별말씀을요! 그리고 혹시 가리거나 드시지 못하는 음식 같은 건 없으신가요? 식자재를 준비할 때 참고하도록 할게요.”

“음식이라면 코르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못 먹기는 해.”

나는 하녀의 질문에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너희도 황태후 폐하를 모시느라 많이 바쁠 텐데, 나까지 챙기려면 여러모로 힘들잖아? 음식은 내가 알아서 조심할 테니까 나한테는 신경 쓰지 말도록 해.”

“레이디의 배려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음식을 준비할 때는 최대한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한 배려는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하녀는 기쁜 표정이 되어서는 나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알고 계시겠지만, 시녀장이신 헤론 후작 부인께서 소집하시는 첫 회의가 1시간 뒤에 있을 예정이에요.”

“응, 기억하고 있어. 시간에 맞춰서 2층의 응접실로 가면 된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레이디. 혹시 다른 질문은 없으신가요?”

“하나 있는데, 클로이 에모리 공녀는 도착했어?”

“아직이세요. 시녀를 맡으신 영애님 중에서는 레이디께서 제일 먼저 도착하셨거든요.”

“그래?”

하기야, 여유롭게 도착하고 싶어서 1시간이나 일찍 오기는 했다.

황태후의 시녀직은 디르케나 궁내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떠맡은 일이었지만, 그나마 반가운 부분이 있다면, 가장 친한 친구인 클로이와 오랜만에 가까이서 지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은 클로이도 못 만날 정도로 가문의 일이 워낙 바빴으니까.’

클로이 역시 니나렛의 튜터 후보로 선발된 바가 있었기에, 이번에도 나와 함께 황태후의 시녀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덕분에 건국제까지 그럭저럭 즐겁게 지낼 수 있지 않으려나. 나는 하녀가 알려 주는 이야기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알려 줘서 고마워.”

“그럼 회의 때까지 편하게 쉬시고, 나중에 다시 또 뵙겠습니다.”

하녀가 그렇게 인사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게 된 나는 푹신한 침대에 편하게 앉았다.

오늘은 황태후의 임시 시녀들이 처음으로 모이는 날로, 조금 전에 하녀가 언급했던 회의에서는 주업무를 정하거나 간단한 교육이 있을 예정이었다.

늦으면 안 되는 중요한 자리였지만, 아직 여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독서라도 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심심할 때 읽으려고 가져온 책을 꺼내기 위해 책상 근처로 향했을 때였다.

바깥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리아 양! 먼저 도착했다면서요? 지금 방에 있어요?”

“클로이 양? 열어 줄게요!”

클로이의 이야기를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직접 등장하다니.

재미있는 우연이라는 생각에 웃음을 참고는, 손님이자 임시 시녀 동료가 된 그녀를 환영했다.

***

클로이와 마주 앉아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다 보니, 1시간은 눈을 깜빡인 새에 금방 지나갔다.

“클로이 양, 슬슬 응접실로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요?”

“벌써요? 이제 막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는 참이었는데요.”

클로이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으나, 회의에 지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하여 곧장 도착하게 된 황태후궁의 2층 응접실.

그곳에는 헤론 후작 영애를 비롯하여 임시 시녀 역할을 맡은 나머지 5명의 영애가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드디어 에모리 공녀와 발렌티스 영애가 도착했군요!”

“어서 와요, 두 분!”

최고위급 귀족의 직계 자녀라는 신분과 부족함 없는 외모, 사교계에서의 높은 지위 등.

황가가 아니었다면, 절대 한곳에 모으지 못했을 법한 화려한 면면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이만큼이나 잘난 영애들이 한자리에 뭉쳐 있으면 제국의 최고 영애 자리를 놓고 알력 다툼이 벌어질 법도 하건만, 응접실의 분위기는 아주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파벌조차 구분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유라고 한다면, 뭐…….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거예요? 계속 기다렸어요!”

“발렌티스 양의 얼굴을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건가요?”

클로이와 나란히 테이블에 착석하자, 영애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의 표정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저를 기다리고 계셨나요?”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발렌티스 양은 요즘 다리스 제국에서 제일 뜨거운 인물이라고요!”

“발렌티스 양이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가주라니요! 멋져요! 대단해요!”

“내년 생일이 되면, 백작님이라고 불러야겠죠? 생일 파티에는 꼭 초대받고 싶네요!”

나는 그녀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디르케를 등에 업고 떵떵거리던 레고트 백부 일가가 하루아침에 몰락한 일은, 타인들에게는 재미있기만 한 이야깃거리였다.

하지만 그 사건들의 가장 중심부에 서 있는 나는, 본의 아니게 사교계에 출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은 백부네를 쳐 내느라 바빠서, 그 뒤로는 휘청이는 가문을 재정비하고 일을 배우느라 바빠서.

‘듀이의 기사 시험 이후로는 계속 그런 상태였지?’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궁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눈덩이가 불어나듯 커지기만 했다.

“발렌티스 양, 그런데 그 소문들이 전부 사실인가요?”

“지금껏 얼마나 고생이 크셨을까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녀들 역시, 자신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목적으로 질문한 것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늘 그렇듯, 이런 식으로라도 쌓아 올린 친분은 돈이 되고 언젠가는 도움이 되는 법이었으니까.

“우선, 걱정해 주신 것 진심으로 고마워요. 저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늦지는 않은 것 같네요. 다들 오랜만이에요.”

“시녀장님…이 아니라 라일라 발렌티스 양?”

모친이 시녀장을 맡아 이미 알고 있었던 헤론 후작 영애를 제외하고, 나머지 영애들의 표정에 놀라움과 함께 불쾌함이 스쳤다.

“뭐죠? 라일라 발렌티스 양이 여긴 왜 와요?”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 모르겠네요. 저도 니나렛 전하의 튜터 후보였잖아요?”

“…….”

당연하지만, 영애들은 라일라를 환영하지 않았다.

라일라는 가해자인 동시에 패배자였으니까. 예전이라면 몰라도, 더는 이곳에 그녀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자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자신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비어 있는 의자에 태연하게 앉았다.

최근까지만 해도 가족들의 일로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할까 사교계에도 출입하지 못했으면서, 그녀의 얼굴에는 승리감이 가득했다.

허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얼굴이었기에 나는 잠깐 헛기침하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여기, 자격이 없는 사람이 한 명 억지로 끼어 있네요.”

“에모리 공녀, 항의하고 싶으면 궁내청에 해 줄래요? 저는 정식으로 황궁에서 요청을 받았거든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마침 시녀장님이 오시네요.”

클로이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더니, 어느새 시녀장인 헤론 후작 부인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들 모였군요! 늦지 않게 출석해 줘서 고마워요.”

“시녀장 님, 회의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에모리 공녀?”

“라일라 발렌티스 영애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가요? 그녀는 중간에 후보에서 탈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헤론 부인 역시, 그들의 의문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궁내부의 결정입니다. 저도 안내를 받기로는, ‘후보였던 자’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거든요.”

“…….”

말장난이나 다름없는 비약이었지만, 어쨌거나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응접실에 모인 영애들의 표정이 사이좋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의를 제기할 상대는 시녀장이 아니었고, 그녀는 이 자리에 함께한 헤론 후작 영애의 모친이기도 했다.

영애들이 입을 다물었고, 방금까지만 해도 밝았던 응접실의 분위기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오늘의 회의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헤론 부인은 불편해진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모두, 황태후 폐하께서 내일 수도에 도착하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네.”

“우리가 할 일은, 황태후 폐하께서 불편함 없이 수도에서 머무르시게끔 보필하는 것이에요.”

헤론 부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행정 업무나 서류 처리 같은 어려운 일은 포함되지 않는다. 게다가 단기간의 임시직인 만큼, 황태후도 시녀들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다는 것.

“그러니 부담 가질 건 없어요. 8명이니, 우선은 두 명씩 짝을 지어 주 업무를 정해 볼까요? 상황에 따라 바꿀 수도 있으니, 편하게 원하는 업무를 말해 봐요.”

“저는 손님 접견을 맡고 싶어요.”

“그렇다면 저는 황태후 폐하의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르는 역할을 선택하겠습니다.”

“시녀장 님, 저는 네리아와 함께 황태후 폐하의 식사를 준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싶어요.”

“잠깐만요, 발렌티스 양.”

“뭔가요, 에모리 공녀.”

내 이름을 함께 언급한 사람은 당연히 라일라였고, 거기에 끼어든 사람은 클로이였다.

클로이는 이마에 주름이 잡힌 채로 라일라에게 곧장 반박했다.

“그건 네리아 영애의 의사가 반영된 의견인가요? 네리아 영애는 저와 함께 폐하의 드레스와 장신구 고르기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는데요.”

일전에 내가 수도에 도자기 장신구를 크게 유행시키고 지금도 유행이 진행 중인 만큼, 적임이 아니냐. 클로이가 그렇게 주장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하는 가운데, 라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맞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응접실을 분위기를 보니, 저와 짝을 지어 주실 영애가 없는 것 같아서요.”

“…….”

“네리아, 그러니까 나랑 같이해 주면 안 될까? 부탁해.”

“응?”

“이봐요, 발렌티스 양!”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우리는 가족이라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설마 거절하는 건 아니지?”

라일라는 클로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하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때 했던 말을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써먹다니.

“그건…….”

하지만 나는 입가에 떠오르려는 미소를 숨긴 채 대답했다.

“당연하지. 같이 하자.”

설마 거절할 리가 있나. 오히려 라일라가 먼저 그렇게 권유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라일라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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