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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궁의 응접실.
“별일이구나! 레오니트, 네가 먼저 나를 찾아오다니 말이다.”
“폐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사석에서는 형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건만, 레오니트 너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구나.”
제국의 황제가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기에, 레오니트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황제는 얼핏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제위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동복형제를 전부 죽인 비정한 사람이기도 했다.
레오니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황제에게 경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뿐.
‘모친의 출신 차이도 있지만, 정치나 권력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황제에게는 흠을 잡힐 만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란타나가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의 약점을 되찾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래야만 했다.
“지엄하신 폐하를 친근하게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재미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래서 어쩐 일로 찾아온 것이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레오니트가 황제에게 서류를 전달했다.
“최근에 누구인지 모를 사람으로부터 이런 투서를 받았습니다.”
“투서?”
“예. 올해 기사 시험에서 비리가 있었다더군요. 필기시험의 채점관을 맡은 윌리엄이라는 학자가 누군가에게 뇌물을 받았다고요.”
황제가 레오니트에서 서류를 받아 들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채점관이 특정 인물을 떨어트려 주면, 대가로 소정의 보상을 건넨다는 내용의 협약서였다.
“그런데 필기시험의 결과는 이미 통보가 끝나지 않았나? 그 특정 인물은 어떻게 됐지?”
“투서를 받고 개인적으로 조사해 보았는데, 정작 문제의 채점관은 당일 건강 문제로 평가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히도 이 일로 피해를 본 지원자는 없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과와 관계없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폐하께서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그건 잘했다, 레오니트.”
황제가 불쾌한 표정으로 다시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 투서는 그 윌리엄이라는 학자의 경쟁자가 보낸 건가 보군.’
자료에는 윌리엄을 제외하고는, 뇌물을 준 사람이나 기사 응시생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윌리엄이라는 학자를 취조하면 뇌물을 건넨 사람까지 밝혀질 일이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를 다시 정리했다.
“이번 시험이 끝나면, 뇌물을 받은 채점관에게 벌금을 물리고 황궁에서 제명하도록 해야겠군.”
“그런데 폐하, 뇌물을 건넨 자는 특정 인물을 떨어트리려고 했다는데, 혹시 실기 시험에서도 손을 쓰려는 건 아니겠습니까?”
“실기 시험을?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황제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하며 팔짱을 꼈다.
“이 문제는 내가 조용히 지켜볼 것이니, 레오니트, 너는 신경 쓰지 말도록 해라.”
“명령 따르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이 일이 외부에 알려져 괜한 소동이 생기지 않게끔, 입을 닫고 있는 것이 좋겠구나.”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게 확실한 사실도 아닌데, 괜히 소란을 피워 봐야 기사 지원자들에게 불필요한 혼란만 줄 뿐이니까.
1년에 한 번뿐인 기회에 사활을 걸고 있을 그들이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시험에 임할 수 있게끔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원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감시 정도는 하는 게 좋겠지.’
“시종장은 미첼 경을 불러와.”
황제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호위 마법사를 호출했다.
***
듀이의 최종 시험일이 되었다.
이날은 제국의 기사가 될 자들을 선발하는 날이기도 했지만, 귀족들에게 축제의 장이 되기도 했다.
“이번 시험의 수석은 어떤 분께서 차지하실까요?”
“강력한 후보라면, 메이슨 영식이 아닐까요? 라일라 발렌티스 영애의 기사가 되신다는 분이요.”
“그럼 황금 장미의 주인은 라일라 영애가 되는 걸까요?”
“헤론 후작가에서 후원하는 견습 기사분도 실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헤론 영애가 황금 장미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실기 시험이 열리는 플로네 산의 입구에는 귀족들을 위한 원형 테이블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 앉은 귀족 영애들이 들뜬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테이블은 달라도 그녀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거의 같았다.
바로, 매해 기사 시험의 수석 합격생에게 주어지는 ‘황금 장미’에 관한 것이었다.
“저도 황금 장미를 가지고 싶어요. 제 방에 놔두면서 평생 보물로 간직할 텐데요!”
“그럼 하나 만들어요! 저는 공방에 의뢰해서 비슷한 걸 만들어 봤거든요? 방에 장식하니까 예쁘기는 하더라고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제가 원하는 건 황금 장미의 주인이 되었다는 명예란 말이에요!”
“저도 아는데, 그게 힘드니까 껍데기라도 가지자는 거죠.”
귀족 영애들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나는 테이블 근처를 지나가는 동안, 귀에 들어오는 소녀들의 대화를 듣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기사 시험의 수석 합격생은 황제 폐하께 황금 장미를 부상으로 수여 받은 후, 이 자리에서 본인의 레이디에게 장미를 바친다.
다리스 제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전통이었는데, 1년에 한 번뿐이라는 특수성 때문일까?
황금 장미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귀족에게 대단한 명예가 되었고, 그 덕분인지 기사 선발 시험은 정식 기사들의 대련보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더 많았다.
‘뭐, 나는 예전 세계에서 지냈을 때 아버지가 후원하던 기사님께 이미 받아 봤지만.’
그랬기에 지금 와서 딱히 갖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황금 장미를 원하는 소녀들의 열망만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렇게 하여 도착한 곳은 이번 실기 시험의 참가자들이 모인 대기실이었다.
천막을 사용하여 임시로 대기 장소를 만들어 놓은 곳이었는데, 귀족 출신과 평민이 사용하는 장소를 나눠서 구분해 두고 있었다.
‘본인들도 그게 편하겠지. 그럼 듀이는 어디에 있으려나?’
내가 이곳까지 온 목적이야 당연히 듀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수험자인 듀이는 시험장에서 미리 안내 사항을 전달받아야 했기에, 나보다 일찍 플로네 산으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시험 전에, 듀이에게 몇 가지 해 줄 이야기가 있으니까.’
대기실 막사가 전부 똑같이 생긴 관계로 잠깐 헷갈리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시험의 실행 위원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에, 듀이가 있는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기실 내부로 천천히 발을 들였을 때.
“들어올 때 봤어? 구경하러 온 사람이 엄청 많아. 그런데 어떤 꼬마는 동생이 없어졌다면서 울고 있더라.”
“나는 두 번째라서 익숙해.”
“야, 아까 봤냐? 그 귀족이 콧대를 내가 그냥 확-! 확?”
“헉…….”
“…….”
시끌벅적 소란스럽던 대기실이 순식간에 적막으로 휩싸였다.
“왜… 눈에 헛것이 보이지?”
“나, 죽은 건가? 사실은 시험을 치는 도중에 마수한테 죽어서 이미 천국에 온 거였나?”
“귀족 영애? 자, 자, 자,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어? 네리아 님!”
“듀이가 아는 분이신가 봐!”
그러나 적막도 잠시, 그들의 경망스러운 호들갑이 이어졌다.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듀이가 나를 향해 달려왔으나, 그보다 더 빨리 내 앞으로 도착해 무릎을 꿇은 사람이 있었다.
“여신님, 제가 이번 시험의 수석 합격자가 되면 여신님께 황금 장미를 바쳐도 괜찮겠사옵니까?”
“저놈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저놈 저거, 미친 건가? 예쁜 분을 봐서 정신이 나간 건가?”
“시험 치기도 전에 모가지가 날아가고 싶은 거냐?”
“죄송합니다, 귀족님! 쟤가 나쁜 사람은 아닌데, 부디 용서를!”
“네리아 님께 뭐 하는 짓이야?”
듀이가 재빠르게 다가와서는 내 앞에 있던 사람을 치워 버렸다.
평민 지원자들은 귀족에게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는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불쾌하지 않았기에 웃음으로 넘겼다.
“재미있는 분들이시네.”
“들었어? 방금 여신님께서 우릴 보고 재미있다고 해 주셨어!”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시겠냐고! 너는 그냥 좀 조용히 해라! 어?”
“네리아 님, 안쪽이 계속 시끄러울 것 같은데 일단 밖으로 나가셔도 괜찮을까요?”
“응, 그렇게 하자.”
여전히 유쾌한 웃음을 흘리며 듀이와 함께 대기실을 벗어났다.
“마음의 준비는 잘되고 있어?”
“네! 필기는 몰라도 실기는 처음부터 자신 있었거든요.”
“표정을 보니까 그런 것 같네. 그래도 이건 가져가도록 해.”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듀이의 목에 목걸이로 걸 수 있게 만든 유리병을 걸어 주었다.
“이건 뭐예요?”
“세사르 님께 부탁해서 만든 상처 치료약이야. 네가 이런 데서 다칠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상처가 생기면 사용하라고.”
시중에 상처 치료약은 많다.
하지만 듀이에게 준 것은 ‘그’ 세사르가 만든 약이니만큼,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효과를 자랑했다.
제대로 투자해서 정식으로 판매할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수는 피 냄새를 맡으면 몰려든다고 하잖아? 게다가 어린 사람의 피일수록 더 달려든다고… 그러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네리아 님이 절 위해서…….”
듀이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약은 세사르가 만들었는데, 왠지 감사 인사는 나만 받는 것 같기도.
“그리고, 지금부터가 본론인데.”
“네, 네리아 님.”
진지해진 내 목소리에, 듀이 역시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백부님이 분명 널 방해할 텐데,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모르겠어. 알아는 봤는데, ‘아직은’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은 것 같았거든.”
말 그대로였다. 아직은.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번 시험은 듀이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길게. 절대 무리하지 말고, 위험한 일도 하지 말고. 믿어도 되겠지?”
“네, 물론이에요!”
듀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신뢰하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득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위에 검은색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 새들은 털 색깔이 검은색인데 이름은 초록새라고 불러. 왜 그런지 알아?”
“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눈 색깔이 초록색인 건가요?”
“아니, 저 새가 초록색을 엄청나게 좋아하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듀이의 목에 초록색 손수건을 둘러 주었다.
“그리고 제국에서 초록색은 승리를 상징해. 네 실력대로만 하면, 절대 탈락할 리 없으니까.”
“저, 네리아 님의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약속할게요!”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듀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개회식이 열리는 플로네 산의 입구로 돌아갔다.
곧, 시험이 시작될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