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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네 산 입구로 돌아오니, 상석 근처의 다인용 테이블에는 자리가 거의 차 있는 상태였다.
남은 좌석은 가장자리의 소규모 테이블뿐이었지만, 특별히 중심부에 앉고 싶은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비어 있는 테이블을 아무거나 골라 착석했다.
곧 황족의 입장이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상석에 있는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오늘도 여지없이 불청객이 등장했다.
“반가워, 네리아! 이쪽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많네?”
라일라가 그녀의 추종자 영애 둘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었다.
‘며칠 전에 듀이가 필기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죽을상을 하고 있더니.’
오늘은 표정이 밝은 것을 보아, 역시나 제 부모님과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뭐, 그게 성공할 일은 없겠지만.
“우리도 같이 앉아도 되지?”
“물론이야, 환영해.”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웃으며 그녀들을 반겼다.
“그런데 라일라는 저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지 않았어?”
“맞아. 네가 심심해 보여서 말동무나 해 주려고 왔지.”
“그래서 내가 여기로 오는 걸 보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온 거야?”
‘헐레벌떡’이라는 표현을 강조하며 픽 비웃음을 흘리자, 라일라의 미간이 아주 잠깐 구겨졌다.
“고맙지만, 앞으로는 행동에 무게감을 더해 보는 게 어때? 귀족 영애인데 경박해 보여서 그래. 널 위한 조언이니 고깝게 듣지는 마.”
“…조언 고마워.”
라일라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날이잖아? 오늘이 지나면, 네리아는 수도를 떠나게 될 텐데. 벌써 쓸쓸한 기분이 들지 뭐야?”
어느새 그녀는 작위적이기 짝이 없는 울적한 표정을 짓고는 나에게 도발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네 장신구 사업은 내가 이어받아서 잘 운영할 테니 걱정하지 마. 일리안 부인께서 날 도와주기로 하셨거든.”
“…일리안 백작 부인?”
“맞아. 여러 가지 사업에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분이시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라일라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일리안 백작 부인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확실히, 돈도 많고 사업 수완도 대단한 사람이기는 했다.
이곳에서는 란타나의 충실한 수족 중 하나로도 유명했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보다는.
‘예전 세계에서, 레비랑 불륜을 저질렀던 돈 많은 귀부인이 바로 일리안 백작 부인이었지.’
-라는 기억으로 더 인상에 깊게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두 사람의 불륜이 들통 나며, 레비가 상해 사건까지 일으키고는 가문에서 제명되지 않았던가.
새삼스럽지만, 레비의 한심함은 여기나 저기나 변함이 없었다.
뭐, 똑같은 사람이니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폐하께 예를 갖추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그때, 황족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이 외침이 들려왔다.
장소는 야외였지만, 확성 마법을 사용한 덕분에 멀리 있는 곳까지도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에 이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하던 행동을 멈춘 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는 고개를 들도록 하시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시 얼굴을 들 수 있었다.
황제의 호위 기사와 호위 마법사가 언제나처럼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다른 황족인 니나렛과 레오니트도 황제의 옆에 선 채였는데, 니나렛은 귀여운 드레스를 입고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뭘 찾고 있나 했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활짝 웃었다.
‘…날 찾고 있었던 거구나?’
사랑스러운 분 같으니라고.
하지만 예법 튜터로서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기에 엄격한 시선을 보내자, 니나렛이 뜨끔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오늘은 제국에 있어 중요한 날이다. 기사란 무릇, 제국을 수호하고 제국민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가진 자로서-”
그 뒤로는 황제 폐하의 축사가 이어졌지만, 늘 듣던 내용과 크게 다른 부분은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돌려, 시험의 참가자들이 서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평민인 듀이가 서 있는 장소는 뒷줄이었기에, 찾으려는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치지 말고 다녀와.’
조금 아쉬웠지만, 나는 대신 마음속으로 힘껏 듀이를 응원했다.
***
다리스 제국의 기사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바로, 수도 외곽에 위치한 플로네 산에서 마수를 사냥하는 것이다.
대륙에는 곳곳에서 마수들이 발생하는데, 기사들의 의무 중 하나가 마수들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기사 지원자들이 치르게 되는 실기 시험 또한 마수를 처치하는 능력을 평가하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플로네 산에서 나오는 마수들은 하급밖에 없어서 위험한 일도 없어. 식은 수프 먹기지.”
“그래도 매년 시험마다 사망자가 꼭 나온다던데?”
“그놈들이 약했던 거겠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하하!”
“소설을 보면 꼭 너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죽더라.”
주변에 있는 수험자들이 잡담을 떠들어 댔지만, 듀이는 혼자 바위 위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시험장 본부에서 지급하는 전용 검과 시계는 무사히 수령했다.
그러니 시험이 시작되면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듀이는 차분한 마음을 유지한 채,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 하나를 소중하게 꺼냈다.
‘네리아 님이 주신 선물이야.’
민들레가 수놓인 손수건은, 누군가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팔 수 없는 듀이의 보물이었다.
‘나도 답례를 하고 싶은데…….’
기사 시험의 수석 합격자에게 부상으로 주어진다는 황금 장미.
사실은 듀이도 그것이 갖고 싶었다. 네리아 님께 선물해 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시험에서 듀이가 신경 써야 할 문제는 황금 장미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듀이가 이번 시험에 무사히 합격하는 것.
필기시험 때처럼, 레고트 가주의 방해가 있을 수 있으니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반드시 합격해야 해.’
탈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내밀어, 그의 주인인 네리아의 수치가 될 수는 없었다.
듀이가 굳은 마음으로 의욕을 다잡고는, 바위 위에서 일어나 개회식 줄에 서려던 때였다.
퍽-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듀이의 어깨를 밀쳤다.
그 행동으로, 듀이가 들고 있던 손수건과 시계를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저 사람은, 메이슨 영식?’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강제로 불려 간 티 파티에서 만난 자였으니까. 라일라 발렌티스의 기사가 된다고 했던가.
“평민 따위가 감히 귀족인 나를 쳐? 똑바로 안 보고 다녀?”
치기는 누가 쳤다는 말이야? 메이슨은 듀이에게 작정하고 시비를 걸 생각인 것 같았다.
의도 정도는 눈에 보였다.
지금은 시험 직전이다.
평민인 듀이가 귀족인 메이슨에게 화를 낸다면, 그걸 빌미로 그에게 불이익을 주게 하겠지.
그랬기에 듀이는 메이슨에게 맞서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
역시나, 듀이가 그의 생각대로 반응하지 않자 메이슨의 눈이 불만스럽게 찌푸려졌다.
상대할 필요도 없지. 듀이가 떨어진 소지품을 줍기 위해 바닥으로 팔을 뻗었다.
“저 손수건은 네 아가씨가 준 선물인가 보군.”
머리 위에서 메이슨이 내뱉는 목소리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듀이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메이슨이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는 듀이가 떨어트린 손수건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불쾌해, 듀이가 감추듯이 손수건을 등 뒤로 감췄다.
“평민이 얼마나 활약할지는 모르겠다만, 한번 열심히 해봐라.”
“…….”
메이슨은 빈정거리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듀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사람, 주의하는 게 좋겠어.’
***
지루하던 개회식이 끝나고 황제가 시작을 선언하자, 본격적으로 시험이 시작되었다.
수험자들이 동시에 산속으로 뛰어들었고, 듀이 역시도 뒤처지지 않도록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시험의 내용은 간단했다.
본부에서 지급한 전용 검으로 마수를 사냥하기만 하면 된다.
전용 검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마법이 걸려 있는 일종의 마도구로, 기준치의 마수를 사냥하면 은색이던 검의 도신이 옅은 붉은빛을 띠게 되었다.
‘그러니 시험 시간 내에, 색깔이 붉게 변한 검을 가지고 본부로 돌아가면 합격하게 돼.’
그런데 색깔이 변한 데서 그치지 않고 마수를 더 많이 사냥하게 되면, 붉은색이 더 짙어지게 된다.
시험에서 수석 합격자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검의 색깔이 얼마나 진한 붉은색을 띠고 있느냐로 가려진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일단은 산에서 마수를 찾아내는 게 먼저야.’
수험자가 많은 만큼, 가끔은 마수를 발견하지를 못해 시험해서 탈락하는 일도 발생한다고 했다.
듀이는 그런 억울한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 곳을 주로 공략했다.
“그르르륵.”
‘한 마리 발견!’
하급 마수는 동물과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몸체는 듀이의 키보다 작거나 반 정도가 되는 크기였지만, 위협적인 이빨과 손톱을 가지고 있기에 평범한 사람이 마주쳤다면 바로 사망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듀이에게는 위험한 수준이 아니었다. 차라리 스승님인 그레이 경이 훨씬 더 무서웠다.
듀이가 들고 있던 전용 검의 은색 도신이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번뜩였다.
네리아에게 받았던 상처 치료약은 전혀 사용할 일도 없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만나는 마수들을 간단히 해치워 나갔고, 어느 순간 듀이가 들고 있던 검이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해냈어!’
듀이가 들고 있던 검을 보며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 이걸 본부로 가져가기만 하면 정식으로 기사가 될 수 있다.
‘생각보다 너무 쉽지 않아?’
물론, 듀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으로, 다른 수험자들에게는 전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돌아가야지.’
수석 합격을 노릴 수 없는 건 솔직히 아쉬웠지만, 처음의 목적을 잊지 않기로 했다.
듀이가 왔던 길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는 걸까?’
듀이의 주변이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분명 레고트 가주가 무슨 짓을 할 것 같았는데.
듀이는 의아함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부지런히 산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산 중턱을 지나는 순간.
“거기 평민.”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듀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랑 이야기 좀 할까?”
그곳에는 메이슨 영식이 서 있었다. 누가 어떻게 봐도 수상한 태도를 한 채였다.
“…….”
역시, 아무 일이 없을 리가 없지.
듀이가 차라리 개운해진 기분이 되어서는, 들고 있던 검을 꽉 쥐었다.
메이슨 영식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람한테는 절대 당할 것 같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