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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87)화 (87/172)



<87>

레비는 로이엔 경에게 받은 서류를 전하기 위해 일리안 백작가의 저택을 찾았다.

물론, 진짜 이유는 일리안 백작 부인을 만나 돈을 빌리는 것으로, 그녀가 저택에 있는 시간을 일부러 노려서 방문한 것이었다.

“어머! 레비 군이 아닌가요?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찾아왔나요?”

“그간 평안하게 지내셨는지요, 부인. 저희 가문에서 일리안 백작가로 보내는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서류를 전달하는 것 정도는 고용인을 보내도 됐을 텐데요……!”

“일리안 가문에서 저희를 도와주시는데, 저도 후계자로서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비 군의 책임감에 감탄하게 되는군요! 손님을 이런 곳에 세워 둘 수는 없지요. 차라도 대접할 수 있도록 응접실로 가시겠어요?”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일리안 부인은 레비의 등장에 반색하며 그를 응접실로 이끌었다.

테이블에 차와 다과가 놓였고, 두 사람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부인께서 예전에 말씀하시기를, 제가 부인의 죽은 동생을 닮았다고 하셨지요?”

“맞아요. 정말 좋은 아이였지요……. 그래서 레비 군에게는 항상 마음이 쓰이고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말씀하셨던 거군요.”

“그래요. 하늘에 있는 동생 대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하는 일리안 부인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레비는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떠오르려는 미소를 감췄다.

당장에 돈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라면 눈치껏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리안 부인의 표정을 보아하니 괜찮을 것 같다. 레비가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는 멋쩍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시다면, 부인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은 부끄럽지만… 부인께 부탁이 있어 찾아온 것이었거든요.”

“레비 군이 저에게 부탁을요? 말해 봐요. 가문의 문제인가요?”

“가문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일이라서…….”

동생 같다고 했지? 레비가 일부러 그녀에게 동정심을 살 수 있을법한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부인께 빌릴 수 없을까요?”

“돈이요?”

일리안 부인 역시 레비를 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어렵게 발걸음을 한 것이겠네요. 많이 곤란했겠어요.”

“예, 부인. 부인께서 저에게 해 주셨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큰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용기 내서 절 찾은 걸 텐데, 어떻게 제가 레비 군을 외면할 수 있겠어요?”

“그 말씀은……?”

“어디 빌려주는 것뿐이겠어요? 필요한 만큼 드리도록 할게요.”

일리안 부인에게서 흘러나온 말에, 레비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빌려주는 게 아니라, 심지어 그냥 주겠다고?

‘사업 수완은 대단하다고 들었지만, 가족 관계나 인간관계에서는 호구인가 보군.’

레비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일리안 부인을 언급해 준 로이엔 경에게까지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 대신, 저도 레비 군께 부탁이 있어요. 종종 저와 말동무를 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부인. 말동무 정도가 뭐가 어렵겠습니까. 저를 동생이라고 생각해 주셔도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해 준다니, 고마워요, 레비 군.”

일리안 부인이 기뻐하는 얼굴로 일어나서는 레비의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레비가 정말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제 동생이라고 생각할게요.”

“네, 부인.”

일리안 부인은 순진하게 대답하는 레비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숨겼다.

사실 그녀는, 레비의 착각과 달리 호구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애초에 호구였다면 사업을 성공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동생을 닮기는 무슨. 부모님의 유산 상속 분쟁 문제로 동생을 죽인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단지, 레비의 외모가 일리안 부인의 취향에 아주 완벽하게 들어맞았을 뿐. 그녀의 첫사랑도 꼭 레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레비와 가까워지고 싶었는데도, 백작가의 후계자를 건들 수 없는 노릇이기에 군침만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기다니! 심지어 레비 쪽에서 먼저 그녀에게 접근해 온 것이었다.

‘말동무를 핑계로 가까워지는 거야.’

레비의 손을 더듬는 그녀의 손길이 끈적했다. 그런데도 레비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을.

“…….”

그리고 응접실의 구석에서,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주의 깊게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레비의 직속 하녀인 엠마를 대신해서 그를 따라온, 발렌티스 저택의 하녀, 비비였다.

***

늦은 새벽, 나는 발렌티스 저택의 빈 창고에서 친한 동료 하녀였던 비비를 만났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네리아 아가씨, 저 왔어요.”

“비비, 어서 와. 레비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 네가 고생이지?”

“생각보다는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아가씨께 처음으로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요!”

비비가 걱정할 것 없다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는 현재 엠마를 대신하여 레비의 임시 직속 하녀 역할을 맡는 중이었는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첩자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레비와 일리안 부인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옆에서 확인해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그랬기에 나는 레비의 직속 하녀였던 엠마를 잠시 동안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수도 밖의 본가에 있는 그녀의 부친이 병으로 위독하다는 편지를 가짜로 보낸 것이었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니! 본가에 다녀와도 될까요?’

‘부모님이 아프시다는 데 어쩔 수 없지. 다녀오도록 해.’

엠마의 본가는 수도 바깥의 다른 영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이참에 휴가를 받아, 레비의 곁을 비우게 되었다.

그런데 레비는 직속 하녀를 한 명밖에 두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엠마를 대신할 다른 하녀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임시라고는 해도 레비의 직속 하녀 역할을 맡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레고트 가주의 실각으로 저택의 분위기가 뒤숭숭하고, 백작 일가의 심기가 몹시도 불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레비가 필립스 토르네를 욕하며 괴성을 지르거나 가구를 걷어차는 등, 무서운 모습을 보인 직후였다.

그런 레비의 곁에 굳이 있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이때, 손을 들어 지원자로 나선 사람이 비비였다.

비비는 하녀 시절의 나와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나와 짧은 대화도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덕분에 하녀장에게 신뢰를 회복하여 레비의 임시 하녀가 될 수 있었고, 그의 뒤를 따라다니게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어땠어?”

“갈수록 백작 부인의 스킨십 수위가 심해지고 있어요.”

비비가 무언가를 회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첫날에는 손등을 쓰다듬는 게 전부였는데, 두 번째 만남에는 몸을 껴안고, 세 번째에는 만나는 장소가 백작 부인의 침실로 바뀐 데다 은근슬쩍 허벅지를 더듬기도 하고…….”

“그런데도 레비는 가만히 있어?”

“당황하긴 하셨는데, 어쩌지는 못하시더라고요.”

나는 비비의 말을 들으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기야, 그렇겠지. 일리안 부인에게 돈을 받아야 하는데, 그녀의 기분을 거스를 수 없었을 테니.

“아! 그리고 백작 부인께서, 다음부터는 제가 따라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따라 들어오지 말라고? 백작 부인이 그런 말을 했어?”

“네. 처음이야 그렇다 쳐도 굳이 직속 하녀가 계속 옆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냐면서요.”

“그랬구나.”

나는 비비의 이야기를 들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슬슬 레오니트 황태제에게 연락을 취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

황궁 내, 레오니트의 집무실.

그곳에서는 일리안 백작이 황태제에게 몇 가지 업무 보고를 올리는 중이었다.

내일 정무 회의에 논의될 문제를, 자세히 알고 싶다는 황태제의 개인적인 요청 때문이었다.

“…하여, 곡물의 수출량을 늘리는 문제는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안건에 관해서-”

“잠깐, 일리안 백작. 설명은 여기까지만 듣도록 하겠습니다.”

“황태제 전하?”

“…갑자기 심한 두통이 생겨.”

그렇게 말하는 레오니트는 정말로 머리가 아팠던 것인지, 찌푸린 얼굴로 옆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기껏 백작을 제 집무실까지 불렀는데, 이야기를 다 듣지도 못하고 보내는군요.”

“아닙니다, 전하.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레오니트의 입에서 나온 사과에 일리안 백작이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황태제를 비웃는 채였다.

‘정치에는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괜히 뭔가를 하려고 하니 머리가 아프지.’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전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일리안 백작은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서 레오니트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물어볼 말이 많다기에 적어도 3시간은 걸릴 줄 알았건만, 황태제를 찾은 지 20분도 되지 않아 다시 황궁에서 퇴궁하게 되었다.

‘귀찮았는데 오히려 잘됐지.’

집에서 휴식이나 취해야겠어. 백작이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저택으로 향했다. 예정보다 이른 귀가였다.

“배, 백작님?”

“오, 오늘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벌써 오셨네요. 겉옷을 주시면 받아 가겠습니다.”

그런데,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고용인들이 보이는 반응이 평소와 다르게 어색했다.

“왜 그러지? 저택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주인님. 마실 것을 가져다 드릴까요?”

“됐어. 목이 마르지는 않다.”

백작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옮기려던 때였다. 저택의 1층에 처음 보는 하녀의 얼굴이 있었다.

‘다른 가문에서 온 손님이 데려온 하녀인가?’

그런데 그 하녀는 상당히 난감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힐끗, 어디론가 곁눈질을 하는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야?’

하녀가 바라본 곳은 백작 부인의 침실이 있는 장소였다.

당연하지만, 비비가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았다는 것은 백작이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

한편, 그 시각. 레비는 백작 부인의 침실 테이블에 앉아 고민했다.

만날수록 노골적으로 변하는 일리안 부인의 행동. 분명한 유혹이었다. 레비는 그 의미를 모를 만큼 남녀 관계에 무지하지 않았다.

세상에 어느 누나가 남동생의 허벅지를 은근한 손길로 쓸어내린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은 건 아니었다. 일리안 부인은 돈이 많고 외모 역시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니까.

레비는 애인이 많았고, 거기서 한 명이 늘어난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씀씀이에 비해 가문에서 받는 예산이 부족했는데, 그녀에게 쏠쏠한 용돈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가문끼리 문제가 될 법한 행동을 할 수는 없어.’

심지어 그의 부친이 일리안 백작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필립스에게 갚아야 할 돈도 받았으니, 슬슬 바쁘다는 걸 핑계로 만나는 걸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레비 군! 늦어서 미안해요.”

그런데 때마침, 일리안 부인이 나타나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몸에 샤워 가운 한 장만을 걸친 상태였다.

“제 하녀가 옷에 차를 쏟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샤워를 하게 되었지 뭐예요?”

“…….”

…그냥 딱 한 번만 놀까. 레비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벌컥-

갑작스럽게 노크도 없이 침실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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