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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00)화 (100/172)



<100>

누가 보낸 걸까? 황금색 봉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궁내부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궁내부가 이런 시기에 귀족가에 편지를 보냈다는 건.’

…그러고 보니, 머지않아 건국제가 있을 예정이던가? 나는 달력을 힐끗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뭔지 알 것 같군.

서랍에서 페이퍼 나이프를 꺼내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자, 안에는 ‘건국제 기간 동안, 황태후 폐하를 모실 임시 시녀를 뽑는다.’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역시 그 내용이었다.

‘황태후 폐하라고 한다면…….’

딱히 잘 아는 분은 아니었다.

나는 멀리서 한 번 본 것이 전부인 어떤 여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태후는 현 황제가 즉위한 이후, 본인의 희망에 따라 고향인 남부로 귀향하고자 황궁을 떠났다.

그러다가 1년에 한 번, 건국제 기간에 맞춰 잠깐 수도로 돌아왔는데, 황태후가 황궁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녀를 보필할 시녀가 필요했기에, 고위 귀족 여성 중에서 그 인원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황태후 폐하의 말벗이 될 수 있도록, 교양이 높은 영애나 귀부인이 주로 뽑힌다고 했던가?’

아무리 수도를 떠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황태후는 황제의 친모였고, 황족을 모시는 것은 귀족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만큼, 황태후의 시녀 자리는 임시라고 해도 인기가 많아 희망하는 지원자가 많았다.

‘예전 세계였다면 나도 지원 정도는 해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튜터로서 다른 황족인 니나렛 황녀를 돌보고 있는 데다, 이미 가문의 일이 바빠 시녀 역할까지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한 고로, 황궁에서 받은 편지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안내문에 적힌 내용은 희망자가 있다면 궁내부로 지원하라는 내용뿐이었기에, 특별히 더 해야 할 일도 없었다.

‘하고 싶은 사람이 되겠지.’

어차피 관심 있는 자리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봉투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를 챙겨 들었다. 발렌티스 저택 고용인들의 인사 개편에 관해 정리한 문서였다.

자, 그렇다면 일을 시작하러 가 볼까. 나는 서류를 든 채로 밖을 나서며 미소를 지었다.

***

내가 가주 대리로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저택의 고용인을 물갈이하는 것이었다.

주인이 바뀌면 아랫사람이 바뀌는 것도 당연한 법. 나는 저택의 1층 로비에 고용인 일부를 지명하여 소집시켰다.

집사와 하녀장을 비롯하여, 백부 일가를 따르는 심복들이었다. 그 외에, 하녀 시절에 나를 유독 괴롭혔던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

사람이 꽤 모였건만, 로비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예감한 듯, 마치 급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조용하면서도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다.

“왜 불렀는지는 너희가 더 잘 알고 있지? 오늘부로 너희는 해고야.”

“네리아 아가씨……!”

물론이지만, 단순한 해고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감히 귀족이자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를 핍박한 자들이 아닌가. 가주 내정자인 내 위신을 위해서라도 그냥은 내보낼 수 없었다.

각종 이유를 붙여 거액의 벌금을 물리고, 쫓아내기 전에 심한 매질이 가해질 예정이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다급하게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비굴하게 빌며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전부 예전 주인님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짓입니다!”

“아가씨, 제발! 저도 그러기 싫었는데, 마님의 지시 때문에!”

“욕심 때문에 가족까지 죽인 악독한 인간들이 아닙니까? 저는 그 사람들에게 세뇌를 당해서……!”

구구절절 백부네를 탓하는 변명이 이어졌는데,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시켜서 하기는 무슨. 백부나 멜비나 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나서서 나를 괴롭혔으면서.

봐줄 필요가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런 만큼 시간을 끌며 굳이 변명을 들어 줄 필요 또한 없었다.

“시끄럽네. 당장 끌어내도록 해.”

권력이란 좋은 것이다. 성가시다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고용인들이 그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네리아 아가씨……!”

“용서해 주세요!”

로비가 통곡 소리로 가득 찼지만, 마지막 남은 인원까지 전부 정리가 끝나자 발렌티스 저택은 다시 정숙함을 되찾았다.

어쩐지 집이 깨끗해진 것 같았다. 진짜 청소란 이런 게 아닐까.

나는 개운한 기분이 되어서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새로 임명한 집사와 하녀장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하녀 시절에 직접 겪어 보고 뽑은 사람들로서, 나와는 사이도 좋은 데다 업무적인 능력도 뛰어난 자들이었다.

“이번에는 라일라의 직속 하녀들을 전부 데려올래? 라일라가 안 보내려고 하면, 내 명령이라고 하면서 강제로 끌어내도 돼.”

“알겠습니다, 네리아 님.”

그들은 내가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신속하게 발을 움직였고, 조금 뒤에 베키를 포함한 하녀 세 명이 도착했다.

그리고 라일라가 잔뜩 화가 난 모습이 되어서는 그 뒤를 따라왔다.

“아무리 네리아의 명령이라고 해도, 내 하녀들을 강제로 데려가? 무슨 짓이야? 그만두지 못해?”

“라일라? 너도 같이 왔네. 마침 잘됐다.”

나는 그녀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직속 하녀로 셋까지는 너무 많잖아? 그래서 한 명만 남기고 남은 둘은 해고하려고.”

“해고? 이제는 내 하녀들까지 마음대로 하려는 거야? 작작 해! 차라리 날 쫓아내지 그래?”

“응? 사촌 자매인 널 쫓아내라니, 우리는 가족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가식적인 말 집어치워!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뭐, 그거야 당연하지. 나는 쿡쿡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럴 리가. 하지만 백부님이 날려 먹은 재산이 워낙 많다 보니, 이런 식으로라도 쓸데없이 나가는 비용을 줄여야지. 안 그래?”

“내 앞에서 내 아버지를 욕하는 짓은 그만둬! 너 정말 어디까지 나를-!”

“그래서, 너희들.”

나는 바락바락 떠드는 라일라를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그녀의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나갈래?”

“네리아 아가씨……!”

“아니다. 이건 주인에게 결정권을 줘야겠지? 라일라. 누굴 남길래?”

“…….”

“대답하지 않으면 가주 권한으로 셋을 전부 다 내보낼 거야. 괜찮겠어? 그리고 너희도 창문으로 봤지? 다른 고용인들이 끌려 나가는 모습 말이야.”

“네리아 님!”

“저희는 그저 라일라 아가씨를 모신 것뿐이에요!”

하녀 두 명이 애처로운 태도를 보이며 나에게 매달렸다.

반면, 잠깐이었지만 적대적인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실수였던 듯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하녀가 있었다. 베키였다.

“…….”

그리고 그녀들의 모습을, 라일라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나마 널 배려해서 네 하녀를 한 명이라도 남기게 해 준 거야. 계속 협조하지 않을 거라면, 저 셋을 전부 내보내고 내가 정해 주는 아이를 네 직속 하녀로-”

“베키를 남길게.”

“라일라 아가씨!”

라일라에게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그녀는 세 명 중 베키를 선택했다.

나에게 매달리는 하녀와 나를 적대하는 하녀.

굳이 한 명을 골라야만 한다면, 라일라는 누구를 선택할까? 그 답은, 굳이 답안지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알겠어, 그럼 고용인을 정리하는 문제는 이 정도로 끝낼게. 그리고 집사와 하녀장?”

“네, 네리아 님.”

“고용인의 채용 권한은 두 사람에게 맡길 테니까, 부족한 하녀나 하인은 필요한 만큼 새로 충당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라일라에게는 방금 비용 지출을 줄여야 하니 하녀를 내보낸다고 했으면서, 지금은 고용인을 필요한 만큼 뽑으라고 말했다.

명백히 라일라를 농락하는 발언이었기에,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엉망으로 구겨졌다.

***

“죽여 버리고 싶어! 죽일 거야!”

문을 전부 닫고 커튼까지 모조리 닫아 어두워진 방 안에서, 라일라가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라일라는 황태제비 후보 자리를 잃어버리고 레비가 아버지를 죽일 뻔한 사고까지 벌였을 때, 인생이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닥 아래에는 그보다 더한 바닥이 있었다.

“나는 황태제비가, 황후가 될 사람이었단 말이야…….”

분명 그랬었는데, 라일라가 저지른 실수로 부모님은 황궁의 감옥에 갇혀 버렸고 그녀의 인생은 나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라일라는 도저히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매일매일, 네리아로 인해 겪는 굴욕적인 일이 끊이지를 않았다.

심지어 가문의 경제 상황이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라일라가 받던 예산까지 전부 끊어 버렸다.

하지만 라일라는 끊임없이 부당한 일을 겪으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황태제비 후보로서, 귀하게만 자라 왔기에 이런 일에는 조금도 면역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교계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동안 깔아 보던 사람들에게 조롱이나 당할 게 분명했으니까.

이러다가, 가주가 된 네리아가 정해 준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팔려 가듯 결혼이나 하게 되겠지.

“…복수할 거야. 가만 안 둬.”

라일라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였으나 고통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라일라가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상태로, 고개를 들어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란타나 님께 부탁드리면 분명 나를 도와주실 거야.”

그분은 자비로운 분이니까.

게다가 발렌티스 백작가는 란타나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가문이었다.

라일라가 네리아에게서 가문을 되찾는다면, 그녀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닌가.

“베키, 지금 당장 편지를 쓸 거야. 커튼을 걷어 줄래?”

“네, 라일라 아가씨.”

라일라의 충실한 하녀는, 그녀의 명령을 듣자마자 커튼을 걷어 방을 밝게 만들고는 책상 위에 편지와 펜을 준비했다.

“고마워.”

하녀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어차피 돈을 받고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아까 베키가 네리아를 적대적인 시선으로 쳐다보았을 때, 그녀 역시도 이 상황을 부당하게 느끼고 있다는 동질감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 없이 베키를 고른 것이었다. 제 입장도 모르고 네리아 따위에게 빌기만 하는 하녀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가문을 되찾으면, 베키에게도 상을 내려야겠어.’

라일라가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지에 글을 써 내려갔다.

“…….”

한편, 베키는 책상 옆에서 라일라가 편지를 쓰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란타나 님께 쓰는 건가? 이건 네리아 님에게 알려 드려야겠네.’

돈을 받은 만큼은 해야지.

라일라에 대한 죄책감은 이미 사라졌다. 어차피 자신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고용주는 가주인 네리아라고 합리화를 끝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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