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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버지는 저를 가족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으로 길러 내셨잖아요. 레비랑은 다르게 말이에요. 딸인 제가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백부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
눈치 없는 척, 백부가 제일 싫어하는 아버지를 두 번이나 해맑게 언급했다.
그러자 레고트 백부는 무언가 할 말이 넘쳐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지금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백부는 혼자서 화를 이기지 못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마차 안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닌데.’
나는 쿡쿡 웃음을 내뱉으며,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마차와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멜비나 모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은 몹시도 심각해 보였는데, 얼마나 대화에 깊이 빠져 있는지 내가 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어머니, 저 정말 괜찮을까요?”
“그럼. 뉘른 경과 로이엔 경이 널 도와줄 거란다. 그러니 부담 가질 것도 없어. 네 아버지가 별장에서 안정을 좀 찾게 되면, 나는 먼저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렴.”
“…네, 어머니.”
건강이 나빠진 가주가 혼자서 요양을 떠난다면 사람들이 보기에 모양새가 좋지 않다.
그렇기에 백작 부인은 외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백작의 휴양 길에 동행하면서도, 수도에 혼자 남게 되는 딸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 저번처럼 백작 부인이 돌아오기도 전에 일이 터져 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렇게 확신하며 어딘가를 향해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백부 일가가 아직도 그들의 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로이엔 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
레비에게 일리안 백작 부인을 만나라고 조언해 준 사람이 바로 로이엔 경이었다.
그러나 바보 레비는 그녀와의 만남을 일리안 백작에게 발각당한 것이 불운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백부 일가나 가신들이나 일부러 언급을 삼갔기에, 그 사건에서 로이엔 경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로이엔 경이 사실은 내 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았고, 아직도 백부네 사람인 것처럼 위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로이엔 경의 처세술이 훌륭한 게 제일 유효하겠지만.’
그러한 고로, 오늘도 로이엔 경을 만나는 장소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경.”
“오랜만입니다, 네리아 님.”
인적이 드문 저택의 자료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자료실의 입구에서는 듀이가 만약을 위해 문밖의 상황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채였다.
“듣기로는 라일라의 후계자 교육 담당자가 되셨다면서요?”
“예. 네리아 님과 네리아 님의 추종자인 베른 경을 꾸준하게 비방하고 다녔더니, 가주님께서 좋은 평가를 해 주신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잘된 일이네요.”
나는 웃음을 삼키고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 경께서 해 주실 일이 있어요. 라일라와 뉘른 경을 이간질하는 거예요.”
어제, 가문 회의에서 라일라를 새로운 후계자로 소개했던 가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뉘른 경이라고 하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곧바로 레고트 백부에게 붙어 그의 오른팔이 된 자로서, 명실상부한 백부의 최측근이었다.
‘가문 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치고는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
하지만 백부의 바로 옆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뉘른 경은 백부의 치명적인 약점을 손에 쥐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경, 차기 가주인 라일라가 뉘른 경을 버리게 만들어 주세요.”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뉘른 경이 분명 나를 찾아오게 될 테니까.
나와 손을 잡기 위한 대가로, 가주의 약점을 손에 들고서는.
‘…잘하면, 이걸로 레고트 백부를 완전히 보내 버릴 수도 있어.’
백작 부부가 수도를 비우고 라일라가 혼자 남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알겠습니다.”
다른 설명을 붙이지도 않았건만, 유능한 로이엔 경은 내 말을 전부 알아듣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육 담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교육생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니까요. 특별히 불가능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부탁드리겠어요, 경.”
믿음직스러운 대답이었다. 나는 로이엔 경과 시선을 교환하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
라일라 발렌티스는, 제 아버지의 공간인 가주 집무실에 앉아서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줄은 모른다고들 하지만…….’
장래에는 다리스 제국의 황태제비가 될 거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후보 자격을 잃었고, 요양을 다녀오니 갑자기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말았다.
라일라로서는 제대로 따라가기도 벅찬 급격한 변화였다.
“…그리고 레비, 이 머저리가!”
그녀의 오라비가 답도 없이 한심한 인간인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멍청이가 사고를 쳐도 그런 대형 사고를 쳐?
“네리아 발렌티스, 너도!”
친척인 레비를 감옥에 밀어 넣으면서도,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이 잘난 척 뻔뻔하게만 굴다니.
애초에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네리아, 그 애 때문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너만 없었어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도 라일라가 괴성을 지르거나 집기를 집어 던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미래의 황태제비로서 익힌 예법과 몸가짐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가주가 될 생각도 전혀 없었단 말이야!”
만약 아버지가 그녀에게 그런 권유를 했더라도, 라일라는 레비를 위해 정중하게 거절했을 터였다.
목표를 뺏긴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는 라일라가 그보다 더 먼저 겪어 봤으니까.
“요양 같은 거 가지 말걸. 아니, 애초에 짜증 나는 네리아 따위랑 내기 자체를 하지 말걸!”
네리아와 엮여서 좋은 일이 없었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그랬기에 라일라가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자리를 잡는 일이었다.
어차피 선택권도 없었다. 백작 부부에게 레비 외에 남은 자식은 그녀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문득, 라일라의 머릿속에 가문 회의에서 목격했던 일이 떠올랐다.
‘네리아 님! 이야기 들었습니다. 가주님의 목숨을 구하셨다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날의 주인공은 라일라였는데, 가신들이 주목하고 칭찬하는 사람은 그녀가 아닌 네리아였다.
…꼭, 가문의 주인이 될 라일라보다 네리아를 더 따르는 것처럼.
“죄다 마음에 안 들어. 전부 다!”
하기야, 네리아는 오랜 시간을 평민으로 지내면서 비굴한 습성이 몸에 밴 건지, 가문의 가신들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이사벨라 님의 도자기 액세서리를 선물로 돌려 친분을 쌓는다든가, 가신의 자제를 황녀님의 교사로 넣는다든가.
‘그런 짓을 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겠지.’
하지만 라일라는 아니었다.
그녀는 미래의 황후가 되어, 제국의 대귀족들마저도 발밑에 둘 고귀한 몸이었다.
그러니 작위도 없는 가신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몇몇 사람들에게는 심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어떻게 가신들이 나를 따르게 하지?’
라일라가 또다시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야 어쨌거나 앞으로는 그래선 안 된다. 가주로서 백작가를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니까.
라일라가 입을 다물고는 두꺼운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발렌티스의 가주가 해야 할 업무들이 자세하게 정리된 책자로, 며칠째 정독하고 있는 책이었다.
‘…어차피 공부해야 할 거, 네리아를 쫓아낼 좋은 방법이 없는지나 같이 찾아봐야겠어.’
라일라가 그렇게 생각하며 책장을 한 장씩 천천히 넘기던 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누구시죠?”
“재무실의 로이엔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로이엔 경이라면, 그녀의 후계자 교육 담당자로서 부모님이 직접 정해 준 인물이었다.
‘업무적으로도 유능한 데다, 아버지께도 충성스러운 가신이지. 수업도 잘 가르치고.’
게다가 로이엔 경에게는 이미 세 번이나 수업을 들은 바가 있기에, 라일라는 모처럼 반가워진 기분으로 그를 집무실로 들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과거에 로이엔의 외동딸인 셜리에게 얼굴의 반점이 징그럽다며 폭언을 내뱉거나 본관에서 쫓아냈던 일 따위는 기억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네, 들어오세요.”
“라일라 님은 볼 때마다 책을 읽고 계시는군요. 갑작스럽게 맡은 일인데도 회피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훌륭하십니다.”
“제가 맡은 일인 이상, 제대로 해내야 하니까요. 그런데 어쩐 일이신가요? 오늘 수업 일정은 저녁 시간 이후가 아니었나요?”
“지금은 이번 달 재무 결산 서류에 확인을 받으러 왔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라일라가 그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고 가문의 인장을 찍었다.
가주 대리로서의 역할로, 어차피 서류는 봐도 알지 못하니 실무는 가신들에게 맡기고 확인만 해 주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용건이 전부 끝났을 무렵이었다.
라일라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로이엔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라일라 님, 그런데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그렇게 보였나요?”
“예. 어떤 문제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문제라면 최대한 돕겠습니다.”
“그건…….”
고민이라면 있다. 다만, 입 밖에 내기가 부끄러울 뿐.
하지만 라일라가 겪어 본 바에 따르면, 로이엔 경은 신뢰할 수 있는 상대였다.
상담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는 입을 열었다.
“…몇몇 가신들 때문이에요. 저보다는 후계자도 뭣도 아닌 네리아를 더 따르는 것 같아서요.”
특히 베른 경이었나. 네리아에 관한 칭찬만을 퍼트리는 모습이 눈에 굉장히 거슬리는 자였다.
“그런 게 고민이셨습니까?”
하지만 로이엔은, 라일라의 고민이 걱정거리조차 되지 않는다는 식의 대답을 내놓았다.
“네?”
“어차피 그런 반응쯤이야, 라일라 님께서 가주 대리로서 성과를 보여 주신다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행동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아는 게 부족한데, 당장 성과를 보이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그러시다면 한 가지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 있는데 말이지요.”
로이엔의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말로 단순한 조언일 뿐, 다른 의도 따위는 없다는 담백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