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짤랑-
이제는 익숙해진 종소리를 들으며, 아이리스 거리의 루체테 잡화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발렌티스!”
“칼리 님, 안녕하세요.”
칼리는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저번에 레이디께서 주문 제작을 맡겨 주신 겨울용 털모자가 완성되어 도착했답니다!”
“어서 보고 싶어요! 예쁘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는데요.”
“아마 마음에 드실 거예요. 이쪽으로 오실래요?”
나는 잡화점에서 겨울용 털모자를 주문한 적이 없지만, 칼리와 자연스럽게 모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안내한 장소는 예전에 들어온 적이 있었던 잡화점의 지하실이었다.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감사드려요, 칼리 님.”
주어를 말하지 않아도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다.
그녀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지하실의 문을 열자, 그 안에는 레오니트 황태제가 기품 있는 손동작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제 전하.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예, 오랜만입니다.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레이디 발렌티스.”
잡화점은 내가 레오니트와 연락을 취하는 창구로 이용되었는데, 이곳에서 황태제 본인을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이런 곳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마법약을 사용해 머리카락과 눈 색깔을 검은색으로 바꾼 상태였다.
“처음에는 몰라뵐 뻔했어요.”
“변장이 효과가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종종 이용해야겠군요.”
가벼운 인사말이 오간 뒤, 나는 레오니트의 맞은편에 착석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전에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제 기사가 무사히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어요.”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을요.”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오히려 디르케의 돈줄 중 하나인 발렌티스 백작을 공격할 기회가 생겨 반가울 따름이지요.”
“네, 반가운 일인 건 맞지요.”
같은 목적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오갔다.
“그러니, 이것을 부탁드려요.”
나는 저택에서 가져온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백부가 채점관을 매수한 증거물로, 로이엔 경이 나에게 비밀리에 전달한 것이었다.
“이걸 그대로 황제 폐하께 전달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뇨, 그대로는 아니고.”
나는 봉투 안에서 내용물을 꺼내, 종이에서 발렌티스 가문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찢어 버렸다.
“이걸로 부탁드리도록 할게요.”
“증거물에서 레고트 가주의 이름을 지워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어차피 이걸로는 대단한 벌을 받지도 못할 테니까요.”
“…맞는 말씀이기는 합니다.”
고작 평민 한 명의 시험을 방해한 일이다. 증거물을 제출해 봐야 백부가 받는 벌은 벌금형에 그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일이 불거져 봐야 듀이에게 오히려 불리해.’
기사 선발 시험은 제국의 중요한 행사이자 귀족들의 축제이기도 했다.
고작 평민 하나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사건을 조사한다거나 시험을 미룰 리 없었다.
‘오히려 처지가 애매해진 듀이에게 내년 시험에 재응시하라는 명령이나 내리겠지.’
나는 만약에라도 그런 억울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시다면, 레이디.”
레오니트는 호기심이 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다른 계획이 있으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에게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저희 가주님께서 또 다른 계획을 꾸미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렇게 답하며 산뜻하게 웃었다.
“레고트 발렌티스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만드는 거죠.”
백부네는 지금, 예상과 달리 듀이가 필기에 합격한 일로 바짝 약이 오른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실기 시험뿐이니, 분명 거기서 손을 쓸 거야.’
그런데 실기 시험의 과제는 플로네 산에서 마수를 사냥하는 것이다. 자연히 저지르는 비리의 수위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이것.
듀이가 필기에 정상적으로 합격하되, 기사 시험에 무언가 비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을 폐하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괜한 소란을 만들 수는 없으니 일을 공개적으로 키우지는 않겠지만, 의혹이 생긴 이상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것쯤은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방해든 뭐든 어디 한번 해보라지.’
그게 너희들의 무덤을 파는 일이 될 거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레오니트 역시도 대충 이해를 마쳤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험 날이 기대되는군요. 이건 제가 가져가서 폐하께 확실하게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레오니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제 용건도 끝났고, 지하실에 너무 오래 머물 수도 없었기에 슬슬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때였다.
“잠깐, 레이디 발렌티스께 드릴 말씀이 더 남아 있습니다.”
“네?”
“일전에 찾으셨던 마법사가 있으셨지요? 세사르라는 이름의.”
“네, 설마 벌써 찾기라도 하신 건가요……?”
“그 설마가 맞습니다. 레이디께서 대략적인 장소도 알려 주셨고, 특별히 숨어 있던 사람도 아니어서 찾기가 어렵지는 않더군요.”
레오니트가 웃는 얼굴로 나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곳으로 가시면 그 마법사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
레오니트가 알려 준 장소는 수도 내에 위치한 어떤 여관이었다.
루체테 잡화점과도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기에, 나는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듀이와 함께 곧바로 여관을 향해 이동했다.
“마법사를 만나러 간다니! 마법사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듀이는 마법사라는 말에 신기함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하기야 저택의 하인이던 듀이가 마법사를 볼 일이 없기는 했다.
“그분도 손바닥에서 불같은 걸 뿜을까요? 고유 마법 같은 것도 구경할 수 있을까요?”
“손가락에 불은 붙이겠지만, 고유 마법은 구경할 수 없을걸.”
“아… 고유 마법은 마법사님들이 일부러 감춘다고 했지요?”
“그건 맞는데, 지금 만나러 가는 마법사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서.”
나는 듀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유 마법이란, 마법 공식을 이용하는 마법이 아닌, 마법사 개개인이 전부 다르게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예를 들면, 황궁의 수석 마법사가 지녔다는 절대 방어술.
또 다른 예로는, 새와 같은 동물을 패밀리어로 삼아 시각을 공유하는 마법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마법사마다 가진 능력이 다른 만큼, 힘을 숨기기 위해 고유 마법을 감추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지금 만나러 가는 세사르의 경우에는…….
“그 사람은 타고난 마력이 약해서 고유 마법을 못 쓰거든.”
“아, 마력이 약해서… 그러시군요. 만나게 되면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요.”
“그래도 다른 부분에서 대단한 사람이니까. 이제 내릴까?”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듀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는데, 옷차림이 튀는 것 같아 듀이가 입고 있던 갈색 재킷을 겉옷으로 두른 채였다.
“네리아 님이 제 옷을 입으시다니……! 더, 더러울 텐데요!”
“안 더러워. 오히려 옷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
장난으로 겉옷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자, 듀이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랬기에 나는 한 번 웃고는 여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306호라고 했지?’
레오니트에게 받은 쪽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306이라는 숫자가 적힌 문에 노크했다.
우당탕-
문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금방 문이 열렸다.
그리고 녹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평행세계에서 만났던 천재 마법약 제조사, 세사르 본인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분이 맞으십니까? 저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계신다는?”
“네… 맞는데요.”
좀 더 차분하게 인사를 할 생각이었건만, 시뻘겋게 변한 세사르의 눈을 보며 흠칫 놀라고 말았다.
“눈이…….”
“눈병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무 설렌 나머지, 며칠 동안 잠을 못 잤거든요.”
“그러셨나요.”
“안쪽으로 들어오시지요!”
듀이와 나는 세사르의 안내를 받으며 테이블에 착석했다. 맞은편에 앉은 세사르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네리아 님, 저 사람 조금 이상해 보이는데요?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처리해도 될까요?”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이긴 한데, 이상한 사람은 아니야.”
듀이가 경계심을 보이며 귓속말로 조심스럽게 물어 오기에, 그를 대신하여 해명해 주었다.
세사르는 여전히 시뻘건 눈을 한 상태로 나에게 질문했다.
“‘요정왕의 심장’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십니까?”
“네, 맞아요.”
굳이 심리전을 펼칠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가지고 있던 어머니의 목걸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확인해 보시겠어요?”
“오오! 이게 바로 고서에서나 전설처럼 존재하던 바로 그……! 정말 실존하는 물건이었다니!”
요정왕의 심장에는 소유자의 마력량을 늘려 주는 효능이 있다,
일반인과 달리, 마법사인 그는 목걸이를 손에 쥐는 순간 곧바로 효과를 느낀 것 같았다.
“귀하신 분의 성함을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네리아 발렌티스예요.”
“존경하는 네리아 발렌티스 님.”
그리고 세사르의 입에서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사인데 마력이 부족하면 얼마나 비참한지 아느냐.
남들이 손바닥에서 불을 뿜어 대는데, 저는 손가락에 불을 붙이는 정도가 고작이다.
고유 마법도 없어서,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같은 마법사라고 취급해 주지도 않는다.
마력량을 늘리는 것이 평생의 목표였다. 마법사로서의 정체성과 자존감이 걸린 일이다.
그런 식으로 이어진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은 이것이었다.
“저를 불쌍하게 여기시어, 이것을 팔아 주십시오! 죽기 전에 제대로 된 파이어볼을 써 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파는 건 곤란하고, 이걸 드리는 것을 대가로 세사르 님에게 제안이 있어요.”
“부디 말씀을! 뭐든 하겠습니다!”
“세사르 님은 마법약을 만드는 데 특기가 있으시지요? 제 옆에서 일을 해 주셨으면 해요.”
“하겠습니다!”
“…네? 아직 아무런 조건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벌써 대답하셔도 되는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요정왕의 심장 같은 도구를 만들어 내는 게 저의 최종 목표였는데요.”
세사르가 불쌍한 척인지도 모를 애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물건이 간절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불법적인 일도 가리지 않겠습니다.”
“불법적인 일은 제가 좀……. 뭐, 어쨌거나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나는 세사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세한 계약 사항은 천천히 조율하도록 할까요?”
“가능한 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의욕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사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예전 세계에서와는 다른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