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97)화 (97/172)



<97>

“가주님께서 저지른 죄라니요?”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작스러운 내 등장과 발언에 회의장에 모여 있던 가신들이 의아한 듯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라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죄? 네리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나가. 가주 대리로서의 명령이야. 나가지 않으면 기사를 불러서 강제로 끌어내겠어.”

“잠깐, 라일라. 기다리렴.”

그러나 그녀의 옆에 있던 멜비나 백작 부인이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다는 듯, 라일라의 지시를 거두고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리아. 설마,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찾으셨다는 가짜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너였니?”

“일단, 두 분께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제가 맞아요.”

“뭐라고?”

너무 당당한 태도로 대답했기 때문이었을까, 멜비나 부인이 헛웃음을 내뱉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죄 같은 소리를 운운하더니, 정작 죄를 지은 건 너였구나! 황족을 사칭하는 행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기나 하는 거니?”

“사칭이라니, 그런 적 없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네가 보낸 편지가 내 손에 있는데 어디서 발뺌을……!”

“그 전에 정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저는 ‘황가’에서 두 분을 찾으셨다고 했지, ‘황제 폐하’라고 쓴 적이 없어요.”

“…뭐?”

“일전에 니나렛 황녀 전하께서 두 분을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거든요. 저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드린 것뿐인걸요?”

“…….”

멜비나 부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말에 틀린 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는지, 그녀의 얼굴에 분노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네리아, 이 맹랑한 것이-! 감히 어른을 놀려? 대체 어디까지 건방지게 행동할 생각이야? 하는 짓이 꼭 네 부모님을 닮았구나! 조카라고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나를 쳐 내려는 시도가 항상 실패로 돌아갔을 뿐, 저 인간들이 대체 언제 날 봐줬다는 건지.

그랬기에 나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제 부모님을 닮았다니, 세상에서 제일 기쁜 칭찬이네요! 그보다 백부님의 죄를 고발하겠다고 했는데, 슬슬 시작해도 될까요?”

“시작은 무슨? 첼시 경! 밖에 첼시 경 있나요? 당장 저 애를 내보내도록 하세요!”

“모두 조용히.”

그때였다. 내가 들어온 이후로도 침묵을 지키고만 있던 할머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거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였다.

크지는 않아도 말투에서 느껴지는 기백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고는 할머니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네리아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구나. 말해 보도록 하렴.”

“어머니!”

멜비나 부인이 내 편을 들어 주는 할머니에게 곧장 반발했지만, 할머니의 태도는 변함없이 완고했다.

물론이지만, 할머니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인인 그녀와 동등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가주인 레고트 백부뿐이었지만, 그는 지금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백부는 여러모로 답답했는지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보였다.

“백부님이 저지른 잘못은 많지만, 우선은 이것부터 시작할게요.”

나는 아까보다 한결 조용해진 장소에서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가주가 되기 위해 저희 어머니가 마구간지기와 불륜을 저질렀고, 저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누명을 씌운 일이요.”

“누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조심하지 못하겠어? 오히려 너야말로 우리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

“그 일에 관해 증언해 줄 증인을 모셔 왔답니다. 들어오세요.”

멜비나 부인의 말을 끊으며, 문밖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어떤 남자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하인들이 입는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정체는 바로.

“뉘른 경이 아니십니까? 도대체 왜 그런 꼴로……?”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 것에 사람들이 또다시 웅성대는 사이, 멜비나 부인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이 수도에 도착한 날은 고작 어제였기 때문에, 라일라에 의해 뉘른 경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았다.

“…….”

그러나 뉘른 경은 가주 부부에게는 한 줌의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참고로, 그가 하인용 복장을 한 이유는 발렌티스 저택에 출입을 금지당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데려온 하인으로 위장해서 겨우 들어올 수 있었지.’

한편, 라일라의 경우는 자신이 내친 사람이 저택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뉘른 경! 당신은 제가 해고했는데 왜 여기 나타난 건가요? 네리아, 네가 데려온 거야?”

“라일라, 그게 무슨 소리니? 뉘른 경을 해고했다고? 대체 우리에게 상의도 없이 왜 그런 짓을-!”

“어머니?”

멜비나 부인이 다급하게 라일라를 추궁했다.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어떠한 이유로 그들의 최측근 인사가 내 옆에 붙어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알아봤자 되돌리기에는 한참을 늦었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뉘른 경, 말씀해 주시겠어요?”

“저는 레고트 님과 멜비나 님, 두 분의 명령을 받아 돌아가신 로즈 님께 불륜을 저질렀다는 거짓 정황을 만들었습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뉘른 경! 네리아에게 무슨 대가를 받기로 약속했길래 우리를 모함하는 거죠?”

멜비나 부인이 소리쳤고, 레고트 백부는 테이블을 치며 일어나 뉘른 경을 향해 삿대질했다.

“모함이 아닙니다. 그때, 저희가 매수하여 거짓 증언을 한 사람은 세 명. 죽은 하녀장과 집사, 얼마 전에 위증죄로 벌을 받은 매튜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보상을 받는 대가로 이 일을 함구하겠다고 작성한 각서입니다.”

뉘른 경은 자신이 챙겨 온 증거물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위증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매튜가 거짓말을 했다고 시인하며 작성한 문서입니다. 매튜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에 감옥의 간수가 대리로 작성한 것이지만, 이 서류의 사실 여부에 관해서는 간수들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

매튜를 찾아가기까지 했었어? 이건 미리 듣지 못한 이야기였기에, 약간 감탄했다.

뉘른 경이 어떻게 증언하는지에 따라서 그의 처우를 결정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인지, 확실하게 증거 자료들을 만들어 온 것 같았다.

어쨌거나 증인의 수가 늘어날수록 증언의 신빙성이 더해지는 것이었으므로,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뉘른 경!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멜비나가 억울해하며 발뺌했으나, 이곳에는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딱히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지난 연례 회의 때, 내가 아버지의 친자로 드러났을 때부터 알음알음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저 오늘을 계기로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기에, 가신들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 그렇다면.’

분위기도 만들어졌으니, 이번에는 본론을 터트려 볼까.

“그리고 고발할 일은 하나가 더 있어요. 그건.”

나는 필사적으로 뉘른 경의 이야기를 부인하고 있는 백작 부부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백부님과 백모님, 두 분께서 가주 자리를 빼앗기 위해 제 부모님을 고의로 살해한 일이요.”

“…예?”

“방금, 무슨 말씀을……?”

역시, 이번 주제는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회의실이 소란스럽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네리아 발렌티스-!”

그리고 멜비나 부인이 히스테릭하게 외치는 비명 소리가 회의장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 입 닥치지 못하겠니? 더는 네가 우리를 음해하려는 꼴을 봐줄 수 없겠구나! 첼시 경! 저 애를 당장 바깥으로-!”

“멜비나 발렌티스!”

그러나 그보다 더 엄한 할머니의 목소리라 불벼락처럼 내리쳤다.

“조용히 하거라! 네리아, 나는 네 말을 더 듣고 싶으니, 계속 이야기하려무나.”

“네, 할머니.”

나는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이 마차 사고를 사주한 것과 죽은 어머니의 심장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을 수도 밖으로 보내기 위해, 일부러 할머니에게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보내 그녀의 건강을 위독하게 만든 사실까지.

이야기가 끝나자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멜비나 부인은 마치 나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무섭게 눈을 희뜩였다.

“네깟 것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니? 증거도 없이 그딴 소리를 내뱉다니!”

“증거라면 있어요.”

나는 뉘른 경에게 받았던 서류를 꺼냈다. 그러고는 가장 근처에 있던 가신에게 넘겼다.

“직접 확인해 보시겠어요?”

“…맙소사.”

백작 부부의 눈치를 살피며 서류 안의 내용물을 살펴본 가신은, 놀란 듯이 눈을 떴다.

증거물이 순서대로 다른 가신들에게로 넘겨졌고, 회의장의 소음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증거물의 백작 부부에게 향한 순간.

“대, 대체 이걸 어디서!”

레고트와 멜비나 백작 부부가 서로를 마주 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 없어! 이건 조작이야! 네가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그러실 줄 알고, 이번에도 황궁 소속의 필체 감정사분들에게 확인 자료를 받아 왔답니다.”

살인자에게 지킬 예의는 없다. 나는 그들이 앉은 곳으로 또 다른 서류를 툭 던졌다. 백부가 적은 메모가, 그의 자필이 확실하다는 분석 자료와 소견서였다.

“아니야, 이건……!”

“두 분도 늦었지만 죗값을 치르셔야죠? 그리고 발렌티스의 가신 여러분들.”

나는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는 친동생을 살해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가주직을 취득한 레고트 발렌티스에게서, 가주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의견이 있는 분이 있으신가요?”

증거가 확실하기에, 두 사람이 처벌을 받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 된 일이었다. 그랬기에 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가주로서 무능한 모습만 보였던 레고트 백부는 이미 신뢰와 신임을 잃은 지 오래였다.

심지어 존경받던 카터 전 가주를 죽였다는 사실까지 드러나지 않았던가.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편을 드는 가신은 아무도 없었다.

“…결정이 난 것 같네요. 그레이 경, 듀이 경. 밖에 계시지요?”

“예, 아가씨.”

내 부름에, 이번에는 그레이 경과 듀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모셔가 주세요. 황궁에서 정식으로 재판이 있을 때까지 감금이라도 해 두는 것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리아, 네리아-! 나에게 이런 짓을 벌이고도 네깟 것이 무사할 것 같더냐-!”

그레이 경이 레고트 백부를 끌고 가려던 때였다.

심리적인 문제였다더니 새로운 충격에 다시 말문이 트인 걸까, 레고트 백부가 노성을 터트렸다.

“손 치워라! 평민 기사 따위가 내 몸에 손을 대? 그리고 네리아, 어디서 너 따위가 감히 가문의 일을 좌지우지하려 들어?”

그러고는 그레이 경의 손을 뿌리친 채, 나를 위협하듯 걸어왔다.

그레이 경과 듀이는 그런 백부에게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곧바로 움직였지만, 그와 동시에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레고트.”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가 백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오른손을 들어, 레고트 백부의 뺨을 내리쳤다.

파열음이 울렸다. 강한 힘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부는 어머니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내가 너를 잘못 키웠구나.”

“어머니……?”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나는 이 시간부터 네 어머니가 아니다.”

“…….”

할머니의 얼굴에서 분노와 실망감, 체념 같은 감정들이 느껴졌다. 그녀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지시를 내렸다.

“경들은 레고트와 멜비나를 데려가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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