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01)화 (101/172)



<101>

가주 업무를 맡은 지 이틀째 날.

저택의 고용인 정리를 끝낸 다음으로 시작한 일은, 가신들에게 백작가의 자세한 내부 사정을 보고받는 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네리아 님.”

“다들 안녕하세요.”

저택의 소규모 회의실에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 정도 되는 인원이 모였다. 발렌티스 가문의 핵심 실무진으로 구성된 인사들이었다.

나는 회의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보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부족한 점이 많을 거예요. 그러니 가신 분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해요.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주님을 최선을 다해 보필하는 일이 저희의 맡은 바 책무인 것을요.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네리아 님께 부족한 점이 많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맞습니다. 애당초, 레비 님이 여태껏 후계자 자리에 계셨던 것을 생각하면…….”

“뭐, 그건 그렇죠. 적어도 레비보다는 잘할 것 같기는 해요.”

농담조로 그렇게 이야기하자, 사람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좋았다. 그들은 가문을 거덜 내기만 하던 백부 일가가 드디어 물러난 것만으로도 무척 만족한 것 같았다.

“네리아 님이 그 자리를 맡아 주신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게다가…….”

어떤 가신이 말끝을 흐리며, 내 바로 오른쪽에 앉아 있는 로이엔 경을 힐끔 쳐다보았다.

레고트 백부의 심복이자, 라일라의 후계자 교육을 담당하기까지 했던 로이엔 경이 어째서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옆에 있는 것인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가 백부네를 쳐 내기 위해 로이엔 경을 첩자로 보냈다는 사실을.

“저희는 네리아 님을 믿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제가 부탁드렸던 건……?”

“예, 여기 있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신이 나에게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발렌티스 백작가의 현재 상황을 전반적으로 정리한 보고서였다.

“우선은 전체적인 부분을 파악하실 수 있게끔 요약본부터 준비했습니다. 상세 보고서도 작성 중이니, 완성이 끝나면 곧바로 제출하겠습니다.”

“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는 가신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고는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눈치 볼 사람이 없기 때문일까, 백부의 실책으로 벌어진 결과물들이 가감 없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아니, 이건 무슨.”

그리고 보고서를 읽을수록 내 표정은 어처구니없이 변해 갔다.

이미 로이엔 경에게 들어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정리된 자료를 눈으로 보니 한숨만 나올 정도였다.

가신들은 내 반응을 보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경, 여기 이 부분의 투자 내역은 대체 뭔가요? 수익은커녕 몇 년째 손실만 나고 있는데, 투자금을 오히려 올렸다니요?”

“란타나 님과 관련된 사업체입니다. 투자 명목으로 고스란히 갖다 바친 것이지요.”

“…….”

“어떤 기분이실지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후원 내역은요? 제가 볼 땐 후원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단체 같은데요?”

“아, 그쪽은 레고트 님과 사적인 친분이 있어서 말이지요.”

“…….”

사적인 친분 따위에 가문의 공금을 써?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전부 끊겠습니다. 당장이요.”

“예, 처리하겠습니다!”

가신들 역시, 속이 개운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은 쓸데없이 돈이 새어 나가는 것부터 막든가 해야지.’

지금쯤 백부는 감옥에서 고생 중이겠지만, 한층 더 많이 고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뒤늦게라도 백부를 가주 자리에서 쫓아낼 수 있었던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마지막 장까지 전부 읽은 보고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빈 곳간은 다시 돈으로 채워 넣도록 해야겠지?’

때마침, 돈을 벌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서는 가신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갑작스럽지만,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사업이 있어요. 발렌티스의 가신 몇 명을 그쪽으로 투입할 여유가 있을까요?”

“명령만 내리신다면 인원 조정쯤이야 언제든 가능하지요.”

“그런데 새로운 사업이라니,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마법약 사업이에요.”

“예? 마법약…이요?”

그들이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법약 사업이라면… 마법사를 구하거나 약의 레시피를 만드는 일이 관건일 텐데, 그게 굉장히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쪽은 맨몸으로 뛰어들 수 있는 분야가 아니어서…….”

가신들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저한테 아는 마법사가 한 명 있거든요.”

그리고 이번 건은, 실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것도 마법약을 아주, 아주 잘 만드는 분을 말이죠.”

나는 어머니의 유품을 이용해 포섭했던 어떤 마법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었다.

***

세사르를 내 쪽으로 데려올 때, 그에게 맡길 일을 당장에 결정해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히 정해 두지 않아도 귀중한 마법사인 그가 해 줄 수 있는 역할은 많았다.

나에게 필요한 약을 만들게 할 수도 있고, 요정왕의 심장으로 마력이 늘어났으니 내 호위를 맡길 수도 있다.

그런데 기사 선발의 최종 시험이 치러지던 날.

듀이에게 줄 상처 치료약을 받으며 약효를 직접 체험해 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투자해서 정식으로 판매하기만 한다면,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랬기에 나는 세사르를 발렌티스 백작저로 호출했다. 저택이 내 소유가 된 만큼, 조만간 어차피 그를 데려올 계획이기도 했으니까.

“안녕하세요, 세사르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리아 님!”

저택의 응접실.

그곳에서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마법사가 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뵙지 못했던 사이에 가주 내정자가 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그러면 저는 이제부터 이 집에서 지내면 되는 겁니까?”

“네. 빈방이 많으니, 편한 곳을 골라서 사용하시면 된답니다.”

“바로 짐 싸서 들어오겠습니다! 슬슬 여관에서 지내는 것도 질리던 참이었거든요.”

“도와줄 하인을 붙여 드릴게요.”

세사르는 수도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그때의 여관에서 머무르며, 종종 내가 부탁한 약을 만들어서 보내 주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세사르를 진작에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동안은 백부네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그 인간들이 내 손님을 곱게 받아 줄 리 없을 테니까.

“사람을 붙여 주신다면 감사하죠! 그런데 이제부터 저한테 시킬 일이 있으시다고요?”

세사르가 뭐든지 시켜만 달라며 의욕을 보였다.

예의상 안부 인사 정도는 할 생각이었건만, 상대 쪽이 먼저 본론을 물어 왔기에 나도 곧바로 일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네, 저희 가문 차원에서 마법약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거든요. 세사르 님의 협조가 필요해요.”

“마법약이요?”

그렇게 되묻는 세사르의 목소리가 심드렁하게 들렸다.

“저도 이제 마력이 늘어났으니, 마수를 잡는다거나 마법을 쓰는 일을 시키실 줄 알았는데요. 마법약이면 간단한 일이네요.”

세사르는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 모습을 보는 내 눈은 반짝였다.

가신들은 어려울 거라며 우려를 보인 일이었건만, 간단한 일이라니. 역시 천재는 천재였다. 그의 얼굴이 돈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뭐든 하겠다고 약속드렸으니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믿음직스러우시네요.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해 보았는데요.”

나는 세사르에게 가신들과 미리 작성한 계획서를 내밀었다. 그는 서류를 슥 읽고서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도 않네요. 알겠습니다.”

“수익금 분배에 관한 건, 저번에 협의했던 계약대로 이행할게요.”

세사르를 만났던 날. 그는 요정왕의 심장을 얻겠다고 눈이 뒤집힌 상태였기에, 계약 조건은 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정해졌었다.

‘세사르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금 대부분을 내가 가져가게 되었지.’

어쩐지 악덕 고용주가 된 것 같았지만 뻔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소중한 어머니의 유품을 줬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제가 드린 목걸이를 잘 쓰고 계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다만 양심에 찔려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이를테면, 괜히 일부러 생색을 낸 것이었다.

“네, 맞습니다! 덕분에 정말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걸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세사르의 표정과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네리아 님 덕분에 이제 저도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말하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요. 절 반편이라고 놀리던 마탑의 동기들을 만나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라니 저도 기쁘네요.”

“정말이지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여관에서 지내는 동안, 이 목걸이를 분석해 보았는데-”

어쩌다 보니, 졸지에 세사르의 연구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으음? 이런 대화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인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가 너무 신나 보였기에 경청해 주기로 했다.

“…요정왕의 심장이라는 이름처럼, 이걸 심장에 박아 넣으면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폭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랬다가는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아서 시도는 못 할 것 같고-”

“오, 그렇군요. 참 신기하네요.”

“…이러한 점에서, 연구할수록 신기한 물건이었습니다. 주술에 가까운 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주술?”

그러던 중,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들렸다. 주술? 어머니의 목걸이가? 그랬기에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주술이라면 책에서 지나가듯 본 적이 있는 말인데, 마법이랑은 다른 종류를 말하는 건가요?”

“네. 아직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기에 정확한 개념은 없지만,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힘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저주한다거나-”

…어째서였을까?

그 말을 듣고 있으니, 어쩐지 내가 평행세계로 온 일이 떠올랐다. 그것도 꼭,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었던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애매한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질문했다.

“세사르 님, 그 주술이라는 것 말인데요. 혹시 세계를 넘어간다든가, 그런 일도 가능한가요?”

***

‘무조건 란타나 님을 만나야 해!’

라일라는 그렇게 결심하며 황궁으로 향했다. 손에는 밤을 새워 가며 몇 번을 고쳐 쓴 편지를 든 채였다.

원래라면 하인을 통해 황궁으로 편지를 부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네리아가 중간에서 편지를 빼돌리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 라일라가 직접 황궁까지 가져가는 것이었다.

심지어 황궁으로 간다는 사실조차도 숨겨야 했다. 그랬기에 직속 하녀인 베키에게만 일러두고는 저택을 조용히 빠져나온 것이었다.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한다니.’

바득, 이가 갈렸다.

하지만 황궁 입구에 도착한 뒤.

라일라는 애써 기분을 감추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는 정문에 서 있는 시종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라일라 발렌티스입니다. 이걸 디르케님이 계신 서궁으로 보내 주세요. 제가 방문 허가를 요청한다는 전언이랑 같이요. 그리고.”

라일라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디르케께서 방문 허가를 내주실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도 같이 전달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네리아 때문에 내가 이런 굴욕적인 말까지 해야 한다니!’

어쩐지 황궁의 시종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라일라가 고개를 숙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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