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라일라는 황궁 입구에 설치된 대기실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그녀는 믿었다. 란타나 님이 자신을 외면할 리가 없다고. 제 부모님이 그분에게 충성하고 정성을 바친 세월이 무려 8년이 넘는다.
게다가 란타나는 수도의 영애들이 라일라를 부러워할 만큼, 그녀를 총애해 주지 않았던가.
‘분명, 네리아의 간계로 가족을 잃은 날 가엾게 여겨 주실 거야.’
라일라가 그렇게 생각하며 서궁이 있는 방향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서궁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
같은 대기실에 머물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갔다. 황궁에 도착한 시간이 이른 오전이었건만, 어느새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혼자 남은 라일라가 초조함을 느끼며 손톱을 깨물었다.
‘…설마, 란타나 님이 나를 버리기라도 하신 건 아니겠지? 아냐, 그건 절대 아닐 거야.’
라일라가 애써 그렇게 믿으며 불안한 마음을 지우려고 할 때였다.
“레이디 발렌티스?”
“네?”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있었다. 황궁의 시종이었다.
“서궁에서 레이디 발렌티스의 입궁 요청을 승인해 주셨습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한나절 동안이나 애타게 기다렸던 소식에 라일라가 뛸 듯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란타나 님이 나를 외면하실 리가 없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궁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인 멜비나와 함께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라일라는 조금의 시간 낭비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서궁의 접견실에서 약간의 시간을 더 기다린 후.
“오랜만이에요, 라일라 양.”
“란타나 님! 디르케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라일라는 드디어 고대하던 상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흑발과 분홍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미인이 앉아 있었다.
“발렌티스 백작 내외와 레비 영식에게 벌어진 일은 진심으로 유감이에요. 그동안 라일라 양의 마음고생이 심했겠어요.”
“네, 네……!”
자신을 위로해 주는 목소리에 힘이 생겼다. 라일라는 용기를 내서, 서궁을 찾아온 목적을 입에 담았다.
“란타나 님, 혹시 제가 보내 드린 편지를 읽으셨나요?”
“물론, 읽었답니다.”
예의를 지켜 가며 구구절절하게 쓴 편지였으나 본론은 간단했다.
라일라가 가문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녀의 도움을 바란다는 것.
그리고 라일라가 성공하여 가주가 된다면, 란타나에게 벨라오스 광산의 소유권을 완전히 양도하고 그녀의 사업에 투자하는 금액을 늘리겠다는 조건이 함께였다.
“괜찮으시다면, 편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러기 위해서 라일라 양을 여기까지 부른 거잖아요?”
“그러시다면 설마…….”
“라일라 양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요. 하지만 제가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어요.”
“네?”
“저는 폐하의 일개 정부잖아요?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다툼에 관여할 능력이 없어요. 미안해요.”
“라, 란타나 님……?”
기대와 다른 대답에 라일라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다툼에 관여할 능력이 없다니, 그럴 리가 있나. 그저, 라일라의 부탁을 거절할 핑계일 뿐이었다.
“그 대신, 라일라 양을 종종 서궁으로 초대해서 차 대접 정도는 해 줄 테니까요.”
거짓말! 말은 이렇게 해도 라일라가 황궁을 떠나게 되면, 더는 그녀를 찾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배신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지금껏 란타나에게 갖다 바친 돈이 얼마인데!
더욱이 온종일 황궁의 대기실에서 란타나를 기다렸다는 피로감 때문이었을까? 라일라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저, 어머니께 들어서 알고 있어요! 란타나 님이 제 부모님께, 동생 부부를 죽여 가주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하셨다고요!”
“라일라 양?”
“그리고 제 숙부와 숙모를 죽이는 데 협력하셨다는 것도요! 저를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란타나 님을 공범자로 고발하겠어요!”
그때였다.
“라일라 발렌티스 님.”
란타나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갈색 머리의 시녀가, 라일라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협박을 하시는 건가요?”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시녀에게서 살기 같은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라일라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리 알려 드리겠는데, 고발 같은 것을 해 봐야 증거도 없어요.”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란타나 님을 화나게 만들어…….”
라일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실수를 자각한 것도 있지만, 시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때문이기도 했다.
“젠, 그만해요. 라일라 양이 무서워하고 있잖아요.”
“알겠습니다, 란타나 님.”
“라일라 양도 고개 들어요. 저는 화나지 않았답니다.”
“저, 정말요?”
“물론이에요.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얼마나 길고 긴데, 이렇게 사소한 일에 일일이 화를 낼 수는 없잖아요?”
란타나가 그렇게 말하며 아름답게 웃었다. 가식이 아니었다. 덕분에 라일라는 겨우 불안감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제 말은 아직 전부 끝나지 않았답니다.”
“그 말씀은!”
“조만간 건국제가 열리죠? 그때 맞춰서 황태후 폐하가 수도로 오실 텐데, 그분을 모실 임시 시녀들이 필요하거든요.”
라일라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편지를 받지 못했지만, 2년 전에 해 봤던 일이니까.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거지? 라일라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내부에 임시 시녀로 라일라 영애와 네리아 영애, 두 사람을 추천할까 해요.”
“네? 그건 갑자기 왜……?”
“라일라 양은 알고 있나요? 황태후 폐하께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황태후님의 시녀들은 음식을 준비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답니다.”
“아!”
란타나에게서는 더 이야기가 없었으나, 라일라는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란타나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를.
라일라의 얼굴이 오랜만에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란타나 님! 제가 시녀가 된다면, 정성을 다해 황태후 폐하를 모시겠어요!”
“저는 그저 적임자를 추천하려는 것뿐이니 고마워할 건 없어요. 해가 질 것 같은데, 이제 라일라 양은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네, 조만간 다시 찾아뵙고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일라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견실에서 벗어나는 그녀의 얼굴이 여전히 밝았다.
‘네리아는 이제 끝이야.’
란타나가 준 힌트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네리아의 소행인 척 일을 꾸며 황태후에게 견과류를 먹인다면, 그녀는 황족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죄명으로 벌을 받을 테니까.
시녀가 될 수 있는 것도 확실했다. 궁내부의 고위 관료가 란타나의 수족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되면 가주 자리는 다시 나에게 돌아올 거야!’
바위가 얹힌 듯 답답했던 마음이 개운해진 기분이 들었다. 라일라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서궁의 복도를 걸어가던 때였다.
“꺄악!”
당장 네리아를 치워 버리고 싶다는 마음에 정신이 팔려서였을까,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을 눈치채지 못하고 몸이 부딪쳤다.
“뭐예요? 조심해 줘요!”
14살 정도가 되어 보이는 소녀가 라일라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
라일라는 입을 닫고는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평민 출신 같지만, 선명한 주황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란타나 님 정도는 아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소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란타나가 ‘미인 수집’을 목적으로 데려온 거겠지.
그랬기에 소녀가 감히 고위 귀족인 라일라에게 무례를 저질렀지만, 용서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저 아이도 몇 년 뒤에 사라질 거니까.’
미인 수집의 목적은 황제 폐하의 총애가 사라졌을 때, 란타나를 대신하여 황제에게 보낼 미인을 미리 키우려는 것이다.
하지만 란타나에 대한 황제의 총애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고, 필요가 없어진 소녀들은 17살 정도가 되면 어느 순간 사라지고는 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아져서 아는 게 많아지면, 란타나 님이 통제하기 어려워지니까 그런 거겠지?’
라일라도 몇 번이나 봐 온 일이었다.
“부딪쳐 놓고는 사과도 안 해요? 저는 하스켈 남작님의 조카인 칼로스예요. 당신은 이름이 뭐죠?”
“…….”
이름도 란타나 님이, 귀족 신분도 란타나 님이 만들어 줬을 텐데, 주제도 모르고 떠들기는.
라일라가 멸시하는 시선으로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쳐다보고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
“세사르 님, 그 주술이라는 것 말인데요. 혹시 세계를 넘어간다든가, 그런 일도 가능한가요?”
발렌티스 저택의 응접실에서 그렇게 물은 질문에, 세사르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예? 세계를 넘어가요? 순간 이동 마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순간 이동 같은 게 아니라 예를 들면-”
내가 겪은 일이 아닌 척, 적당히 둘러대며 설명했다.
하지만 세사르는 세계를 이동한다는 현상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듯, 소설 속의 이야기냐며 의아한 표정을 짓기만 할 뿐이었다.
“…아뇨,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화를 포기했다.
하기야 초자연적인 힘이라고 해도, 사람이 평행세계에서 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의심도 없이 내 말을 믿어 준 듀이가 대단한 거였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세사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보다 세사르 님, 그 목걸이 말인데요, 잠시만 줘 보실래요?”
“네? 여기 있습니다.”
나는 세사르가 내민 목걸이를 받아 들고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혹시 이 목걸이의 힘으로 평행세계에 오게 된 건 아닐까? 잠깐 그런 추측을 해 보았으나 기각했다.
목걸이에서는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은 데다, 애초에 나는 저 목걸이를 가져 본 적도 없으니까.
“…….”
표정을 찌푸린 채로 고민해 보았지만, 대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세사르 님, 호기심이 생겨서 그런데, 주술이란 것에 관해 공부할 수 있는 자료는 없을까요?”
“아뇨.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본격적으로 연구된 적이 없는 분야라서 특별한 자료는 없을 겁니다. 저도 마탑에서 그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 정도만 들은 게 전부거든요.”
“그런가요.”
왠지 모를 모호한 느낌이 남았다.
하지만 세사르도 더 알고 있는 내용이나 지식은 없는 것 같았기에, 나는 다른 질문 없이 그에게 다시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그럼 우선은 마법약 사업을 잘 부탁드릴게요.”
“예, 맡겨 주십시오. 네리아 님.”
세사르에게 있던 용건은 대충 이 정도가 끝이었기에,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는 응접실을 벗어났다.
‘주술이라…….’
나중에 황궁의 도서관에서 찾아보기라도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내 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아가씨 오셨어요? 이걸 베키에게 받았어요.”
사샤가 나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전달해 주었다.
“베키가?”
베키가 나에게 연락을 취했다는 것은, 라일라가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다른 의미로 반가운 기분에, 나는 세사르와 나눴던 대화를 잠시 뒤로 미뤄 두고는 사샤에게서 쪽지를 받아 들었다.
그곳에는 보고할 것이 있으니 잠깐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