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91)화 (91/172)



<91>

내가 듀이에게 지시했던 일은 간단했다. 바로 ‘내가 신호를 주면, 내 방으로 가서 기척을 감추고 숨어 있어라.’라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가져간 차를 마시고 레고트 백부가 쓰러진다고 해도, 그건 단순한 정황상의 증거일 뿐.

나를 독살범으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더욱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레비는 그걸 위해서 사람들 몰래 내 방에 독약을 숨겨 놓으려고 하겠지. 증거물로 쓰일 수 있도록.’

그랬기에 나는 며칠 동안 외부인이 내 침실에 침입할 수 없게끔 일부러 방을 비우지 않았다.

그렇다면 레비가 내 소지품 사이에 독약을 숨겨 놓을 기회는 단 한 번.

백부가 쓰러지고 저택이 혼란스러워져, 내 침실에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해졌을 때뿐이었다.

‘분명, 레비의 심부름을 받은 누군가가 증거물을 가지고 내 방으로 올 거야. 그러니까 듀이는 그때를 기다렸다가 현행범을 잡도록 해.’

‘알겠습니다, 네리아 님!’

당연하지만, 일을 꾸미는 상대가 ‘그’ 레비인 만큼, 내 예상이 벗어나는 일은 없었고 듀이가 실수를 저지르는 일도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현재.

듀이는 레비의 직속 하녀인 엠마와 증거물인 독약을 가지고서는 로비에 나타난 상태였다. 역시나 오늘도 믿음직스러운 기사님이었다.

“레비 도련님의 하녀가 네리아 님의 침실에 이것을 숨기려는 장면을 발견하고 잡아 왔습니다.”

“뭐, 뭐라고?”

듀이가 내뱉은 말에 레비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도, 도련님…….”

듀이에게 잡혀 있는 엠마 역시도, 얼굴이 새하얘진 상태로 몸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엠마가? 그렇다면 설마……?”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레비에게 쏠렸다.

이쯤 되면,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해도 사건의 대략적인 실마리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게 당연했다.

저택에 모인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며 웅성거리는 사이, 듀이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레비 도련님, 어째서 도련님의 하녀가 이런 수상한 물건을 들고 네리아 님의 침실에 있었던 겁니까?”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오히려 내가 네놈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어째서 내 하녀가 네리아의 방에 있었다는 말이지?”

역시나 처음은 발뺌인가. 레비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듀이에게 소리쳤다.

‘…그런데 듀이한테 네놈이라니.’

이제 정식으로 기사이자 준귀족이 된 듀이에게 내뱉는 폭언에 불쾌한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차피 레비는 오늘부로 끝난 인생. 일단은 참으며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보다 엠마가 네리아의 침실에 있었다는 것도 네놈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않으냐? 네 말이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

“그게 무슨! 억지이십니다!”

“오히려 너희야말로 내 아버지를 죽이고서는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엠마를 끌고 온 게 아니겠어? 엠마!”

“도, 도련님? 네?”

“혹시 저 평민 기사 놈이 네 손에 강제로 약병을 쥐여 주고 억지로 이곳까지 널 끌고 온 건 아니야?”

“아… 저는…….”

레비가 거짓말을 강요했으나, 엠마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레비의 애인 역할을 겸하기 위해 직속 하녀가 된 것이지, 사샤처럼 눈치가 빠른 부류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할지 몰랐겠지.

“그러니까… 저는…….”

“엠마.”

그랬기에 나는 엠마가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로 했다.

‘뭐, 어차피 슬슬 내가 나설 때도 된 것 같고.’

이때쯤이면 레고트 백부가 정신을 차릴 때도 된 것 같으니까.

“네리아 아가씨……?”

“잘 생각해서 제대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잘못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면 말이야.”

나는 무덤덤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엠마에게 충고를 건넸다.

아까까지 필사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던 것과는 아예 달라진 태도에, 레비가 흰 눈을 번뜩이며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네리아, 이게 갑자기 미쳤나? 누가 일어서도 된다고 했지? 다시 무릎 꿇고 앉지 못해?”

“그런 것보다, 아까부터 레비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네 입장을 생각하고-”

“넌 어째서 계속 백부님이 이미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야?”

“…뭐?”

“주치의인 휴고가 응접실로 바로 달려갔잖아. 응급처치를 잘하면 회복하실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그거야……!”

레비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벌컥-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사람 두 명이 로비로 나타났다. 주치의인 휴고와 그에게 부축을 받는 레고트 백부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아버지? 어떻게?”

창백해진 얼굴로 힘없이 걸어 나오는 백부를 보며, 레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어떻게?’라니. 사실상의 자백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레비의 얼빠진 얼굴을 바라보며 한심스럽게 혀를 찼다. 대체 어디까지 바보짓을 하려는 거야?

오죽 멍청했으면 그 레고트 백부가 둘째인 라일라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결정을 내렸겠는가.

“누가… 누가 나에게 감히 이런 짓을…….”

레고트 백부가 쉰 목소리로 무어라 입을 열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레비에게 다시 질문했다.

어차피 백부는 기력이 없어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레비,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어째서 백부님이 죽었다는 식으로 말을 했던 거야? 보다시피 멀쩡히 살아 있으신데 말이야.”

“그, 그건! 황궁의 검사관이 아버지의 찻잔에서 자히르 독이 발견되었다고 말했잖아? 자히르 독은 먹게 되면 즉사하는 극독이니까!”

“아니잖아?”

나는 레비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응접실에서, 백부님이 쓰러진 직후에도 단정 짓듯이 말했었잖아. 내가 백부님을 죽였다면서.”

“아! 그러고 보니, 저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옆에서 내 말에 동의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현장에 있었던 세베스 백작이었다.

“레비 영식이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리아 영애가 발렌티스 백작을 죽였다고요.”

“그렇지요? 백부님은 죽은 게 아니라 단순히 쓰러진 것뿐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나는 레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찻잔 안에 들어 있는 게 자히르 독인 줄 알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처음부터 백부님이 즉사했다고 확신했던 거였지?”

“…말장난 집어치워! 아니, 그보다 아버지는 자히르 독을 드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멀쩡하실 수가……?”

그 말에는 로비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조심스럽게 동의를 표시했다.

쓰러진 사람 옆에서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응접실로 들어간 사람은 주치의와 소수의 검사관뿐이었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은 백부가 자히르 독을 먹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내심 레고트 가주가 이미 사망했다고 여겼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건 차에 로렐 꽃이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나를 대신하여 질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황궁에서 파견을 나온 검사관이었다.

“독극물을 검출하는 작업을 우선했던 터라, 차의 내용물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저희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송구합니다.”

“로렐 꽃이라면… 독을 중화시켜 주는 효능이 있었지요?”

“그런데 차를 끓인 분은 네리아 아가씨이셨잖아요?”

“세상에! 아가씨께서 가주님의 목숨을 구하신 거야! 그런데 어떻게? 우연의 일치였던 걸까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에요.”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린 것을 느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부러 차에 로렐 꽃을 넣었어요. 저, 사실은 레비가 백부님을 독살하려고 계획했던 걸, 미리 알고 있었거든요.”

“뭐라고……? 이런 미친, 헛소리 마! 너 제정신이야? 미쳤어?”

내 입에서 흘러나온 충격적인 발언에, 레비가 격분한 상태로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찔리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겠지. 하지만 듀이가 중간에서 막아섰기에 레비는 나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끼칠 수 없었다.

“야!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줄 알기나 해? 입에서 터진 대로 내뱉으면 다인 줄 알아?”

“레비, 그러면 넌 자히르 독과는 연관된 적이 전혀 없다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더럽고 미천한 하녀였던 방계 따위가 대체 누구를 모함하는 거야!”

“그럼 뭘까, 이건.”

나는 드레스 안에서 종이를 꺼내, 레비를 비롯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펼쳐 들었다.

레비가 필립스 토르네와 독약을 거래하며 작성한 확인서로, 레오니트와 칼리의 정보상을 통해 어렵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에게는 나중에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해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레비를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연관된 적 없다며?”

“그, 그걸 네가 어떻게……!”

레비는 크게 경악하며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나는 그런 레비에게서 고개를 돌려,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가문의 후계자가 라일라로 바뀐다는 소문이 돌고 난 이후부터 레비의 행동이 이상해졌다든가, 부탁 같은 걸 할 사이가 아닌데도 레비가 오늘 나에게 차를 끓여 달라고 부탁한 게 수상했다.

그런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고, 내가 말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고트 백부의 경우, 친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멍하게 넋을 놓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몹시도 참담해 보였지만, 동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곳의 내 부모님도 친형에게 배신당하며 똑같은 기분을 느끼셨을 테니까.

“…해서 알게 되었어요. 레비가 가주가 되기 위해 백부님을 독살하고 그 죄를 저에게 뒤집어씌우려 할지도 모르겠다고요.”

“아……! 그래서 듀이 경이 엠마를 잡을 수 있었던 거네요.”

“그런데 알고 계셨다면,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을 했다면 믿었을까요?”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지적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후계자를 모함했다고 되레 제가 벌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오늘 독살 시도를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었어요. 오늘 일이 실패하면 레비는 성공할 때까지 또다시 똑같은 시도를 했을 테니까요.”

“…….”

“그래서 차에 로렐 꽃을 넣었어요. 레비의 계획은 밝히되, 백부님의 건강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이요. 자히르 독은 효과가 강한 극독이지만, 복용 전에 로렐 꽃과 섞이면 독성이 급격하게 약해지거든요. 그렇죠, 휴고 님?”

“예, 네리아 아가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후유증으로 며칠은 앓으시겠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회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확인 감사드려요. 어쨌거나 일을 크게 벌인 건 죄송해요. 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일만은 막고 싶었거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힐끗, 레고트 백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그의 눈빛에서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작게 조소하며, 이번에는 다시 엠마를 불렀다.

“엠마.”

“네, 네?”

“시킨 일을 했다고 자백하면 감옥형으로 끝나겠지만, 미수라도 평민이 귀족을 살해하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사형이야.”

“…….”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볼래?”

“…사, 사, 사, 살려 주세요! 저는 레비 도련님의 명령을 따른 죄밖에 없어요! 실은 처음부터 이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어요!”

“찻잔에 독약을 바른 것도 너야?”

“어, 어제 새벽에 몰래 주방으로 들어가서……. 하지만 그것도 레비 님이 명령하신 걸 따랐을 뿐이에요!”

나는 엠마가 실토하는 자백을 들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레비는 얼굴색이 흙빛이 된 채로 입을 열지도 못하고 있었다.

‘존속 살해는 미수라도 최소 감옥형이었던가?’

게다가 나한테 누명을 씌우려 한 죄목도 추가로 있지 않은가.

세베스 백작과 황궁의 검사관들이라는 외부 증인이 있는 이상, 가문 내에서 일부러 일을 축소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잘 가렴, 레비.’

드디어 한 명을 치우는군.

“어떻게… 어떻게 네가…….”

쉰 목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쿵-하는 소리가 났다. 레고트 백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