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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트 백부를 쳐 낼 확실한 증거물을 획득한 이상,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백작가의 다음번 정기 업무 회의가 열릴 때,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백부가 저지른 죄를 공개적으로 폭로하는 것.
이를 위해 레고트와 멜비나 백작 부부를 수도로 부르기도 했다.
‘황가에서 비공식적으로 발렌티스 백작을 찾았다.’라는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달해서였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황가를 사칭한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었다.
한때 나에게서 백부의 악행을 전해 들은 니나렛이, 발렌티스 백작을 만나 보고 싶다고 비꼬듯이 이야기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로, 내가 아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지.’
그저 말장난이나 다름없는 속임수일 뿐.
하지만 백부는 ‘황가’를 ‘황제 폐하’로 알아서 착각하고는 날짜에 맞춰 수도로 돌아가겠다는 전언을 보내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가주 대리를 맡은 라일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물밑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다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 가지 있다면.
‘할머니…….’
나는 발렌티스 대부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인이 백부를 감쌀 것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백부가 저지른 잘못은, 감싸 줄 수 있는 선을 한참은 넘은 데다 나라는 피해자까지 존재하니까.
그저, 아들이 친형제를 죽였고 심지어 친모인 본인까지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부인이 받을 충격이 걱정되어서였다.
‘…놀라서 쓰러지실 수도 있어. 어쩌면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가족에게 칼을 겨눈다며, 나를 원망하실 수도 있고.’
솔직히 말해서, 이런 소식을 내 입으로 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부에게 죄를 묻겠다는 내 계획이 바뀔 일은 절대 없었고, 발렌티스 대부인은 가문의 어른이자 나를 아껴 주는 할머니였다.
일이 벌어진 뒤에 타인의 입을 통해 소식을 전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내가 직접 말하는 것이 할머니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대부인의 저택으로 향했다.
만약, 그녀가 나를 원망한다면 그것까지 감당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을 한 채였다.
“네리아, 우리 아가! 어서 오렴!”
이제는 내 집처럼 익숙해진 발렌티스 대부인의 저택.
방문하겠다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간 것이었건만, 대부인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 온 것처럼 나를 따뜻하게 반겨 주었다.
“…할머니, 갑작스럽지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러니? 계속 밖에 서 있지만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오렴!”
“네…….”
대부인이 손을 내밀어 나를 저택 안으로 이끌었다. 나는 불편한 기분을 쓴웃음으로 감추며, 그녀가 안내해 주는 응접실로 향했다.
“네리아의 차를 마실 수 있다니.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행운이야!”
“대단한 건 아닌걸요.”
늘 그렇듯, 이곳에서 차를 끓이는 역할은 내가 맡게 되었다. 나는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대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할머니, 창문 밑에 있는 화분은 뭐예요? 새로 보는 것 같아서요.”
“창문 밑의 화분?”
단순한 잡담 같지만, 사실은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
나는 대부인이 뒤로 고개를 돌린 사이에 드레스 소매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재빠르게 그녀의 찻잔 안에 부었다.
세사르에게 받은 신경 안정제로, 이야기를 들은 대부인이 놀랄 것을 대비하여 가져온 것이었다.
“얼마 전에 하녀가 가져온 것이란다. 꽃 색깔이 예쁘지?”
“네, 응접실이랑 잘 어울려요. 여기, 드세요. 할머니.”
“고맙구나.”
다행히 대부인에게 들키지 않고 약을 넣는 것에 성공했다.
그녀는 차 맛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잠깐 갸웃거리기는 했으나, 아무런 의심 없이 차를 홀짝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아가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지?”
“네, 할머니.”
이제 대부인이 신경 안정제도 먹었으니, 슬슬 백부에 관한 말을 꺼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게…….”
하지만 결심과는 다르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아들 부부가 죽었다며 오랜 시간을 고통받은 분이 아닌가.
손에서 땀이 흘렀다.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을 때였다.
“아가는 레고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거겠지?”
“…할머니?”
대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순간, 놀란 나머지 몸을 얼음처럼 굳히고 말았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대부인은 이미, 백부가 내 부모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며칠 전에 뉘른 경에게 이야기를 전부 들었단다. 나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면서 말이지.”
“…뉘른 경이요?”
이 인간이?
“그래. 레고트가 벌을 받게 되면, 다음번 가주는 네리아가 될 텐데, 너는 아직 미성년자라서 당장 작위를 받지 못하니 나에게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더구나.”
“…….”
물론, 그런 문제가 있긴 했다. 그의 말처럼, 대부인이 내 후견인이 되어 준다면 가장 쉽고 깔끔하게 해결될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복잡해도 다른 해결 방법이 존재하는데, 대부인이 받을 충격을 고려하지도 않았다니!
“아가, 그런 표정 짓지 말렴. 나는 괜찮단다. 어차피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될 일이었잖니?”
“…정말 괜찮으세요?”
“그래. 그 말을 들었는데도 오히려 이성적일 수 있었단다. 아마도, 나보다 더 많이 상처받았을 아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자식이 관련된 일이다. 정말 괜찮았을 리 없다. 대부인은 그저, 내가 그녀로 인해 마음 쓸 일이 없도록 나를 배려해 준 것이었다.
“아가, 이쪽으로 오렴.”
대부인이 나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아가는 괜찮은 거니?”
“…네, 저는 괜찮아요.”
“그렇구나. 많이 놀라고 네 백부가 원망스럽기도 했을 텐데, 아가는 오히려 이 할미의 마음을 먼저 걱정해주었구나. 착하기도 해라.”
대부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제 전부 괜찮다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마치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 같은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건, 무척이나 낯선 감각이기도 했다. 이 세계에 온 이후부터 나에게는 보호자라는 존재가 없었으니까.
가족의 울타리가 없어진 장소에서 나는 나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사실은 이곳에도 남아 있는 가족이 있었다. 하나뿐인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를 아끼고 나를 사랑해 주고 있었다.
툭- 손등으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었다.
“마음껏 울려무나.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말이야.”
할머니는 마르고 주름진 손으로 내 눈물을 몇 번이나 닦아 주며, 미소를 지었다.
“레고트를 감쌀 생각은 없단다. 나는 이미 한 번 레고트의 편을 들어 준 적이 있었던 데다, 가족에게는 공정해야 하니까.”
대부인이 말한 ‘한 번’은 아마도, 백부가 나에게 사생아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일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연례 회의 때는 그냥 그렇게 지나갔건만, 아직까지 신경 쓰고 계셨을 줄이야.
대부인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아가. 눈치 보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너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단다.”
“…네, 할머니.”
“그리고 네 후견인이 되어 달라는 뉘른 경의 부탁에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단다. 네리아.”
“네.”
“카터는 좋은 가주였어. 너도 분명 네 아버지를 닮아 좋은 가주가 될 수 있을 거야. 발렌티스 가문을 잘 이끌어 주렴.”
“네, 최선을 다할게요.”
나는 대부인에게 그렇게 약속하며 눈을 감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이 따뜻했다.
***
발렌티스 백작가의 정기 회의는 각 부서의 업무 성과를 보고하거나 각종 이슈와 주요 사안을 공유하는 등, 주로 공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였다.
그러나 오늘.
발렌티스 저택 회의장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다르게 몹시도 어수선하고도 이질적이었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회의가 시작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라면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법한 인물들이 이곳에 자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저기… 할머니? 할머니께서 회의실까지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백작가의 후계자이자 가주 대리를 맡은 라일라가, 테이블 구석에 앉은 발렌티스 대부인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부인은, 라일라의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하녀가 가져다준 따뜻한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님? 저희는 대체 어떠한 이유로 부르신 건지요?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니 대체……?”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멜비나 백작 부인 역시, 대부인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레고트와 멜비나.
그들은 레고트의 건강 회복을 위해 북부의 별장으로 휴양을 떠났으나, 황제 폐하가 발렌티스 백작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하게 수도로 돌아온 차였다.
그런데 정작, 수도 저택에 도착하고 보니 백작가에서는 그런 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착오일 리가 있나! 대체 어떤 미친 인간이 간도 크게 황제 폐하를 사칭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건가?’
아직 레고트의 실어증이 회복된 상태도 아니었다.
착오든 뭐든, 가주 부부에게 감히 헛걸음을 시킨 자를 색출하여 벌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통도 없이 갑작스레 수도 저택에 도착한 대부인으로 인해 색출 작업을 잠시 미루어야 했다.
게다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레고트와 멜비나 두 사람 모두 오늘 회의에 반드시 참석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까지.
손윗사람인 대부인의 지시인 데다, 회의에 가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따랐다.
그러나 대부인은 싸늘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입을 닫고만 있었기에, 레고트와 멜비나는 도저히 그녀가 그들을 이곳까지 부른 목적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자연히 계획되어 있던 회의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고, 멜비나가 레고트를 대신하여 대부인에게 다시 한번 질문하려던 때였다.
“어머님, 다들 바쁜 사람입니다. 그렇게 계시지만 말고 말씀을-”
“제가 부탁드렸어요.”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금발과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등장했다.
네리아 발렌티스였다.
레고트의 직계 일가는 얼굴을 찌푸리며, 마치 불청객을 보는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리아? 네가 왜 여길 들어와?”
“대부인께서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요.”
멜비나의 가시 돋친 질문에, 네리아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늦었지만, 8년 전에 백부님이 저지른 죄를 고발하려고 하거든요.”
그러나 웃고 있는 표정과 달리, 네리아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발렌티스의 가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