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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92)화 (92/172)



<92>

며칠 뒤, 황궁 내부에 위치한 법정에서 레비 발렌티스의 처벌을 결정하는 정식 재판이 열렸다.

레비는 재판정의 피고석에 앉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참관인석에는 라일라와 멜비나 백작 부인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라일라와 백작 부인. 그녀들은 라일라가 황태제비 후보 자리를 박탈당한 후 수도 밖으로 요양을 떠난 바 있었다.

하지만 레비가 제 부친에게 독살을 시도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서, 가속 마법이 걸린 마차까지 이용하여 긴급하게 수도로 돌아온 참이었다.

나는 참관인석의 동떨어진 자리에 홀로 앉아, 그들의 모습을 유쾌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라일라가 요양을 떠나기 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던가.

‘아버지도 조만간 정계에 복귀하실 거니까, 네 마음대로는 안 될 거야. 돌아와서 보자.’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목격한 꼴이란 게, 레비가 아버지를 죽이려고 해 죄인이 된 모습이라니.

참 안타깝기도 해라. 비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엄숙한 법정의 분위기를 생각하여 꾹 참았다.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어느새, 가장 상석에 앉은 재판장의 입에서 판결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독살 혐의의 시시비비는 사건 현장이었던 발렌티스 저택에서 전부 가려진 후였고, 증거물이나 증인도 확실했다.

그런 만큼,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은 것 같았다.

“직계 존속 살해 미수죄, 거기에 그 죄를 사촌 동생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 행위까지 고려하여 레비 발렌티스에게 30년의 감옥형을 선고합니다.”

“맙소사! 안 돼-!”

30년이라. 이제 레비는 끝났군.

레고트 백부의 실각부터 후계자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까지. 그들은 차근차근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멜비나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소했다.

“재판장님-! 제발!”

“발렌티스 백작 부인?”

“30년이라니 너무 가혹해요! 우리 레비는 충분히 반성하고 있으니,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선처라.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군요. 네리아 발렌티스 양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판장의 질문이 나에게 향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냐니. 나에게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만큼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나는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제국법과 재판장님의 판결을 존중하겠습니다. 레비가 합당한 처벌을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거든요.”

“네리아! 이 괘씸한 것! 가족이면서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만 레비는 저에게 사과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걸요. 만약 제가 레비의 계획을 몰랐다면, 이곳에 백부님을 죽인 죄인으로 자리한 사람은 제가 됐을 텐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레비를 바라보았다.

“레비, 사과할래? 지금이라도 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재판장님께 널 선처해 달라고 탄원을 올릴 수도 있어.”

“…….”

사과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한 질문이었는데, 역시나 레비는 입을 다문 채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뭐, 당연한 반응이지.

나는 그에게서 미련 없이 시선을 거두고는 재판장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고 하네요. 재판장님, 제 의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알겠습니다. 재판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의 선언이 있자, 어디선가 황궁의 기사들이 나타나 레비를 연행하기 시작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내가 이곳에 떨어진 첫날에 하인들에게 붙잡혀 별관으로 쫓겨난 기억이 떠올라 감회가 새로워졌다.

“레비! 황제 폐하의 특별사면 제도도 있으니까, 내가 힘을 써 보도록 할게.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참으렴! 알겠지?”

끌려 나가는 레비를 향해 외치는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애절했다. 패륜아라도 자식은 자식이라는 건가? 참으로 눈물겨운 모정이었다.

‘과연 특별사면 제도가 있을 때까지 저 인간들이 멀쩡할지는 모르겠지만.’

꼴좋네. 나는 레비가 사라진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후, 법정을 벗어나려고 했다.

“네리아 발렌티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외침이 있었기에 가던 길을 멈추고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멜비나 백작 부인이 화를 주체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백모님?”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우리 레비가! 그리고 백작님이-!”

“왜 이러세요? 누가 들으면 제가 레비에게 나쁜 짓이라도 시킨 줄 알겠어요. 그리고 백부님은.”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가에 떠오르려는 비웃음을 숨겼다.

오늘 재판에 레고트 백부가 참관하지 않은 이유는 ‘레비를 용서하지 못해서’와 같은 심리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독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던 날.

자히르 독을 먹고 난 부작용에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기까지.

레고트 백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실어증이 생겨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데다, 양쪽 팔에 미세한 마비가 온 것이었다.

그래도 정신적인 충격으로 발병한 문제인 만큼 회복할 여지는 충분히 있었고, 주치의인 휴고는 강력하게 휴양을 권유했다.

사건이 벌어졌던 곳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회복과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백모님. 그런 일이 생겨 진심으로 안타깝지만, 백부님은 금방 나으실 수 있을 거예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구나!”

“그보다, 자히르 독을 먹어서 죽을 뻔한 분의 목숨을 제가 구해 드린 거 아닌가요?”

“…….”

“고맙다는 말 정도는 들을 줄 알았는데요. 그런데 절 죄인 취급이나 하신다니. 정말 너무하시네요.”

“어머니, 저택으로 돌아가요.”

백작 부인은 할 말이 없었는지 나를 노려보기만 했고, 어느새 라일라가 다가와서는 멜비나의 팔짱을 붙잡고 그녀를 데려갔다.

라일라는 나를 일부러 무시하기라도 하듯,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였다.

“저택에서 봐요!”

나는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에 잠겼다.

‘가주가 수도를 비운다, 라.’

레고트 백부가 휴양을 떠날 것이란 건, 거의 확실한 사실이었다.

건강 회복 문제도 있지만, 실어증이나 팔 마비 증상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다른 귀족들에게 약점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라도 수도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가주가 자리를 비운 만큼, 가문의 분위기도 크게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이건 내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모처럼 좋은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수는 없지.

나는 라일라와 멜비나 백작 부인이 법정을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그로부터 얼마 후, 발렌티스 가문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가주의 명령에 따라 연례 회의급으로 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는데, 이제는 백작가의 일원이 된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뭐, 오늘 회의의 목적이야 라일라를 새로운 후계자로 삼는다고 정식으로 발표하려는 거겠지.’

레비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후계자 자리를 계속 비워 둘 수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대회의장의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더니, 어디선가 나를 발견한 가신들 몇몇이 나에게로 모여들어 말을 걸었다.

“네리아 님! 이야기 들었습니다. 가주님의 목숨을 구하셨다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조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걸요.”

레비가 아무리 범죄자가 되었다고 해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가주의 친자를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기에 사람들의 칭찬은 내 행동에만 맞춰졌는데, 때마침 회의장 안으로 들어선 라일라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미세하게 눈을 찌푸렸다.

“…….”

내가 가신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상석에 착석했고, 조금 뒤에 시간이 되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가주님께서 전하는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은, 레고트 백부의 최측근이자 의장인 뉘른 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신분을 인정받은 연례 회의 때, 뉘른 경이 중간에 차를 찾은 덕분에 쉽게 회의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뉘른 경이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주께서는 레비 님을 대신하여 라일라 님을 발렌티스 백작가의 새로운 후계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역시나,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예상한 그 주제였다.

이미 진작부터 후계자 교체설이 가문 내에 퍼진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뉘른 경은, 백부가 휴양으로 수도 저택을 비운 사이에 라일라가 가주 대리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라는 소식도 함께 전달했다.

“라일라 발렌티스입니다.”

그렇게 정식 공표가 끝난 후에는, 회의장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라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신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발렌티스 가문의 차기 가주가 되어 가문을 훌륭히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라일라는 긴장한 것이 분명할 텐데도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회의장에 박수 소리가 들어섰다.

베른 경을 위시한 세력처럼, 라일라의 후계자 등극을 반기지 않는 사람도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가주나 후계자에게 확실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후계자를 정하는 권한은 가주에게 있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최소한 겉으로는 라일라를 환영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 역시도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 주었다.

머릿속으로는 후계자를 또다시 교체해야만 하는 그 결격사유를, 머지않아 내가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하면서였다.

***

그리고 회의가 끝난 다음 날.

레고트 백부와 멜비나 백작 부인이 휴양을 위해 온천이 있는 북부의 별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이번에도 그들을 배웅해 주기 위해, 시간에 맞춰 저택의 정문으로 향했다.

물론 진심으로 그들을 배웅한다기보다는, 친애하는 백부님의 속을 뒤집어 주기 위해서였다.

마차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멜비나 백작 부인과 라일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레고트 백부가 먼저 마차에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백부님.”

나는 그런 그에게로 다가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북부의 온천이 회복에 좋다고 들었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

“이번 일은 진심으로 유감이에요. 레비가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

“백부님도 자식 교육에 좀 더 신경 쓰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러니까… 저희 아버지처럼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자, 레고트 백부의 표정이 썩은 감자처럼 와락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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