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78)화 (78/172)



<78>

저택의 구 훈련장.

나는 그곳에서 그레이 경과 함께 편하게 앉아, 듀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시험 시간이 끝났으려나요?”

“예, 아가씨. 슬슬 저택으로 돌아오는 중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그레이 경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아침에 벌어졌을 일을 떠올렸다.

레고트 백부는 듀이가 정상적으로 시험장에 도착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우리 백부님이 할 법한 짓이지.’

그런데 레고트 백부의 명령을 받아 실무를 진행한 사람이 바로.

‘로이엔 경이었어.’

쿡쿡,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최근 들어, 가문 내에서 나에 관한 칭찬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백부는 그 현상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나는 로이엔 경에게 일부러 레고트 백부의 비위를 맞춰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백부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자기랑 닮은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백부 같은 간신배는 꼭 자기 같은 간신배들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덕분에 로이엔 경은 백부의 눈에 들어 기회를 받게 되었다.

바로 레고트 백부의 손발이 되어 더러운 짓을 수행하는 것.

이번에 듀이에게 자객을 보낸 자도 로이엔 경이었다.

물론 그는 내 편이지만, 백부에게 보고를 올려야 하기에 명령을 따르는 시늉은 해야 했다.

따라서 듀이에게 자객은 보내되, 그레이 경을 함께 보내 미리 자객을 처리하게끔 했다.

‘듀이가 시험 전에 괜한 일을 겪어 컨디션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

필기시험은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인 만큼, 정신적인 부분이 크게 좌우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듀이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방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확인을 위해 그레이 경을 향해 질문했다.

“자객은 듀이 대신 아저씨가 확실하게 처리해 주신 거죠?”

“…그런데 듀이가 말입니다. 아가씨와 연관된 일에는 쩔쩔매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정신력이 상당히 강한 놈이어서요.”

“네?”

“웬만한 일로는 컨디션이 무너지는 일이 없다고 하면 좋을까요? 참 바람직한 제자이지요.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놈입니다.”

“그레이 아저씨? 그래서 자객을 대신 처리해 주신 거 맞죠?”

“어쨌거나 저는 듀이가 시험장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까지 전부 확인하고 왔습니다.”

…대화가 겉도는 것 같은데?

“아저씨, 설마?”

어쩐지 내 눈을 피하고 있는 그레이 경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구 훈련장의 문이 열리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도착했다.

“듀이!”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달려오는 듀이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듀이가 시험을 잘 치러 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는 일이었다.

“왔구나, 내 제자! 시험은 어땠었냐? 할 만하더냐?”

“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네리아 님이 만들어 주신 모의 시험지보다 더 쉬웠던 것 같아요.”

듀이가 그렇게 말하며 자랑스러운 듯이 헤헤 웃었다.

“전부 네리아 님 덕분이에요.”

“글쎄? 나보다는 듀이가 새벽까지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겠지.”

나는 웃으며, 품속에 가져온 무언가를 꺼내 듀이에게 내밀었다.

하얀색 손수건에 노란색 민들레꽃을 자수로 놓은 것이었다.

“이거, 약속했던 선물.”

“네?”

“민들레의 꽃말이 행복인 거 알아? 듀이가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며 만든 거야.”

“하지만 아직 합격 발표가 나지 않았는데요……!”

“결과를 안 봐도 합격했을 것 같아. 내 직감이야.”

“정말 받아도 되는 건가요?”

듀이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와 손수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면 그냥 다시 가져갈까?”

“아니요!”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에, 듀이가 재빠르게 손수건을 받았다. 하지만 손길만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손수건이 닳기라도 할까 손이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긴장했는지 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었다.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듀이, 지금 네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맞혀 볼까?”

“네?”

“손수건이 절대 닳지 않도록 평생 보관만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도, 도, 독심술을 하시나요?”

“그건 글쎄?”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 하나를 더 꺼냈다. 아까 듀이에게 준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럴 줄 알고 하나를 더 만들어왔어. 자, 여기.”

“설마 저에게 두 개를 전부 다 주시는 거예요? 정말요?”

“가지고 다니라고 만든 건데, 보관만 하면 아깝잖아. 편하게 써. 낡으면 또 만들어 줄 테니까.”

“…네.”

듀이가 두 손으로 손수건을 소중하게 쥔 채, 행복하게 웃었다.

그냥 평범한 손수건일 뿐인데, 듀이는 세상에 다시없는 보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행복을 느끼는 역치가 너무 낮은 거 아냐?

‘…손수건이 안 낡아도 종종 더 만들어 줘야겠어.’

자수는 어렵지도 않고,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으니까.

“아! 그런데 네리아 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듀이가 갑작스레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오늘 황궁의 시험장으로 가는 도중에 자객을 마주쳤어요.”

“응? 자객을 마주쳤다고?”

나는 홱 고개를 돌려 그레이 경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번에도 내 눈을 피하고서는 변명하듯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같이 몸을 쓰는 사람들은 몸을 움직여야 긴장이 풀리거든요. 이게 다 제자를 위한 저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가늘게 뜬 눈으로 그레이 경을 바라보다가 그냥 납득했다. 어쨌거나 그의 말대로 듀이의 컨디션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으니.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네리아 님? 스승님?”

듀이는 갑작스러운 그레이 경의 말에 따라가지 못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황궁으로 가는 길에 자객을 만났다고?”

“네. 아마 가주님이나 다른 가족분들이 보낸 것 같은데…….”

듀이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

“자객은 제가 치웠지만, 혹시 다른 데서 손을 쓰는 건 아닐까요? 제 시험지만 고의로 누락시킨다거나……. 갑자기 걱정이 들어서요.”

“맞아, 타당한 의심이야.”

나는 듀이의 질문에 긍정했다.

그 레고트 백부가 그 정도로 방해 공작을 끝낼 리가 없지.

“그런데 괜찮아. 우리는 합격 통보만 기다리고 있으면 돼.”

그분에게 미리 도움을 부탁해 놓았으니까. 나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듀이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

황궁 기사단의 행정과 직원들은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다리스 제국 기사 응시생들의 필기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는 날이니만큼, 평소보다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행정과의 신입 공무원인 알렌이었다.

“알렌! 너 어제 시험지 검토 작업 때문에 밤을 새웠잖아? 오늘은 쉬라고 했는데도 출근했네.”

“체력이 튼튼해서 괜찮습니다! 선배님들이 바쁘게 일하시는데 잡일이라도 거들어야죠!”

“이런 기특한 신입을 보았나.”

“예쁘게 봐주십시오!”

그들이 짧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데, 조금 뒤에 문이 열리며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야, 올해도 많이 쌓였군요. 저것들을 언제 다 확인하지요?”

“많이 쌓이긴 했네요. 그래도 집중하면 의외로 금방 끝낼 수 있더라고요. 힘내 봅시다.”

“딱히 힘은 안 나네요.”

황궁 소속의 학자들로, 필기시험의 채점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피곤한 기색을 띠고 있었으나, 단 한 명.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시험지를 불합격 처리시킬 사람의 이름이 듀이라고 했지?’

레고트 발렌티스에게 뇌물을 받아 매수된 채점관으로,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였다.

윌리엄은 며칠 전에 로이엔이라는 남자가 건네준 돈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선금도 많았지만, 일을 마치고 받기로 한 잔금은 더 큰 액수였다.

‘뜻밖의 수입이 생겼군.’

만약 답안지를 조작할 대상이 귀족이었다면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겠지만, 어차피 상대는 평민.

평민의 답안지에 손을 써 봤자 뒤탈이 생길 일도 없었다.

‘평민 따위가 이의 제기를 해도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윌리엄이 재빠르게 발을 옮겨, 사무실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대충 앉은 것 같지만, 순서상 이름이 D로 시작하는 응시생들의 답안지가 포함된 곳이었다.

‘그럼 빨리 끝내 보자고.’

그가 기지개를 켜고는 채점을 위해 펜을 들었을 때였다.

“고생 많으십니다! 한 잔씩 드시면서 하시지요. 더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요!”

행정과의 신입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채점관들에게 마실 것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차였기에, 윌리엄은 직원이 나눠 준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직원에게 한 잔을 더 부탁하고는 채점 작업을 시작하고 있는데.

‘…잠깐, 뭐지?’

갑자기 복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배탈이 난 것 같았다.

음료수가 상한 건가?

그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같은 주스를 마신 채점관들에게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일단 화장실을……!’

윌리엄이 급한 일을 해결하고자, 빠르게 사무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행정과의 신입 공무원인 알렌이 문제의 채점관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효과가 생각보다 더 빠르네?’

알렌은 레오니트 황태제의 지시를 받아 윌리엄의 음료수에 배탈약을 넣은 범인이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걸 먹으면 하루 내내 화장실을 못 벗어날 거라고 하셨던가.’

레오니트의 말 그대로, 윌리엄은 사무실에 돌아오지 못했다.

알렌은 그사이에 음료수 잔을 치워 약을 넣은 증거를 없앴고, 윌리엄이 맡았던 답안지들은 다른 채점관들에게 다시 나뉘었다.

“윌리엄이 배탈이라고? 대체 아침에 뭘 먹고 왔길래…….”

남은 채점관들은 일거리가 늘어난 것에 투덜대면서도, 부지런하게 작업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누군가가 채점한 듀이의 답안지에는 당당하게 합격이라는 글자가 적혔다.

***

“네리아 님! 합격이래요!”

듀이는 황궁에서 온 편지를 받고서 뛸 듯이 기뻐했다.

백부네가 빼돌리기라도 할까, 아침부터 저택 대문 앞에서 내내 기다려서 받은 편지였다.

안에는 듀이가 필기에 합격했다는 통보와 함께, 곧 있을 실기 시험에 관한 설명이 적힌 안내서가 들어 있었다.

“실기 시험은 플로네 산에서 치러질 예정이래요. 그럼 스승님께도 말씀드리러 갈게요!”

“응, 아저씨도 좋아하시겠다.”

듀이는 나에게 가장 먼저 합격 보고를 끝내고는, 이번에는 그레이 경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럼 나도 슬슬 움직여 볼까.’

자연스럽게 방을 나선 뒤, 내가 향한 곳은 저택의 도서관이었다.

듀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느라 매일같이 왔더니, 이제는 내 방처럼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도서관 내부를 걸어 어느 책장 앞에 섰다.

그리고 책장의 가장 아랫줄 오른쪽에 꽂힌 책을 꺼내 펼치자, 그 안에서 봉투 하나가 나타났다.

‘로이엔 경, 고생 많으셨어요.’

나는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안에는, 발렌티스 백작이 윌리엄 채점관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증거물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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