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88)화 (88/172)



<88>

“…지금 이게 무슨?”

“이, 일리안 백작님!”

일리안 백작이 침실의 문을 열고 발견한 것은, 그의 부인이 샤워 가운만을 입고 레비 발렌티스의 팔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었다.

순간,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들을 향해 침실이 떠나갈 만큼 노성을 내질렀다.

“두 사람-! 대체 무슨 짓을-!”

“백작님!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지요. 오해하실 만한 상황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시는 상황이 절대-”

“듣기 싫습니다!”

일리안 백작이 레비의 말을 잘라 버렸다. 뭐라고? 오해하실 만한 상황? 말이 되는 소리를 하든가 해야지!

귀부인이 저런 차림으로 외간 남자를 만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백작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 고용인들과 하녀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가 저택을 비웠을 때를 노려 밀회를 즐긴 것이겠지. 백작의 머릿속이 분노로 타들어 갔다.

물론, 백작 부인이 다른 남자를 만날 수는 있다.

그들은 정략결혼을 한 관계였고, 귀족이 사사롭게 바깥에다 애인을 두는 일이 드물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비 발렌티스라니?’

지금, 일리안 백작가는 실각한 레고트의 정계 복귀를 돕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란타나의 명령을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같은 파벌 내에서 협업해 온 레고트를 위해 의리를 지킨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후계자라는 인간이, 맹랑하게도 그의 부인과 이런 부정한 짓을 벌여? 심지어 그의 저택에서?

괘씸하기가 짝이 없었다.

“백작님! 제발 들어 주시지요! 저는 떳떳합니다! 백작님께 부끄러운 짓을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레비는 레비대로 억울함에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지경이었다.

솔직히 백작 부인의 유혹에 넘어갈 뻔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일도 없지 않았나!

조금 전, 한 번만 놀아 볼까, 했던 생각은 이미 레비의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레비가 절박한 심정으로 옆에 있던 일리안 부인을 쳐다보았다.

“부인! 뭐라고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이런 차림으로 계신 것도, 전부 하녀가 드레스에 차를 쏟았기 때문이라고-”

“나가-!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일리안 백작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또다시 저택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결국, 레비는 분노한 백작에 의해 쫓겨나듯 일리안 저택을 떠나게 되었다.

발렌티스 백작가와 일리안 백작가. 이번 일을 계기로 두 가문이 어떠한 관계가 될 것인지는, 레비의 머리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레비는 당연한 수순으로 그의 부친의 앞에 불려 가게 되었다.

“레비 발렌티스-! 너는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고는 있는 것이더냐!”

“아, 아버지.”

“내가 저번 일을 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딴 짓을 벌여? 다른 가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거늘!”

이번 일로, 일리안 백작에게 더는 그들에게 협력해 주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의 아들이 일리안 백작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다니. 레고트로서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서류나 집기 등, 레고트의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이 차례차례 레비에게 날아갔다.

“아버지! 저는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전부 오해입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애초에 오해 살 법한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네놈이 제정신이야?”

레비가 날아드는 물건들을 피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레고트에게 먹힐 리는 없었다.

‘아니, 도대체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레비가 얼굴을 찡그리고는 생각했다.

일리안 부인을 찾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아버지께 처음부터 부탁해서 돈을 받았더라면. 필립스 토르네에게 돈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의 사촌 동생이 예정대로 필립스와 결혼을 했더라면.

‘그래… 원인은 전부 네리아 때문이야. 그게 파혼만 안 했더라도!’

애초에 네리아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소개비를 노리고 그녀를 필립스에게 붙이려고 했던 사람이 레비 본인이었지만, 그는 절대 자신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건 전부 네리아 발렌티스 그 애 때문에-!”

“가문의 후계자라는 놈이 이렇게나 생각이 모자라서야! 차라리 라일라를 차기 가주로 세우든가 해야겠구나!”

“예……?”

레고트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발언에 레비가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아버지!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발렌티스 가문의 장남은 저입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네 귀에는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리는 것이냐! 도무지 생각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네놈에게 가문을 맡길 바에야, 라일라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는 게 낫겠구나. 다음 가문 회의에서 가신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어.”

“아버지!”

라일라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자신이 장남인데도, 차남인 숙부에게 가주 자리를 뺏겼다고 오랜 시간을 고통스러워한 제 부친이?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레고트의 표정은 몹시도 진지해 보였다. 진심으로 레비에게는 다음번 가주 자리를 맡길 수 없다는 듯이.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거라!”

“…….”

레고트의 축객령에 레비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문득, 필립스 토르네가 그에게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단지, 라일라 영애가 발렌티스의 차기 가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문제를 언급해 본 것뿐이야.’

‘발렌티스 백작께서 라일라 영애를 아낀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그 말을 듣고 말도 안 되는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레비는 그의 부친이 자신을 라일라와 비교하며 꾸짖을 때도 반항하지 않고 늘 참았었다.

라일라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어 봤자 그의 동생은 황태제비가 될 것이었고, 발렌티스의 가주가 되는 사람은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전제가 무너졌다.

‘내가 발렌티스 가문의 가주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가진 것을 강제로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그가 서 있던 바닥이 와르르 무너진 것만 같았다.

“…안 돼.”

라일라는 모르겠지만, 나이가 더 많은 레비는 그들의 부모가 작위를 차지하기 위해 숙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작위를 돌려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레비는 지금, 제 부친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놔둘 수는 없어.’

아버지도, 이 모든 일의 원인 제공자인 제 사촌 동생 네리아도.

짜증은 나지만, ‘그걸’ 구하기 위해서 필립스 토르네를 다시 찾아보는 게 좋으려나.

레비가 싸늘해진 눈으로 닫힌 집무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

발렌티스 저택의 야외 정원.

나는 그곳에 놓인 테이블에서 듀이와 마주 앉아, 오랜만에 여유로운 티타임을 보내고 있었다.

“더 먹도록 해요, 듀이 경.”

“네, 네……!”

올해 기사 시험의 합격자가 된 듀이는 정식으로 기사 제복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가끔 내가 놀리듯이 부르는 ‘듀이 경’이라는 호칭에는 어색한 모습을 보였다.

‘놀리고 싶어서 더 부르게 되는 것도 있지.’

쑥스러웠는지 괜히 홍차를 한 번에 들이마시는 듀이를 보며, 나는 후후 웃음을 내뱉었다.

“황금 장미는 내 침대 옆에 잘 장식해 놨어. 고마워.”

“네! 이제 정식으로 기사 급료도 받게 되었으니, 모아서 다른 것도 더 선물해 드릴 거예요!”

“좋아, 기대하고 있을게.”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나도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저택에 라일라와 멜비나 백작 부인이 없으니, 괜히 마주쳐서 티타임을 방해받을 일도 없었다.

‘그건 좋네.’

게다가 또 하나 반가운 소식은, 레비가 벌였던 사건 이후로 란타나의 수하였던 두 가문이 신뢰를 잃고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레고트 백부의 빠른 정계 복귀 논의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한다.

하기야 후계자가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이미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누가 레고트 백부를 돕고 싶겠는가.

그리고 그 계기가 된 레비는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억울한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대체 억울하기는 뭐가 억울하다는 거야?’

애초에 필립스 토르네에게 돈을 받고 나를 팔아넘길 생각만 안 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게 아닌가.

언제나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돌아가는 그들의 편리한 사고방식에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비비도 다시 일반 하녀 자리에 복귀했으니 다행이지.’

레비의 직속 하녀인 엠마는, 아버지가 위독했다는 소식이 잘못 전해졌던 것이었다며 예정보다 일찍 수도로 돌아왔다.

‘뭐, 일찍 돌아왔어도 어차피 일은 다 끝난 뒤였으니까.’

이번에는 비비의 역할이 컸던 만큼,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자, 이제 그러면…….’

나는 달콤한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먹으며 또 다른 생각에 잠겼다.

“네리아 님, 무슨 생각 하고 계시는 거예요?”

“우리 백부님을 완전히 보내 버릴 방법.”

“네?”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공격이란 건, 상대가 회복할 틈을 주지 않고 연결해야 효율성이 극대화되는 법이니까.

이번에는 무슨 계획을 세우면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휴식 시간도 전부 지났기에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서기로 했다.

“아! 그리고 저번에 시험장에서 내 손수건을 잃어버렸다고 했지?”

“…네. 죄송해요, 네리아 님.”

나는 손수건을 언급한 것에 갑자기 시무룩해지는 듀이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생각이었어.”

“네……! 이제는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게요!”

나는 듀이와 그런 식으로 잡담을 나누며, 저택의 본관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때였다.

“레비?”

때마침 바깥으로 나서고 있던 레비를 마주쳤다.

“…….”

레비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어쩐지 살기가 느껴지는 흉흉한 시선으로 나를 말없이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에 듀이가 앞으로 나서서, 나를 보호하듯 레비와 내 사이에 끼어들었다.

짧은 대치가 이어졌다.

먼저 시비라도 걸 줄 알았더니, 레비는 내 얼굴을 보며 한번 픽 웃고는 본관을 벗어나 버렸다.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동안 저런 표정을 본 적이 많았다.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군.

‘내 결혼 문제로 이번 일이 벌어졌다고 착각하고 있을 테니, 나한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궁금하긴 했다. 일단은 파 볼까. 레비의 뒷모습을 보며 나 역시도 비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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