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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03)화 (103/172)



<103>

“안녕하세요, 네리아 님.”

베키와의 만남은 사람들이 전부 잠든 늦은 새벽 시간에, 저택의 창고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라일라 아가씨께서 황궁에 가셨던 일 말인데요.”

비밀리에 이뤄진 만남인 만큼, 베키는 내 허락하에 긴 인사 없이 곧장 본론을 입에 담았다.

라일라는 잘 숨겼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황궁으로 란타나를 만나러 갔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더는 빼먹을 게 없으니 버림받을 줄 알았건만, 베키는 황궁에서 돌아온 라일라의 모습이 기뻐 보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심지어 방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계셨어요.”

“정말?”

라일라는 이미 완전히 끈이 떨어진 신세인데, 아직도 도와줄 의리가 남아 있었다니.

솔직히 말해서 의외였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과연 황궁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온 걸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네. 만약 구체적인 걸 캐물었다가는 저를 의심하실 것 같아서 여쭤보지는 못했어요.”

“조심해야 하니까 그건 잘했어.”

“그리고 사소한 일이라서 네리아 님께 이런 것까지 말씀드려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괜찮으니까 말해 보렴.”

“황궁에서 돌아온 직후에, 라일라 아가씨께서 저한테 땅콩이 먹고 싶으니 구해 달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아가씨는 견과류를 좋아하지 않으시는데 말이에요.”

“라일라가 땅콩을 찾았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땅콩이라면 그냥 흔한 음식인데, 황궁에서 란타나를 만난 것과 무슨 연관이 있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뭐, 라일라를 더 지켜보고 있으면 알게 되겠지.’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베키에게 대답했다.

“일단은 알겠어. 다음에도 라일라가 안 하던 행동을 하면, 뭐든 좋으니 나에게 알려 줄래?”

“알겠습니다, 네리아 님.”

그날은 그렇게 베키와 헤어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1주일 뒤.

황궁에서 도착한 황금색 편지를 받고는, 라일라가 어째서 좋아하지도 않는 땅콩을 찾은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 참…….”

나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다시 천천히 정독하며,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발신처는 이번에도 황궁의 궁내부였는데, 편지의 내용은 명령이나 다름없는 통보를 담고 있었다.

내가 황태후 폐하를 모실 임시 시녀로 발탁되었으니, 안내한 날짜에 반드시 입궁하라는 것.

‘나는 지원을 한 적도 없었는데.’

황태후의 시녀는 고위 귀족 여성 중에서 신청자를 받아, 그 가운데에서 선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황족의 정식 시녀가 아닌 임시직인 만큼, 원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신청 서류를 낸 적도 없는 내가 선발되었다니. 우습지만 궁내부에서도 명분은 있었다.

올해, ‘니나렛 황녀의 튜터 후보’로 우수한 영애들이 뽑힌 일이 있었으니, 그 인원을 그대로 선발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이미 황제 폐하께 재가까지 받았다기에, 거절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시녀라니. 네리아 아가씨는 가주 업무를 익히시느라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인데요.”

사샤는 내 옆에 선 채, 투덜투덜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라일라 아가씨께도 똑같은 편지가 도착했다고요.”

“응, 들었어.”

더 우스운 일이 바로 그거였다. ‘니나렛의 튜터 후보’랍시고 시녀 명단에 라일라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라일라 아가씨는 중간에 후보에서 탈락했잖아요?”

“그래도 뽑혔던 건 맞으니까.”

나는 한 번 웃고는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분명, 디르케가 라일라의 부탁을 받고서는 손을 쓴 거겠지.

‘그 사람, 궁내부의 고위 관료와 연줄이 있다던가?’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궁내부의 결정이라는 억지로, 페어 레이디가 바뀐 일이 있었으니까.

“아가씨, 라일라 님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겠죠? 뭘까요?”

“음, 대충 알 것 같기는 해.”

강제로 시녀가 된 것만으로는, 라일라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몰랐을 것 같다.

하지만 베키가 전해 준 그 소식. 라일라가 땅콩을 찾았다는 정보까지 더해지자 정확하게 아귀가 맞춰졌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후 폐하에게는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예전 세계에서 황태후 폐하를 뵌 적이 있는 어머니께서 지나가듯 해 주신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황태후 폐하께 견과류를 먹여 위험하게 만들고는 나한테 뒤집어씌울 작정이겠지.’

간도 크다. 나한테 코르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노력이니 극복이니 떠들던 라일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일관성 있게 남의 약점을 잘도 이용하는군.’

게다가 이번 대상은 황태후 폐하였다. 절박한 상황인 라일라야 그렇다 치지만, 도대체 디르케는 무슨 생각인 걸까?

황족을 상대로 자칫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계획을 서슴없이 실행하려는 걸 보면, 나 역시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경계가 들었다.

하지만 계획을 눈치챈 이상, 라일라에게 당할 일은 없다. 역시나 베키를 포섭해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하기 싫다는 말도 못 할 테니, 가주 업무는 잠깐 멈춰 놓고 입궁할 준비를 해야겠네.”

“아가씨, 괜찮으시겠어요? 황족분과 일이 엮이다니.”

“괜찮아.”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바쁜 시기에 시간을 뺏긴 만큼, 돌아올 때는 좋은 소식을 들고 올 테니까.”

***

시녀로 입궁하게 되면, 건국제가 끝나고 황태후가 남부로 돌아갈 때까지 황궁에서 머물게 된다.

그랬기에 나는 발렌티스 저택을 떠나기 직전까지 최대한 많은 업무를 처리했다.

간단한 서류 결재부터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문제까지. 물론, 여기에는 가신들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일은, 근래에 가문 차원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마법약 사업의 준비 과정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네리아 님, 오셨습니까!”

마법약의 연구소 겸 제조실에 도착하자, 이번 사업부를 맡은 가신들이 나를 격렬하게 반겨 주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는데, 세사르를 만난 이후부터 계속 저런 상태이기는 했다.

“일은 잘되어 가시나요?”

“늘 그렇듯이, 일이야 항상 순조롭습니다!”

“네리아 님은 도대체 어디서 저런 세기의 천재를 모셔 온 것인지, 아주 보물이 따로 없습니다.”

가신들이 고개를 돌려, 안쪽에서 약을 만들고 있는 세사르를 힐끔 쳐다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처음에만 해도 마법약 사업의 성공 여부를 우려하던 가신들은, 세사르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몇 번이나 만세를 외쳤다.

심지어 그들은 눈에 눈물까지 머금고 있었는데, 고생 끝에 드디어 성공이 찾아왔다고 말했던가.

당연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고생이란 백부 일가를 의미했다.

“그럼 개업일까지 고생해 주세요. 혹시 저에게 급하게 보고할 일이 있다면, 황태후 폐하의 궁으로 편지를 보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네리아 님!”

“그리고 잠깐 세사르 님을 불러 주실래요?”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신 한 명의 안내를 받아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자, 조금 뒤에 세사르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세사르 님. 고생이 많으시다면서요?”

“고생은요. 고생은… 산골에 처박혀서 밤새도록 마력량 증가 연구를 하던 그때가 제일 심했죠.”

왠지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던 듯, 세사르가 잠시 울컥하더니 다시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마음고생은 안 하니까요! 그런데 네리아 님은 이걸 가지러 오신 거지요?”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내가 입궁 전에 이곳을 찾아온 것은 사업 준비 점검도 있지만, 세사르에게 부탁했던 약을 받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뭐, 말하자면 겸사겸사였다.

“네, 맞아요. 시간 맞춰 만들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세사르에게 받은 약을 챙겨 넣었다. 이제 이걸로 입궁 준비는 전부 끝. 나는 방금 만났던 가신들만큼이나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황궁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호위 기사인 듀이가 동행했는데, 마차의 맞은편에 앉은 갈색 머리의 소년은 왠지 아쉬워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듀이, 왜 그래? 당분간 나랑 떨어져 있으려니까 아쉬운 거야?”

“네……? 아, 아, 아니요?”

허를 찔린 걸까, 듀이가 깜짝 놀란 모습으로 부정하기에 나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듀이는 기사가 된 이후로 자신의 위치를 의식해서인지 사람들 앞에서는 곧잘 점잖은 태도를 보였지만, 나와 둘만 있을 때면 예전처럼 어설픈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나중에 초임 기사 훈련도 가야 하고, 의무 복무로 마수 사냥도 가야 해서 나랑 떨어질 일이 또 생길 텐데 괜찮겠어?”

“네! 물론 괜찮아요!”

“그렇게나 확실하게 괜찮다고 하니까, 내 마음이 섭섭한데?”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일부러 울적한 표정을 짓자, 듀이가 몹시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더 놀렸다가는 폭발이라도 할 것 같아서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듀이를 놀리는 데 재미가 붙어 버려서 큰일이었다.

“그런데 듀이, 건국제의 황궁 무도회에서는 내 파트너가 되기로 했던 거 잊지 않았겠지?”

“네,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

건국제는 수확제를 비롯한 제국의 3대 축제 중 하나로, 특히 황궁의 메인 홀에서 치러지는 화려한 무도회가 가장 큰 행사였다.

나에게 파트너를 신청하는 남자 귀족의 편지와 선물이 쇄도했으나, 고민조차 없이 전부 거절했다.

파트너는 내 기사인 듀이가 해야 한다고 예전부터 못을 박아 두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듀이에게 황궁을 구경시켜 주고 싶으니까.’

화려한 무도회장을 보며, 놀라서 굳어 버리는 소년의 모습을 기대하며 쿡쿡 웃음을 내뱉었다.

게다가 듀이는, 무도회에 함께 가자는 내 권유에 의외로 부담감이나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기사 시험에서 듀이에게 비겁한 행동을 저지르는 메이슨을 보며, 귀족이라고 다 대단하지는 않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메이슨의 유일한 존재 가치였다.

“무도회가 열리는 날에, 네리아 님을 모시러 갈게요.”

“응,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듀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곧, 짧은 황궁 생활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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