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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85)화 (85/172)



<85>

‘뭐라고? 메이슨 영식까지? 증거가 없을 텐데? 그리고 실기 시험에서는 분명히 감독관들의 눈을 피해 일을 처리했을 터이거늘!’

필기시험의 채점관이었던 윌리엄은 경쟁자였던 다른 학자가 고발했다고 한다.

실기 시험의 경우, 도대체 어떤 경로에서 꼬리를 잡혔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었다.

레고트가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렇게 맞이한 결과가 이것.

황제에게 소환당해 집무실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신세가 된 것이다.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면 돼.’

관련자들이 그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함을 당했다고 주장하면 된다.

“들어오십시오, 발렌티스 백작.”

조금 뒤,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황제의 시종장이 나타났다.

레고트는 일부러 더 당당한 표정을 짓고서는 황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발렌티스 백작. 백작은 오늘 이곳에 불려온 이유를 아시오?”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모함한 것 같은데, 충분히 폐하께 해명할 수 있-”

“읽어 보시오.”

황제가 레고트의 말을 끊고는, 테이블 위로 서류 뭉치를 던졌다.

레고트가 헛기침을 내뱉고는 서류를 넘겼다. 그러나 한 장, 한 장을 넘길수록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폐, 폐하 이것은.”

“어디 해 보시오. 해명.”

레고트가 입을 다물었다.

고작해야 관련자들의 증언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류는 꼼꼼하게 그의 부정을 고발하고 있었다.

윌리엄에게 건넨 돈의 출처와 주고받은 편지들, 시험 직전에 메이슨 영식에게 실기 시험을 방해할 방법을 전달했던 쪽지까지.

레고트의 목을 옥죌 증거들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그 모든 증거가 자신이 신임하던 로이엔이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것임을 레고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그런 그를 매섭게 쏘아보며 참고 있던 분노를 터트렸다.

“발렌티스 백작-! 감히 황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손을 쓰고,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위험한 곳에 유기해? 자네, 제정신인 건가-!”

“히, 히익……!”

레고트가 질끈 눈을 감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황제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뿐이었다.

***

발렌티스 저택의 야외 휴게실.

그곳에서 나는 가신인 베른 경과 대화를 나누었다.

“윌리엄 채점관은 벌금과 파면, 메이슨을 비롯한 견습 기사들은 기사 시험 영구 응시 금지와 5년간 수도에서 추방이란 말이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부네가 끌어들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모두가 듀이를 망치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무래기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요?”

“저희 가주님이 문제이지요! 거액의 벌금, 2년간 정무 회의 참석 금지, 각종 특혜 몰수까지.”

베른 경의 목소리에 좌절감이 스며들었다.

“사실상의 실각입니다! 이러다가 저희 가문이 망할 것 같습니다! 카터 님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발렌티스는 자부심의 상징이었는데!”

“그건 그렇죠.”

“대체 가주님은 네리아 님께 무슨 악감정이 있다고 그렇게까지 심하게 행동하시는 겁니까?”

뭐, 그거야 내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을 나한테 투영한 거겠지.

베른 경도 답답해서 한 말일 뿐, 나도 그도 아는 사실이었기에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정인지 의리인지, 란타나 님께서 일리안 백작에게 명령을 내려 레고트 가주님의 복귀가 당겨지도록 돕게 하셨다지만, 글쎄요.”

베른 경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안타깝게 고개를 저었다.

“네리아 님, 내년이면 성인이 되시지 않습니까. 차라리 네리아 님께서 발렌티스 가문을…….”

그렇게 말하는 베른 경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네리아 님의 과거를 생각하면 저희가 이런 부탁을 드릴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마음이 생기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가 돕겠습니다.”

“네, 기억하고 있을게요.”

나는 그의 말에 웃으며 모호하게 대답했다.

베른 경은 돌려서 말했지만, 말뜻은 확실했다. 내가 가문을 이끌어 달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무능한데도 가문 내에서 레고트 백부의 입지가 넓었던 것은, 그의 딸인 라일라가 유력한 황태제비 후보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른 경,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라일라를 배웅해 줘야 하거든요. 대화 즐거웠어요.”

“알겠습니다, 네리아 님.”

나는 휴대용 시계를 확인한 후, 야외 휴게실을 벗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저택의 정문 쪽에서 라일라와 멜비나 백작 부인이 마차에 오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일라!”

“…네리아.”

밝은 목소리로 사촌 자매의 이름을 불렀건만, 라일라의 얼굴에는 독기가 차올라 있었다.

가신들이 나에게 가문을 이끌어 달라고 제안한 것.

그 이유가 바로, 라일라가 황태제비 후보 자격을 공식적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죄를 지은 귀족의 직계 자손은 10년 간 황족과 결혼할 수 없다는 제한이 생기거든.’

오랜 시간을 황태제비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로 살아왔는데, 그 자격을 잃어버리니 얼마나 허망하고 고통스러웠을까.

사교계에서 처지가 곤란해진 것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제비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추종자가 모였는데, 그 자격이 사라진 이상 그녀의 입지가 예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라일라는 그녀의 모친과 함께 수도 밖으로 잠시간 요양을 떠나려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에 관한 뒷말이 잠잠해질 때까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으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시험에서 듀이를 죽이려고 한 인간을 안타깝게 여길 수가 없지.

나는 생긋 웃으며 라일라를 향해 걸어갔다.

“라일라, 안타까울 따름이야. 그러게 백부님은 왜 그런 짓을 해서 너를 곤란하게 만드신 걸까?”

“…네가 꾸민 짓이지?”

“응?”

“일부러 내기를 걸어서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 거지?”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뻔뻔하기도 하지. 듀이의 시험을 방해한 사람은 자신들이었으면서.

“아버지도 조만간 정계에 복귀하실 거니까, 네 마음대로는 안 될 거야. 돌아와서 보자.”

“라일라, 들어오렴.”

마차 안에서 멜비나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일라는 나를 한 번 노려보고는 마차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응, 돌아와서 보자.”

대문 밖을 떠나는 마차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친애하는 백부님의 정계 복귀가 불가능하게끔 방해나 하도록 할까.

“일리안 백작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고 했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

레비 발렌티스는 귀족들이 이용하는 고급 주점에 앉아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는 최근 사이에 그들 가족에게 벌어진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실각이라니!’

비리를 저지른 건 맞지만, 잘못한 정도에 비해 처벌이 과했다.

심지어 라일라는 황태제비 후보 자격을 완전히 잃어, 그의 모친과 요양을 떠나 버렸다.

그깟 기사 시험에 손을 쓴 게 뭐라고?

게다가 대상도 귀족이 아니라 고작 평민 따위가 아니었나. 레비가 이제는 기사가 된 평민의 얼굴을 생각하며 얼굴을 구겼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그의 사촌 동생인 네리아 발렌티스 때문이다.

그 더럽던 것이 약은 짓을 꾸며 귀족이 된 이후로, 발렌티스 가문에 풍파가 생기지 않았나.

‘…없애 버리든가 해야지.’

레비는 발렌티스 백작가의 차기 가주로서, 집안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일. 상당한 부담은 되겠지만, 사고를 위장해 네리아를 아예 치워 버려?

그는 네리아가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가 깨어났던 날을 떠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만 걷어차는 게 아니라, 평민일 때 아예 계단 밑으로 밀어 버렸을 텐데.

레비가 지날 날을 아쉬워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레비, 오랜만이잖아?”

“필립스 토르네?”

“이것 참 반가운 얼굴이로군.”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 귀족이 레비의 맞은편 빈자리에 앉았다.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직 돈을 갚지 못해 그와는 사이가 잔뜩 불편해진 참이었다.

‘필립스랑 부딪치기 싫어서 이쪽으로 온 건데, 하필이면.’

필립스 토르네와 같이 있어 봐야 들을 말은 정해져 있다.

레비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서 반가웠지만 나는 마침 일어날 생각이어서. 좋은 시간 보내게. 그럼 나는 이만…….”

“가긴 어딜 가?”

도망가려고 발을 돌린 레비의 뒤통수에, 차가운 목소리가 꽂혔다.

“자네, 빌려 간 내 돈은 언제 돌려줄 건가?”

“그, 그거야 조만간…….”

“조만간 언제?”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는 필립스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 네리아 따위와 결혼하겠다고 자신에게 알아서 거액을 갖다 바치던 반편이 같은 놈이!

말싸움이 불거져 봐야 불리한 건 레비 자신이었으나, 그런 것까지 생각하기엔 쌓여 왔던 분노가 너무나 컸다.

“내가 갚는다고 했잖아! 그 돈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형편이 기울었나?”

“네리아 발렌티스와 결혼을 한다고 떠벌리다가 무산되어서 내가 얼마나 개망신을 당했는데, 돈이라도 당장 돌려받아야지.”

그렇게 말하는 필립스의 목소리에 비아냥거림이 가득했다.

“떼먹을 생각은 하지도 말고 빨리 갚는 게 좋을 거야.”

“뭐? 떼먹어? 말이 심하군!”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에, 레비가 필립스를 노려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봐, 나는 다음 대 발렌티스 가문의 가주가 될 사람이야. 그런 내가 돈을 떼먹어? 내 명예를 건드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울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레비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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