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재판이 끝나고 발렌티스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레고트 백부에게 이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승리라는 결과를 직접 확인하게 되면 그것 또한 기쁨이 되는 법이다.
‘차라리 재판이 열려서 잘됐지.’
오늘을 계기로 듀이에게 붙어 있는 도둑이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 낼 수 있었다.
‘앞으로는 그 문제로 듀이를 공격할 사람은 없겠군.’
재판소에서 도움을 준 꼬마에게도 따로 답례의 선물을 보내 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뿌듯함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듀이는 어째서인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듀이? 불편한 데라도 있어?”
“네? 아뇨! 불편한 데 없어요.”
말은 저렇게 해도,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왜일까? 짐작 가는 부분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아닌 것 같은데? 재판에서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죄책감이라도 들어서 그런 거야?”
“죄책감은 없어요! 재판에 져서 시험을 못 치게 되었으면, 그게 더 죄책감이 들었을 거예요. 네리아 님께 누가 되었을 테니까요.”
“그러면 왜?”
“그냥…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조금 양심의 가책이…….”
“양심의 가책? 듀이답네.”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옆자리에 앉은 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기야, 듀이는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사람들에게 도둑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자라났다.
그런 만큼,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에 양심에 찔렸을지도.
“그런데 나는 듀이가 도둑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네리아 님?”
“그 목걸이 말인데. 아버지가 정상적으로 저택까지 가져왔다면 내 것이 되었을 물건이잖아?”
“그거야…….”
“목걸이의 주인이 되었을 내가 듀이에게 선물한 걸로 할게. 게다가 아버지도 준 셈 치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렇죠, 아저씨?”
“예, 그건 제가 확실히 들었습니다. 제자야, 이건 거짓말 아니다.”
“네? 그렇지만…….”
“아버지와 내가 줬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그러니까 양심의 가책 느낄 거 없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조금 억지 같은 말이었기에 듀이가 머리를 갸웃거렸으나, 결국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 신경이 쓰이면, 이번 기사 시험에 꼭 합격해서 좋은 기사가 되는 걸로 보답하도록 해.”
“네, 그건 자신 있어요! 반드시 합격해서 좋은 기사가 될게요.”
“좋은 자세야! 이제 얼마 뒤면 필기시험이 있지?”
듀이의 의욕을 끌어 올릴 수 있을 법한 좋은 보상책이 없을까.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고민한 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듀이가 필기에 합격하면, 축하의 의미로 선물을 줄게.”
“선물이요?”
“응. 내가 직접 만들어서 자수를 놓은 손수건을 줄 생각이야.”
귀족 영애가 직접 만든 손수건을 기사에게 선물하는 것. 제국인들이 가지는 대표적인 로망이었다.
“네리아 님의 손수건이라니…….”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은 듀이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손수건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느라 양심의 가책 따위는 아예 의식 너머로 날려 버린 모습이었다.
“꼭 가지고 싶어요!”
“아가씨의 수제 손수건이라니, 우리 제자는 좋겠네.”
“네, 네! 저,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합격할 거예요!”
“그럼 가는 길에 황궁에 들러서 시험 접수나 하고 갈까?”
“예, 아가씨! 마부에게 마차를 돌리라고 이르겠습니다.”
이제는 듀이까지 완전히 밝아진 상태가 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가 달려 나갔다.
***
레고트는 저택에 돌아온 뒤, 입고 있던 겉옷을 집무실 바닥으로 거칠게 던져 버렸다.
“카터 그놈의 물건은 죄다 버린 줄 알았는데, 대체 어디서 그런 일기장이 튀어나온 거야!”
기껏 뇌물까지 써서 재판 날짜까지 앞당겨 놨더니, 오히려 조카에게 좋은 일만 되고 말았다.
게다가 라일라는 네리아가 망신당하는 꼴을 보여 주겠다며 귀족들을 끌고 왔는데, 오히려 망신을 당한 건 그들이 되었다.
“짜증 나는 것 같으니라고.”
레고트를 뒤따라온 멜비나와 레비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상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레고트가 테이블 소파에 털썩 앉자, 멜비나가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착석했다.
“백작님,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저희가 마음만 먹으면, 그 평민은 기사가 되지 못할 거니까요.”
“그 평민 놈의 문제도 있지만.”
레고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리아로 인해 발생하는 불쾌한 일은 가문 내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생기고 있었다.
“베른이었던가요? 요즘 그자가 가신들 사이에서 조카의 칭찬을 입이 닳도록 하고 다닌다던데.”
“저도 알고 있어요. 네리아가 베른 경의 장남을 니나렛 전하의 수학 교사에 꽂아 주었다지요?”
멜비나가 그 일을 생각하며 불쾌하게 미간을 구겼다.
황족을 이용하다니. 어린 것이 벌써부터 나쁜 것만 배워 가지고는.
“맞습니다. 그걸 본 다른 가신들도 은근슬쩍 조카에게 연을 만들려고 하지를 않나…….”
게다가 뭐? 네리아가 결혼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계속 가문에 남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발렌티스의 가신이라는 것들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헛소리를 내뱉는 자들을 가문에서 쫓아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백작님,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충신은 새로 생기잖아요?”
“충신? 아, 로이엔 경을 가리키는 말이겠군요.”
레고트가 저택에 돌아온 뒤,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재무실 소속의 로이엔 경.
다른 가신들이 조카에 관한 좋은 이야기를 할 때, 레고트의 비위를 맞출 목적으로 대놓고 네리아를 폄훼하고는 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대로 노려, 내 눈에 들려고 한 것이겠지.’
상황 파악도 빠르고, 눈치도 빠른 자였다. 레고트는 그런 부류를 싫어하지 않았다.
멜비나는 레고트의 기분이 아까보다 나아진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백작님. 곧 기사 필기시험이 있을 텐데, 그 평민을 그냥 놔둘 생각은 아니시죠?”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부인.”
자존심이 걸린 일이다.
조카를 수도 밖으로 쫓아낼 목적도 있지만, 하는 짓이 괘씸해서라도 이대로 놔둘 생각은 없었다.
“시험 접수 자체를 못 하게 막고 싶지만, 그건 기사단장이 주관하는 일이라 불가능할 것 같고…….”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그 평민의 시험을 방해할 방법은 많았다.
“이번 일은 로이엔 경에게 시켜 볼까 합니다.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일 처리를 얼마나 깔끔하게 하는지를 지켜보고, 마음에 들면 수족으로 삼아도 될 것 같았다.
레고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가 로이엔을 호출하고자 집사를 찾으려고 할 때였다.
“레비? 너도 있었느냐?”
집무실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의 아들 레비를 발견했다.
“아… 예, 아버지.”
“나는 바쁘니까,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고 나가 보거라.”
“그것이…….”
레비가 우물쭈물하며 레고트의 눈치를 살폈다.
최근, 그에게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바로 필립스 토르네에게 받은 돈을 갚을 길이 없어 졸지에 채무 상태가 된 것이었다.
‘네리아가 결혼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건데……!’
필립스는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것에 분노하며, 레비에게 당장 돈을 갚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레비가 받은 돈은, 그에게 배정된 예산으로는 충당이 안 될 정도의 거액이었다.
그랬기에 부친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고, 오늘 재판에서 이겨 레고트의 기분이 좋아지면 그때를 노려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
레고트의 상태를 보아하니, 지금은 말을 꺼내 봤자 본전도 못 찾고 욕만 먹을 것 같았다.
“레비?”
“생각해 보니 별일 아니었습니다. 쉬십시오, 아버지.”
결국, 레비는 오늘도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아무런 소득 없이 집무실을 벗어나게 되었다.
***
필기시험을 앞둔 듀이는, 좋아하는 검술 훈련도 전부 중단하고는 공부에 매진했다.
자는 시간과 식사하는 시간만 제외하고 책을 읽었더니, 눈을 감아도 글자가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듀이는 고된 학습에도 아무런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네리아의 수제 손수건을 받고 말겠다는 지극히 사적인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손수건을 보관할 보물 상자도 이미 준비해 놨어.’
만약 네리아에게 손수건을 받게 된다면, 절대 닳지 않도록 보물 상자에 평생 보관할 생각이었다.
듀이가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히죽히죽 웃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필기시험 당일.
“듀이, 네 실력에는 부족함이 없어. 그러니까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네리아 님!”
“나도 통과한 시험인데, 설마 네가 못 하겠느냐. 잘하고 오너라.”
“예, 스승님.”
듀이는 네리아와 그레이의 배웅을 받으며, 시험을 치르기 위해 황궁으로 출발했다.
오늘따라 머릿속이 맑았다. 어쩐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듀이는 마지막까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걸어가는 도중에도 챙겨 온 쪽지를 읽으며 머릿속에 지식을 구겨 넣었다.
뒤에서 기척을 숨긴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았으나,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아 계속 걸었다.
그리고 황궁으로 향하는 지름길의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
어느 순간,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듀이가 쪽지에서 시선을 떼고는 고개를 들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자객? 도적? 불량배?’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도 역시 복면을 쓴 사람들이 듀이의 퇴로를 가로막은 상태였다.
‘전부 합치면 7명 정도인가?’
듀이는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도, 레고트 가주가 보낸 자들이겠지. 듀이가 시험을 치러 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중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외쳤다.
“봐주지 말고 공격해라!”
그것이 신호였다.
듀이를 둘러싼 자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뭐, 이쯤이야 간단하지.’
이런 문제를 걱정했다면, 애초에 인적이 드문 지름길이 아니라 큰길로 갔을 터였다.
실력자들이긴 하나, 그레이 경이 보증한 재능을 가진 듀이에게 위협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듀이가 검을 뽑아 들고는 자객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어려움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제, 젠장! 보기보다 강하잖아?”
“안 되겠어! 그냥 피해!”
그리고,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역시, 내가 아끼는 제자!’
듀이를 따라오던 기척의 정체는 바로 그의 스승인 그레이였다.
그는 네리아의 명령으로, 듀이를 보호하기 위해 기척을 숨기고는 뒤를 따랐던 것이었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군.’
듀이는 겉보기에 착해 보여도 실력에는 자비가 없다. 그레이는 제자가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