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86)화 (86/172)



<86>

“발렌티스 가문의 가주?”

필립스가 그렇게 되묻고는 레비를 비웃듯 폭소를 터트렸다.

“최근에 라일라 영애가 황태제비 후보에서 내려오지 않았던가?”

“…내 앞에서 내 동생을 모욕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모욕이라니? 나는 단지, 라일라 영애가 발렌티스의 차기 가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문제를 언급해 본 것뿐이야.”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라일라가 차기 가주가 된다고?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발렌티스 가문의 장남은 나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말이 안 될 건 뭐야? 발렌티스 백작께서 라일라 영애를 아낀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더는 못 들어 주겠군.”

레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는 이만 가겠어.”

“가는 건 상관없지만, 내 돈이나 빨리 갚아. 그런 식으로 질질 끌며 회피하다가는 이자를 붙여서 다시 청구할 거니까.”

“…….”

레비는 필립스의 빈정거림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주점을 벗어났다.

그리고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는 화를 참지 못해 책상을 걷어찼다. 레비의 직속 하녀인 엠마는 그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필립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발렌티스 가문이 당장 어려워졌다고 해도, 친구라는 인간이 그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니!

‘뭐라고? 라일라가 차기 가주?’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고작 돈 몇 푼 못 갚았다는 이유로 면전에서 그런 식으로 모욕을 해?

“그깟 돈 따위, 더러워서라도 당장 갚든가 해야지.”

레비가 씩씩거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기는 했다. 경마장과 여자들에게 신나게 쓸 때는 좋았건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골똘히 고민해 봤지만 떠오르는 묘수는 없었다.

‘…아버지한테 말할 수는 없어.’

기사 시험 일로 가문이 난리가 난 상황이 아닌가.

최대한 부친의 기분이 좋을 때를 노려 부탁할 생각이었건만, 어찌 된 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기만 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네리아의 결혼이 무산되고 바로 말씀을 드릴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문득 레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저번 일에 손을 거들었던 사람이 로이엔 경이라고 했던가?’

분명, 발렌티스 가문의 재무실 소속이라고 했다.

그래, 돈을 구하려면 재무실로 가야지. 내일쯤 로이엔 경을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발렌티스 저택 내의 재무실에서 로이엔이 서류를 확인하며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였다.

“로이엔 경? 잠깐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말이지요.”

그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백작가의 후계자인 레비였다.

로이엔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레비에게 정중하게 자리를 권유했다.

“예, 레비 님.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어쩐 일이십니까?”

“…저는 사무실보다는 다른 장소가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레비가 재무실 내에 있는 다른 가신들을 의식하며 장소를 바꾸기를 원했다.

의미는 분명했다. 로이엔에게만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다는 것.

그랬기에 로이엔은 레비에게 더 묻지 않고, 보는 사람들이 없는 응접실로 눈치껏 자리를 이동했다.

“경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레비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약간의 돈이 필요한데, 재무실에서 융통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가 필요하신지요? 저번 일로 황궁에 낸 벌금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기는 합니다만, 레비 님의 일이니 가주님께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자라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잖아?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로이엔을 보며 레비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저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조금 곤란할 일이기에-”

비록 돌려 말했지만, 레비가 요구하는 내용은 확실했다. 횡령.

하지만 로이엔은 레비의 이야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찾아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레비는 지금, 필립스 토르네에게 채무를 독촉받아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돈을 구할 곳은 없고, 가주 부부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로이엔은 레고트의 신임을 받고자, 그의 손발이 되어 이미 비리를 저지른 바 있었다.

그러니 후계자인 레비에게도 잘 보이기 위해, 횡령 같은 부정행위 정도는 기꺼이 저질러 줄 것이다.

레비는 그렇게 판단하고는 로이엔을 찾은 것이었다.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저도 후계자이신 레비 님께 되도록 협조해 드리고 싶지만.”

로이엔이 진심으로 죄송하고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황궁에 낸 거액의 벌금 때문에 가주님께서 예산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내역서를 전부 확인하고 계시거든요.”

“아, 아버지께서요?”

“예. 예전에는 그 정도로 관리하지는 않으셨는데……. 그래서 가주님께 들키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이런 일을 눈치껏 해결하는 것이 가신의 능력 아니겠습니까?”

“…….”

“저도 언젠가는 가주가 될 테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미리 만들어 두고 싶었던 것인데.”

레비가 로이엔을 구슬렸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곤란하다는 대답만을 내놓았다.

“레비 님께서 정 급하시다면.”

그러고는, 네리아에게 오늘 오전에 전달받았던 바 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입에 담았다.

다른 의도 따위는 없는 단순한 권유라는 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혹시 일리안 백작가의 도움을 받으시는 건 어떨까요?”

“로이엔 경? 아니 무슨, 남의 가문에서 돈을 빌리라니.”

레비가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게다가 아버지 몰래 하는 일인데, 일리안 백작은 아버지의 정계 복귀를 돕느라-”

“아뇨. 일리안 백작 부인 쪽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분께서 레비 님을 좋게 보시지 않습니까?”

“백작 부인이요? 아…….”

레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일리안 백작 부인이라면 사교계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는데, 레비에게 유독 친절하고 호의를 보이는 자였다.

‘내가 그녀의 죽은 동생을 닮아 마음이 쓰인다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달라고 했었지?’

그때야 도움이 필요한 일이 없으니 그냥 한 귀로 흘렸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잘하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지도.

필립스 토르네에게 자존심을 구기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일리안 부인은 돈이 많은 사람이니까.

“마침 일리안 저택에 보내야 할 서류가 있기는 한데…….”

“로이엔 경. 그 서류, 제가 전달하도록 하지요.”

남의 호의를 이용하는 일이 나쁜 일도 아니고, 일단 넌지시 물어볼 수는 있지 않나.

별일이야 있겠어?

로이엔 경이 은근슬쩍 꺼낸 이야기에, 레비가 그렇게 대답했다.

***

내가 예전 세계에 살던 시절.

레비와 일리안 백작 부인의 불륜 사건이 들통난 후, 사교계가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끄러워진 적이 있었다.

이런 저속한 소문이나 추문은 모름지기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마련이었다.

‘일리안 부인 쪽에서 먼저 레비에게 접근했다고 했지?’

레비가 일리안 백작 부인의 첫사랑과 비슷하게 생겼다던가.

사업으로 돈이 많은 일리안 부인이, 사치로 씀씀이가 큰 레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관계였다.

‘뭐, 그때는 레비가 방계에 귀족 사회에서 입지라고는 없는 처지였으니 가능했던 거였지만.’

그러한 고로, 이곳에서의 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 세계와는 똑같을 수가 없었다.

레비는 발렌티스 가문의 후계자였고, 두 사람은 같은 란타나의 파벌에 속한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일리안 백작이 레고트 백부의 정계 복귀를 돕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예전 세계의 일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과 관련된 사교계의 소문을 파고들었더니.

‘일리안 백작 부인께서, 레비 도련님이 그녀의 죽은 동생을 닮았다면서 호의를 보이신 적이 몇 차례 있었어요.’

레비의 직속 하녀 시절을 떠올리며 사샤는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예전 세계에서 벌어졌던 일을 아는 나로서는, 일리안 부인의 호의가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죽은 동생은 무슨.

분명, 그녀는 레비에게 관심이 있다. 드러내지만 못했을 뿐이지.

‘…애초에 도덕성이 높은 사람도 아니고.’

예전 세계에서, 그녀가 부모님의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저질렀던 각종 비열한 행동들이 떠올라 잠깐 고개를 내저었다.

게다가 라일라를 도와 내 도자기 장신구 사업을 일으켜 보겠다고 했었다니. 여기서도 제 버릇을 못 버린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예전 세계에서 부모님이 하지 못한 복수를 이곳에서 내가 하게 될지도.

어찌 되었건, 일리안 부인은 레비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있고, 레비는 돈이 필요하다.

‘그러니 일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해 보는 건 어떨까?’

일리안 부인은 도덕심이 부족하고, 레비는 충동적이고 멍청하다.

‘며칠 전 엠마가 울면서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레비 도련님이 너무 무섭다고요. 저택 안에서 레비 도련님이 필립스 토르네를 욕하며 가구를 걷어차고 괴성을 지르셨대요.’

돈과 관련된 문제로, 기분이 상할 만한 일이 생겼던 게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필립스와 엮인 채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겠지.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예전 세계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발렌티스 가문과 일리안 가문이 아예 갈라설 수도 있었다.

물론, 만나서 별일이 안 생겨도 상관은 없었다.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으니 시도라도 해 볼 뿐.

그랬기에 나는 레비가 로이엔 경을 찾았을 때를 노려, 일리안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흘렸다.

그리고 다음 날.

레비는 후계자로서 일리안 가문과 친분을 쌓겠다는 핑계를 대며 그녀를 찾아갔고, 나는 두 사람의 만남의 결과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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