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어느 느지막한 오후.
레비 발렌티스가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한때는 레비와 친한 친구 사이였던 필립스 토르네가 직접 운영하는 사업장으로써, 각종 약품을 판매하는 장소였다.
필립스는 그곳에서 불법 약물을 취급하여 큰돈을 벌고 있기도 했다. 예를 들면 독약 같은.
‘…그 필립스 놈의 재수 없는 면상을 더는 보고 싶지 않지만.’
레비가 가게 입구에 선 채로 문득 미간을 와락 구겼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필립스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레비가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문을 노려보다가, 조금 뒤 문을 열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발렌티스 님! 주인님은 안쪽에 계십니다. 오늘도 안쪽으로 모실까요?”
“그래.”
방문하는 것이 굳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가게의 점원은 레비를 자연스럽게 필립스가 있는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필립스는 레비의 얼굴을 발견하자마자 의외라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레비?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던가? 네놈과 엮인 채무는 전부 정리한 걸로 기억하는데.”
“물론 못 올 데는 아니지! 다만 놀라워서 말이야. 나에게 돈을 돌려주러 왔을 때였지? 앞으로 20년은 내 얼굴을 안 보겠다는 기세로 가게를 떠나더니, 이렇게나 빨리 만나게 될 줄이야.”
“…….”
레비는 그를 조롱하듯 큭큭거리는 필립스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 자식이?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레비는 참았다. 오늘은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온 것이니까.
일리안 백작 부인과의 사건에 이어 두 번이나 경솔하게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재밌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자히르 독이 필요해. 구할 수 있어? 최대한 빠르게.”
“뭐? 자히르 독?”
필립스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뜨였다.
‘자히르 독’이란 일정량 이상을 섭취할 시, 복용자를 즉사에 가까운 속도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극독이다.
하지만 그 위험성으로 인해 제국에서는 유통이 불법으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그랬기에 레비가 필립스를 찾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쓸 독이니까.’
레비가 제 부친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발렌티스의 차기 가주 자리를 동생인 라일라에게 뺏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만약 후계자가 정식으로 라일라로 교체되기 전에 현 가주인 레고트가 사망하게 된다면, 백작 위는 현재 후계자인 레비에게 돌아오게 된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패륜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해선 안 될 짓이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장남인 그를 후계자 자리에서 내치려고 했던 제 부친의 잘못이 원인이지 않은가.
아버지에게 먼저 배신을 당한 건 오히려 레비였다.
게다가 사사건건 라일라와 비교당하며 폄하된다거나, 저택에서도 대놓고 바보 취급을 당하는 등.
오래전부터 레비가 부친에게 가지고 있었던 원망의 감정 또한 적지 않았기에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버지, 그러게 왜 그런 경솔한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레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부친인 레고트 역시도 본인의 자리를 되찾겠다며 친동생인 카터 숙부를 살해한 바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레비 또한 마찬가지로, 부친에게 배운 그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다만, 자히르 독을 사용하려는 것은 아들로서 제 부친에게 행하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적어도 마지막 가는 길이 고통스럽지 않게, 한 번에 목숨이 끊어질 수 있도록 그를 배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독살한 범인은 네리아 발렌티스가 되겠지.’
무조건 그렇게 만들 생각이다.
그는 괘씸한 네리아를 멀쩡하게 놔둘 생각이 없었고, 조만간에 그녀를 꾀어낼 만한 적당한 기회가 생길 예정이었다.
이참에 같이 치워 버려야겠어. 레비가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머금었다.
“필립스. 그래서 대답은?”
“레비, 네게 자히르 독이 필요할 일이 있어……?”
“원래 손님한테 그런 걸 일일이 물었던가? 그래서 구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실례했군. 구할 수야 있지만, 비용이 꽤 들 텐데?”
“금액은 상관없어.”
레비가 테이블 위로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툭 던졌다.
레고트로부터 예산 배정을 금지당했기에 그가 가지고 있던 귀중품을 팔아 마련한 돈이었다.
‘…차기 가주인 내가 이런 짓까지 해서 돈을 만들어야 했다니.’
자존심이 상했었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어차피 머지않아 발렌티스 가문의 돈은 전부 자신의 것이 될 터였으니까.
필립스 또한, 레비가 내민 주머니 안의 금화를 확인하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지고 5일 안에 구해다 주지.”
***
“레비가 필립스 토르네를 만나러 갔었다고?”
나는 사샤에게 전해 들은 소식을 되새기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예전이라면, 단순히 친구를 만나러 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돈 문제로 두 사람의 관계가 껄끄럽고 불편해진 상태일 텐데, 굳이 필립스를 만나러 갔다고?
무언가 다른 의도나 목적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레비에게는 사람을 붙여 이동 동선을 파악한 것뿐이기에,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필립스 토르네는 각종 약품과 불법 약물을 취급하는 자였다. 고로, 레비의 목적은 뻔했다.
‘필립스에게 약을 구해서, 나에게 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몹시도 레비다운 짓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독약을 먹여 죽인다든가, 정신을 잃게 하는 종류의 약을 먹여 납치한다든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많았다. 뭐, 그렇다면야.
“사샤, 앞으로는 식사나 마시는 음료수를 준비할 때, 좀 더 꼼꼼하게 신경 써 줄래? 절대 남의 손이 닿지 않게끔 해야 해.”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실수로라도 레비의 수작에 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그가 나를 해치려고 할 때를 노려서 역습할 증거를 잡아 놔야겠군.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바로 다음 날.
“네리아 아가씨, 레비 도련님께서 야외 정원에서 같이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레비의 직속 하녀인 엠마가 나를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전했다.
“산책? 레비가?”
“네, 도련님께서 아가씨께 드릴 이야기가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
차라리 차를 마시자고 했다면, 다른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산책이라니.
애초에 그들과 나는 이런 식으로 만난 적도 없고, 만날 사이도 아니었다. 레비는 과연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분명, 무슨 속셈이 있을 테니, 일단은 들어 봐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엠마에게 긍정의 대답을 건넸다.
“좋아, 몇 시까지 가면 돼?”
***
발렌티스 저택의 야외 정원에서, 레비가 내 옆에 서서는 답지 않게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네리아. 그동안 별일 없이 잘 지냈니?”
심지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주제에, 지금은 친절하고 사람 좋은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해 볼 작정으로 대화에는 응했으나, 정말이지 이런 뻔뻔함이라니. 한결같이 짜증을 유발하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산책하면서 가족끼리 대화 좀 하자는 건데, 옆에 호위 기사까지 붙여 둘 정도라니.”
레비가 그렇게 말하며 힐끗 시선을 돌려 듀이를 쳐다보았다.
듀이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나를 보호할 수 있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뒤따르는 중이었다.
“그래도 사촌 남매 사이인데, 내가 너한테는 그 정도로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건가?”
응, 당연하지. 질문할 필요도 없는 것을 잘도 묻는구나.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소모하기보다는, 바로 본론을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보였어? 하지만 그게 호위 기사의 역할이니까. 그런데 나한테 할 말이 있다니, 무슨 일이야? 그동안 이런 적 없었잖아.”
“가족인데 그동안 대화가 너무 부족했던 것 같아서 말이야.”
“…….”
“그동안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어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식으로 지낼 수는 없잖아? 우리는 같은 발렌티스 가문의 사람이야. 이제는 불필요한 싸움은 관두었으면 해.”
반박할 거리가 넘쳐나는 입바른 헛소리였다.
하지만 일부러 한 귀로 흘리며 대답하지 않았더니, 드디어 레비의 입에서 본론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말인데. 네리아, 네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부탁? 나한테”
“응. 3일 뒤에, 세베스 백작이 우리 저택을 찾아올 예정이거든.”
“세베스 백작이라면… 황제 폐하의 보좌관이신 분이 아니야?”
“그래. 아버지의 부탁으로 발걸음을 해 주시게 되었지.”
뭐, 알 것 같기는 했다. 이것도 레고트 백부의 정계 복귀를 당기려는 노력 중 하나겠지.
황제 폐하께 자신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폐하의 보좌관을 불러 융숭한 대접이라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우리 가문에 중요한 손님이야. 그러니 아버지가 그분과 대화를 나눌 때, 네가 직접 차를 대접해 드렸으면 해. 저번에 할머니께서 오셨을 때 듣기로, 네가 차를 잘 끓인다고 칭찬을 하셨다면서?”
“차 정도는 저택의 하녀들도 잘 끓여. 그런데 왜 내가 굳이?”
“네리아.”
내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돌린 레비는 정말로 동생을 꾸짖듯,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문의 귀족이 직접 차를 대접했다는 성의를 보이자는 거잖아. 그리고 발렌티스 가문이 이런 상태라면, 너에게도 좋을 게 없어.”
“좋을 게 없다니?”
“너도 어쨌거나 발렌티스의 일원이잖아. 네가 이름 뒤에 발렌티스라는 성을 붙이고 있는 한, 가문의 평판에 따라 결국은 네 남편감이 달라질 텐데, 협조하는 게 어때?”
가문을 위한 일이라면서, 마지막 말은 거의 강요에 가까웠다. 솔직히 말하면 뜬금없는 부탁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차는 핑계겠지.
“…….”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침묵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베른 경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지?
‘확실한 건 아니고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가주님께서 몇몇 가신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더군요. 라일라를 후계자로 삼는 건 어떠냐고 말이지요.’
…아, 설마 그런 건가.
나는 고개를 숙여 레비 몰래 웃음을 숨겼다. 이제 레비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레비, 너. 나한테 직접 손을 쓸 생각이 아니었구나.
“…좋아. 할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백부님을 돕는 일이라면 나도 당연히 나서야 하지 않겠어?”
“잘 생각했어. 발렌티스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흔쾌히 나온 내 대답에, 레비 역시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먼저 돌아가 보겠다며 정원을 벗어났다.
참 알기 쉬운 인간 같으니라고.
그리고 레비의 기척이 사라지자, 근처에 있던 듀이가 다가와 나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 왔다.
“네리아 님, 혹시 함정이 아닐까요?”
“맞아, 함정.”
나는 유쾌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3일 뒤라고 했지? 나도 늦지 않게 미리 준비해 두어야겠네.”
이번에도 칼리에게 협조를 구하면 좋으려나.
나는 레비의 뒷모습을 보며 말없이 웃었다. 함정에 빠지게 되는 건, 내가 아닌 네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