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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90)화 (90/172)



<90>

그날로부터 3일 뒤.

발렌티스 저택이 오랜만에 손님맞이로 시끄러워졌다.

하녀장의 지휘로 저택에 대청소가 이루어졌고, 요리장과 주방 소속의 고용인들은 저녁에 있을 만찬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냈다.

마치 황족이 찾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단한 정성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손님은 바로.

“오늘은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세베스 백작!”

“…발렌티스 백작, 너무 과한 환대가 아닙니까? 이렇게까지 하실 것은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보좌관인 세베스 백작을 맞이하는 것에 어떻게 소홀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레고트 백부의 눈물겨운 아부에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숨겨야 했다.

사실, 세베스 백작이 아무리 황제 폐하의 보좌관 중 한 명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로 정성을 들여 환대할 만한 귀빈까지는 아니었다.

단지, 그를 통해서 황제 폐하께 ‘정무 복귀 시기를 당겨 달라.’고 탄원을 전한다는 지극히 사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베스 백작에게 잘 보이면, 그가 좀 더 성의껏 폐하께 말씀을 전해 줄 수도 있으니까.

다양한 방법을 통해, 가능한 빠른 복귀를 노리고 있는 레고트 백부의 필사적인 노력 중 하나였다.

‘세베스 백작을 발렌티스 저택으로 초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생이 많았다지?’

능력이 없어 무능한 것과 별개로, 부지런한 건 솔직히 인정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비웃음을 삼켰다.

“일단은 응접실로 가시지요!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발렌티스 백작.”

두 사람이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였고, 가문의 후계자인 레비가 그 뒤를 따랐다.

나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응접실로 차를 가져가기 위해 몸을 돌려 주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을 걸어가던 중에 잠깐 발걸음을 멈춰, 로비 한쪽에 대기하며 서 있던 듀이에게 말없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듀이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미리 그에게 지시해 두었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나도 슬슬 시작해 볼까?’

주방 안으로 도착하자, 레비가 미리 하녀장에게 말을 해 두었는지, 조리대 위에 내가 사용할 차 도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찻잎을 꺼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레비가 세운 계획을 파악하는 것쯤이야 전혀 어렵지도 않았다. 워낙 단순한 인간이니까.

‘레고트 백부를 죽이고 가주 자리를 차지할 생각인 거겠지.’

최근, 레고트 백부가 가신들에게 후계자를 라일라로 바꾸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전했다고 했다.

그러니 이대로라면 동생에게 차기 가주 자리를 뺏길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고는 그런 계략을 꾸민 것이다.

남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니까.

‘이미 레고트 백부가 내 아버지에게 저질렀던 짓이잖아?’

그러니 딱히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저 닮은 부자 관계라는 생각만 들 뿐. 어차피 레비는 본성이 폭력적인 인간이기도 했다.

‘게다가, 백부에게 독을 먹인 범인으로 나를 지목할 생각이겠지?’

그걸 위해 레비는 세베스 백작의 핑계를 대어 가며, 나에게 차를 만들게 시킨 것이다.

‘그리고 독이 들어 있는 곳은 아마도, 백부가 사용할 찻잔이야.’

이런 식으로 손님이 방문했을 때, 가주가 사용하는 잔과 손님이 사용하는 잔은 구분이 되어 있었다.

이미 찻잔 안쪽에 독을 발라 놨겠지. 찻잎에 손을 썼다가는 세베스 백작에게까지 해가 갈 수도 있을 테니.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은-’

특별히 없다. 그저, 레비가 정성껏 준비한 일이 벌어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

다만 한 가지, 찻잎에 로렐 꽃을 섞어 넣었다. 로렐 꽃에는 독을 중화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백부님이 정말 이대로 죽어 버리면 아쉽잖아?’

편하게 가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 많은 사람이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를 담은 트레이를 들고서 응접실로 다시 이동했다.

“세베스 백작,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때의 일은-”

응접실 안에서는 대화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주로, 레고트 백부가 세베스 백작에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내용이었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네리아?”

그리고 나는 웃는 얼굴로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백부가 왜 네가 왔냐는 듯한 시선을 던지기에 대답하려는 찰나, 레비가 나보다 빠르게 입을 열었다.

“네리아가 자원했습니다. 자신이 차를 잘 끓이니, 세베스 백작님께 대접하고 싶다면서요. 기특하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나를 향해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를 담은 눈짓을 보냈다.

“뭐? 네리아가……?”

“오, 정말 차 맛이 훌륭합니다. 발렌티스 양에게는 이런 재주도 있었군요.”

“입맛에 맞으셔서 다행입니다! 제 조카도 가문을 위해 무언갈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내 등장을 반기지 않던 백부도, 세베스 백작이 차의 맛을 칭찬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응수했다.

“저도 조카가 만들어 주는 차를 종종 마시고는 했지요.”

그러고는 분위기를 좋게 만들 생각이었는지, 나와 친한 척 거짓말까지 하며 백부 역시도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나 싫어하는 내가 가져온 차였지만, 설마 안에 독이 섞였으리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레비가 나에게 했던 말처럼, 발렌티스 가문의 평판이 추락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내 명예가 떨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가문을 위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

게다가 언제나 먼저 일을 꾸미거나 함정을 만드는 사람은 그들이었지, 내가 아니기도 했으니까.

‘손님도 있는 장소에서 겁도 없이 이런 짓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꿀꺽꿀꺽. 말을 많이 하느라 목이 말랐던 건지, 백부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고요한 시선으로 레비를 지켜보았다. 레비는 아까보다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제 부친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일이 발생했다.

“커, 커억-!”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레고트 백부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테이블 위로 쓰러진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발렌티스 백작!”

“아버지!”

응접실 내부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백부님! 백부님, 괜찮으세요? 밖에 누구 없어? 의사를 데려와! 백부님이 쓰러지셨어!”

나는 놀란 척 필사적인 목소리로 외치면서도, 눈은 레비를 지켜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죄악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하지만 레비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분노한 표정을 가장하고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리아-! 네가 아버지를 죽였구나!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레비!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야!”

“네가 왜 차를 가져오겠다고 자원했나 싶었더니!”

때마침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바깥에 있던 고용인들이 들이닥쳤기에, 레비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네리아를 잡아! 저게 아버지를 죽였어!”

가주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에 발렌티스 저택이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레고트 발렌티스가 쓰러지고, 저택은 혼란에 휩싸였다.

발렌티스 가문의 주치의인 휴고가 곧장 응접실에서 레고트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가문의 기사들은 저택의 고용인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들을 순서대로 취조하여 이번 일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어수선하고 혼란한 상황을 틈타,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하녀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바로 레비의 직속 하녀인 엠마로, 레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목적지는 네리아의 침실.

레고트 가주를 죽인 증거품으로써, 자히르 독이 담긴 약병을 그녀의 방에 숨겨 두기 위해서였다.

원래라면 미리부터 약을 숨겨 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네리아나 사샤가 상주하거나, 나갈 때는 항상 문을 잠가 두었기에 엠마로서는 몰래 침입할 틈이 없었다.

그랬기에 어쩔 수 없이 지금을 노린 것이었다.

레고트 가주를 독살한 범인으로 여겨지는 용의자는 네리아였고, 그녀의 하녀인 사샤 역시도 반강제로 곧장 기사에게 끌려갔다.

이런 상황에서 문단속을 하고 갔을 리도 없으니, 지금이 기회였다.

‘사실은 이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하지만 직속 하녀로서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레비 도련님이 가주가 되면 나를 정부로 삼아서 편하게 지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으니까.’

엠마는 목적지에 도착한 뒤, 주변을 살피며 네리아의 침실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밀어 안쪽을 재빠르게 살펴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방 안에 들어 있는 사람 또한 없는 것 같았다.

‘이것만 빨리 놔두고 나오자.’

엠마는 고개를 돌려 약병을 숨길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아무래도 서랍 같은 장소가 좋겠지?

엠마가 긴장감을 느끼며 책상의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턱-

뒤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챈 누군가가 있었다.

***

레비는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 이번 일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에 기분이 심란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된 일, 처음 예정대로 일을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택의 로비에는 이번 사건의 증인이자 목격자로서 세베스 백작이 서 있었고, 바닥에는 네리아가 용의자로서 무릎이 꿇려 있었다.

“레비 발렌티스 님.”

그때, 황궁에 급하게 파견을 요청했던 검사관이 나타났다.

“레고트 님이 사용한 찻잔에서 자히르 독이 발견되었습니다. 다른 분의 차에는 독이 없는 걸로 보아, 아마도 찻잔 안에 독이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레비가 엠마를 통해 새벽에 몰래 시킨 일이니까.

하지만 그는 크게 분노한 척, 무릎을 꿇고 있는 네리아에게 소리쳤다.

“네가 차를 가져오면서 아버지의 찻잔에 독을 넣었구나!”

“내가 그러지 않았어! 그리고 백부님이 사용하시는 찻잔은 정해져 있었잖아? 다른 사람이 찻잔에 독을 넣어 놨을 수도 있어!”

네리아는 필사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비는 그녀를 외면하고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그건 두고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다들 네리아의 방을 수색하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레비 님.”

기사들은 가문의 아가씨가 사용하는 침실을 뒤진다는 것에 찜찜해 하면서도, 착실하게 레비의 명령을 따랐다.

‘금방 끝나겠군.’

레비는 저택의 로비에 선 채로 수색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러기가 얼마나 지났을까, 금방 찾아낼 줄 알았는데 기사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엠마는 도대체 얼마나 구석진 곳에 약을 숨긴 거지?’

마침 레비가 인상을 구겼을 무렵, 네리아의 침실로 갔던 기사들이 다시 로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답은 레비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레비 님, 네리아 님의 방에서는 아무런 수상한 물품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다시 제대로 수색을-”

“레비 도련님. 혹시 이것을 찾고 계셨던 겁니까?”

그때였다. 레비의 눈앞으로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네리아의 기사인 듀이가, 한 손에는 약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레비의 하녀인 엠마를 붙잡고 있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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