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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가신을 본보기로 면직 처리하십시오. 가문에서 해고하여 아예 내보내는 것이지요.”
“네?”
라일라가 로이엔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는, 잘못 들었다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해고라니? 그 말은 즉.
“제 손으로 발렌티스 백작가의 가신을 내치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후계자이자 가주 대리로서 권력과 가신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라일라 님이다.’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지요.”
“…….”
평온한 어조로 대답하는 로이엔을 보며, 라일라는 아무런 대답 없이 눈을 찌푸렸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그녀는 백작가의 가신들이 네리아보다 후계자인 자신을 더 따르게 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민의 해결책이란 게 고작, 본보기랍시고 강제로 가신을 쫓아내서 자신의 권력을 사람들 앞에 전시하는 거라고?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가신들이 저를 따르기는커녕, 저에게 반발심만 가지게 될 텐데요?”
라일라에게서 또다시 질문이 흘러나왔다. 타당한 의문이었다. 해결책치고는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그걸로 당장에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후계자가 되자마자 폭거를 저질렀다는 허물이 될 뿐이다.
더욱이 라일라는 정식 가주가 아니라 가주 대리일 뿐이지 않은가.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그렇게 큰일을 벌일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생각이 짧은 레비나 할 법한 짓이었다.
“게다가 아무런 명분도 없이 가신들을 내쫓으라니요? 그건 저에게 성과가 되는 게 아니라 실책이 될 뿐이에요. 그런 게 조언이라니, 실망스럽네요, 로이엔 경.”
“아뇨, 라일라 님에게 확실한 성과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싸늘한 힐책에도 로이엔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죄 없는 가신을 쫓아내는 게 아니라, 발렌티스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높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가신을 과감하게 해고하는 것이니까요.”
“네……?”
라일라의 눈동자가 또다시 크게 뜨여졌다.
무능한데 높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가신이라니. 로이엔은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정도는 가문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던 그녀도 알았다.
“…설마 뉘른 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로이엔에게서는 대답이 없었으나, 긍정의 표현임이 확실했다. 조금 뒤, 그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가신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무척이나 나쁜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런 자를 가문에서 내보낸다? 라일라 님의 결단력을 보여 주는 것과 동시에, 그 일을 계기로 다른 가신들에게도 지지와 환영을 받으실 수 있게 될 겁니다.”
“…….”
이번에는 라일라도 반박하지 않았다. 로이엔이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맞는 말이야. 그런데 뉘른 경이라니…….’
전 가주였던 카터 숙부가 죽은 후, 가장 먼저 레고트의 편에 붙어 그가 가주로서 자리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다.
‘아버지께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백작가의 요직을 꿰차는 건 물론이고, 가문 회의의 의장까지 되었지만…….’
그러나 그에 비해 업무적인 실력은 부족했는데, 라일라도 식사 자리에서 종종 부친이 뉘른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사람, 충성스러운 건 좋은데 정작 실무 능력은 썩……. 협상을 하러 내보냈더니, 오히려 우리 쪽에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지를 않나.’
‘아버지, 그런 사람을 계속 옆에 둘 필요가 있나요?’
‘…….’
레고트는 라일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의리 때문에 뉘른 경을 내칠 수 없었던 거겠지.’
라일라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부친이 부재중인 지금이 오히려 뉘른 경을 치워 버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다르게 라일라는 그에게 지켜야 할 의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로이엔의 말처럼, 무능한 가신을 쳐 내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도 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정말로 부친과 상의도 없이 그런 일을 독단적으로 벌여도 되는 걸까?
게다가 가문에 오래 몸담은 가신을 함부로 건든다는 사실에 솔직히 심리적 거부감이 크기도 했다.
“어쨌거나 결정은 라일라 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문득 앞에서 들려온 로이엔의 목소리에 그녀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저는 후계자이신 라일라 님을 위해서 이러한 방법도 있다고 의견을 낸 것뿐이니까요.”
“그건, 꼭 저를 위한 의견만은 아니지 않나요?”
라일라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말이야 후계자를 위한 조언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로이엔의 진의를 간파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뉘른 경이 실각한다면 그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공석이 될 테니, 로이엔은 그 위치를 노린 거겠지.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목적이 훤하게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을 요령껏 이용할 수도 있는 거니까.
“아무튼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그 일은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할게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라일라 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일라가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로이엔은 집무실을 떠나기 직전, 고개를 돌려 힐끗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로이엔의 조언에 관한 것은 잊은 채 책을 읽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뭐, 당연하지만 이 정도의 짧은 설득만으로 라일라가 뉘른을 버릴 리는 없는 건가.
그렇다면야, 다음으로 찾아갈 곳은 정해져 있다.
로이엔이 그렇게 생각하며,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뉘른 경이 자주 찾는 저택의 야외 휴게실이었다.
뉘른은 일하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길기로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로이엔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찾던 사람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로이엔 경이 아니십니까?”
“뉘른 경?”
라일라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상이, 웃는 얼굴을 한 채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우연히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라일라 님의 후계자 교육은 잘되어 가고 있으십니까?”
평범한 안부 인사 같지만, 견제가 묻어 있는 질문이었다.
로이엔이 레고트 가주의 신임을 받게 되었을 때부터, 뉘른은 제 위치를 빼앗기기라도 할까 은근히 경계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라일라의 교육 담당자로 지정되지 못한 것에 대놓고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수업을 빌미로 차기 가주와 친분을 쌓거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그러한 고로, 로이엔이 뉘른에게 해 줄 이야기는 특별한 게 없었다. 그저, 라일라와의 친분을 과장해서 언급하면 될 뿐이었다.
“예, 물론 잘되어 가고 있습니다. 라일라 님께서 워낙 영특한 분이시다 보니, 제 가르침을 빠르게 흡수하시더군요.”
“…그렇습니까? 원래 업무와 병행하느라 힘들거나 부담이 되지는 않으십니까? 경이 힘들다면 도와 드릴 용의도 있는데 말이지요.”
“아닙니다. 힘들 리가요. 차기 가주가 되실 분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서 영광스러울 따름인데요. 저번에는 저를 가문 회의의 의장으로 선임해도 괜찮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로이엔이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말실수를 했다는 듯,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런, 현재 의장이신 뉘른 경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군요. 그렇지만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아직 미성년인 분께서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이니까요.”
“…예, 물론입니다. 인사치레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까. 저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뉘른이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로이엔이 내뱉은 이야기를 무척이나 의식한 듯 그의 양쪽 볼이 어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로이엔이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떠오르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감췄다.
***
최근, 라일라는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로 인해 예정에도 없던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었다.
“라일라 님, 일 처리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라일라 님께서 아직 나이가 어리서 잘 모르시나 본데…….”
“이렇게 감정적으로 결정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가주 대리로서 이성적인 사고를 거치셔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