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98)화 (98/172)



<98>

“예, 말씀 따르겠습니다.”

결국, 할머니의 단호한 명령하에 두 사람이 회의실에서 끌려 나가게 되었다.

어느새인가 백부의 호위 기사인 첼시 경이 나타나 난감해하면서도 앞을 막아섰으나, 이번에도 할머니가 기사를 물렸다.

“이자들은 죄인이네. 괜히 감싸느라 피를 볼 생각은 하지 말게.”

“대, 대부인…….”

더욱이, 백부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 그레이 경이었다.

이곳에는 그레이 경을 무력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결국 첼시 경도 어찌하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백부가 본인의 말도 안 듣는 그레이 경을 가문에 계속 놔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지.’

다른 가문에 빼앗기는 게 차라리 손해가 될 정도로 강한 기사니까.

나는 그들이 굴욕적으로 연행되는 모습을 유쾌하게 바라보았다.

“어머님, 잠시만요, 어머님!”

“어머니가 어떻게 저를-!”

백부와 백모는 애타게 대부인을 불렀으나, 그녀는 차갑게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여태껏 나서지도 못하고 앉아만 있던 라일라가, 희게 질린 얼굴로 일어나 두 사람을 따라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라일라가 문을 나가기 직전, 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놔! 이거 놓지 못해?”

“넌 아직 나갈 때가 아니야. 남아 있는 문제가 있잖아?”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나는 부모님께 갈 거야!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내가 널 가만히 놔둘 줄 알아?”

“아니, 언제는 네가 날 가만히 놔뒀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라일라가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동안 귀하게만 자란 그녀가 8년이 넘게 하녀 일로 단련된 네리아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런 라일라의 손목을 계속 붙잡은 채로, 가신들을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안건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레고트 발렌티스는 부정한 방법으로 가주직에 올랐습니다. 그런 고로, 후계자에 대한 논의도 다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레고트 백부가 죄인인 만큼, 그의 직계 혈육인 라일라에게도 후계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

내 말을 알아들은 라일라의 얼굴에서 또다시 핏기가 사라졌다.

부모님은 죄인으로 끌려간 데다 그녀 역시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깨달은 라일라는 버둥거리던 것을 멈추고는 회의실에 남아 있는 가신들을 둘러보았다.

“예. 저는 네리아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베른 경이었다.

그는 이미 예전부터 나에게 가주가 되지 않겠느냐 권유한 과거가 있었던 만큼, 이 상황을 오히려 반기는 것 같았다.

“베른 경, 당신……!”

“저 역시 동의합니다. 레고트 님이 저지른 죄가 밝혀진 이상, 발렌티스의 적법한 후계자는 전 가주셨던 카터 님의 직계인 네리아 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 무슨!”

그리고 베른 경의 발언을 시작으로, 가신들이 하나둘씩 의견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는 네리아 님을 지지합니다. 얼마 전에는 가문의 일개 하인이었던 평민을 견습 기사로 발굴하여, 기사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시키는 성과까지 일궈 내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발렌티스 가문에 무척이나 명예가 된 일이었지요.”

“그렇게 쌓은 가문의 명예가, 다른 일로 떨어지기는 했지만요. 가신으로서 통곡할 일이었지요.”

“당신들 지금-!”

은근슬쩍 레고트 백부가 저지른 실책을 지적하기까지.

라일라가 당황하며 소리쳤으나, 가신 중에서 그녀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인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어떤 분이 후계자로 적합한지, 표결에 부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허락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제시한 의견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가신들 사이에서 투표가 시작되었다.

“네리아 님을 차기 가주로 지지하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둘씩 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과반수는 진작에 넘겼고,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을 세는 쪽이 훨씬 빠를 정도였다.

“저도 네리아 님을 지지합니다!”

근처에 있던 뉘른 경이 나를 의식하며 손을 번쩍 들었지만, 그는 현재 백작가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숫자에서는 제외했다.

마지막으로 로이엔 경까지 손을 드는 것으로 투표는 끝이 났다. 만장일치였다. 솔직히 말해서, 당연한 결과였다.

백부는 가주로서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란타나와의 친분과 라일라를 황태제비로 만든다는 명분만으로 가신들의 지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두가 연기처럼 사라진 데다, 각종 사건 사고를 터트려 귀족들 사이에서 망신의 대상이나 되지 않았던가.

가신들은 가문 내에서 권력을 두고 다투거나 의견 충돌로 대립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들에게는 똑같은 목적이 하나 있었다.

바로 가문을 번창시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가문을 번창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판단한 건, 빈손으로 시작해 각종 성과를 이뤄 낸 나였지 라일라가 아니었다.

“로이엔 경, 어떻게 당신까지!”

라일라는 이 현상을 눈에 담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특히, 로이엔 경이 손을 든 모습을 보며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상처받은 모습을 보였다.

우습기도 하지.

나는 그런 라일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손을 드는 게 당연하지. 로이엔 경은 처음부터 내 편이었으니까.”

“…뭐라고?”

“라일라, 너는 뉘른 경이 어째서 지금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해?”

“너……!”

뉘른 경이 레고트 백작 부부의 약점을 가져온 건, 라일라에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일라에게 뉘른 경을 내보내라고 조언한 사람이 로이엔 경이다.

어차피 라일라도 머리가 식으면 금방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친절하게 그 부분을 속닥속닥 지적해 주었다.

“너, 설마 나를 속이려고 일부러 로이엔 경을……!”

라일라가 나를 보며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공포심이 스며들었다.

“그, 그럼 부모님을 저렇게 만든 게… 설마 나라는 말이야? 내가 뉘른 경을 내보내서…….”

“뭐,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됐네. 유감이야, 라일라.”

나는 얄밉게 대답하며 방긋 웃어 주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라일라가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동공에서 빛이 사라져 있었다.

“네리아.”

그리고 조금 뒤, 할머니가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라일라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회의장에서 모습을 감췄던 그녀는, 손에 가주의 인장을 들고 있었다.

할머니는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는 라일라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나에게 인장을 내밀었다.

‘뭐, 나와 내 부모님의 피를 빨아 지금까지 떵떵거리며 살아온 인간들이니까.’

“자, 받도록 하려무나. 이제부터는 네가 발렌티스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거야. 어려운 일이 있으면 모두가 도와줄 테니, 절대 부담감 느끼지 말도록 하렴.”

“네, 할머니.”

그녀에게서 인장을 받아 들자, 회의장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완벽한 승리였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가졌어야 할 것들을 이제야 돌려받은 것뿐이니까.

무엇보다, 이미 돌아가신 이곳의 부모님과 태어나지도 못한 동생은 어떻게 해도 돌려받을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그로 인해 외롭고 쓸쓸하게 죽음을 택한 네리아 역시도.

이것은 말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 그 잘못의 대가는 이제부터 그들이 하나씩 치러 나가게 해 줄 것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건 저택의 천장이었는데, 어쩐지 죽은 이 세계의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네리아는 이 모습을 보고 있었을까?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내 입으로 직접 말해 주고 싶었다.

네게서 부모님을 빼앗고, 널 죽음으로 내몬 자들은 전부 벌을 받게 될 거라고.

‘그러니 다음은 그 사람이지.’

백부와 손을 잡고 부모님을 죽이는 데 협력한, 분홍색 눈을 가진 어떤 미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

레비의 재판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또다시 같은 장소에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느낀 점이 있다면, 법정이란 공간은 상당히 유쾌한 장소라는 사실이었다.

“레고트 발렌티스에게는 종신형을, 멜비나 발렌티스에게는 90년의 감옥형을 선고하겠습니다.”

이변은 없었다.

살인 미수를 저지른 레비가 30년 형을 선고받았으니, 실제로 계획을 성공시킨 두 사람이 훨씬 더 큰 형벌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숨은 공로자가 한 명 있었는데.

“네리아 님, 저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백부와 백모의 각종 비리를 싹싹 긁어다가 나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친 뉘른 경의 존재였다.

그는 이미 레고트와 멜비나를 배신했다.

그런 두 사람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건 뉘른 경이었기에, 그는 백부와 백모가 확실한 처벌을 받을 수 있게끔 나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이었다.

한편, 레고트 백부는 황궁의 기사들에게 연행당하며 악을 내질렀다.

“뉘른, 네놈이 나를 배신하다니! 그리고 내가 네리아 너를 가만히 둘 것 같으냐! 두고 보자!”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두고 보자고 말하는 인간치고, 무서운 사람이 없다고 했다.

특별 사면이나 감면도 불가능한 종신형을 받은 주제에, 두고 보긴 뭘 두고 본다는 건지.

“네리아 네깟 것을 절대-!”

“기대하고 있다니까요.”

게다가 황궁의 감옥살이는 건강한 사람들도 버티기 힘들 만큼 굉장히 고되다고 했다.

나는 끌려가는 그들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악인의 마지막이란, 언제나 비참한 모습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네리아 님……? 저는 어떻게 하실 것인지요?”

그렇게 감옥형을 받은 두 사람이 법정에서 모습을 감추자, 뉘른 경이 굽실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글쎄요.”

나는 그런 뉘른 경을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뉘른 경을 가문에 둘 수는 없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배신을 저질렀고, 다음은 배신의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다만, 뉘른 경 덕분에 백부와 백모를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도 맞다. 그렇다면.

“재판을 신청해 공식적으로 벌을 받게 하지는 않을게요. 대신, 발렌티스 영지에서 2년 동안 무급으로 노역을 나가도록 하세요.”

“노, 노역이라니! 네리아 님, 어떻게 귀족인 제게 노예들이 하는 일을……!”

“그럼 가문 회의에 정식으로 회부할까요? 전 가주의 부당한 죽음을 알면서도 입을 다문 것으로 모자라, 제 어머니의 명예를…….”

“하, 하겠습니다! 합니다! 다, 다만 그렇다면 제 가족의 생계는 어떻게…….”

이런 순간에도 실리를 챙기는 걸 보면 노역형이 끝난 뒤에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겠어.

나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 남은 뉘른 경의 가족들은 저희 가문에서 돌봐 드릴 테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벌에 비하면 무척이나 가벼운 벌이었다.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반성하는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

저택으로 귀가한 후에는, 야외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레고트 백부가 공식적으로 죄인 신분이 되며 나도 내일부터 가주 대리 업무를 수행하며 더욱 바빠질 예정이었기에, 오늘은 편하게 휴식을 취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네리아!”

불청객이 찾아왔다. 라일라였다.

심신미약으로 쓰러져 오늘 법정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그녀는 언제 깨어난 것인지 흉포한 기색을 띠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은 레비, 그리고 다음은 내 부모님. 마지막은 나야?”

“라일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나를 어쩔 생각이야? 죽일 거라면 차라리 지금 죽여!”

“너도 참, 무서운 소리를 하네.”

나는 일부러 놀란 시늉을 하며 마시고 있던 홍차를 내려놓았다.

“죽이긴 누굴 죽여? 네 오라버니가 백부님을 죽이려다가 감옥에 갔고, 백부님과 백모님은 내 부모님을 죽이고 감옥에 갔는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내가 네 가족이랑 똑같은 사람으로 보여?”

“네리아-!”

“하기야, 이제 내가 가주가 되었으니까 네 신변에 관한 문제도 내가 책임지게 되었네.”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 라일라를 보며, 나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듯 입을 열었다.

“가문에 도움이 되도록 좋은 사람과 결혼이라도 시킬까? 예를 들면 필립스 토르네 같은 분과?”

“겨, 겨, 결혼이라고? 게다가 필립스 토르네? 그건 절대 싫어!”

“나는 그런 쓰레기와 결혼을 시키려고 한 주제에, 싫다는 말을 잘도 하네. 너희 가족은 정말이지 양심이란 게 없구나?”

“그, 그때는……!”

“뭐, 그렇지만 사실, 같은 여자로서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러니까.”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내 구두 위로 홍차를 부어 버렸다. 갈색 액체가 쪼르륵 쏟아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구두가 더러워졌네.”

“…….”

“닦아. 네가 하는 걸 봐서, 널 어떻게 할지 결정할 테니까.”

언젠가, 지금 이 공간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다만 상대가 정반대로 바뀌었을 뿐.

나는 웃는 얼굴로 라일라에게 구두 신은 발을 내밀었다.

“무릎 꿇고 닦는 거, 잘 알지?”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던졌다.

그 유치한 행동에, 어쩌면 미래에 고귀한 황태제비가 되었을지도 몰랐을 라일라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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