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75)화 (75/172)



<75>

“아니, 무슨 가주라는 사람이 꼬맹이가 살자고 저지른 짓을 가지고 치졸하게 덤벼드는 건지.”

일주일 뒤, 재판소로 향하는 길.

그레이 경은 아끼는 제자가 이런 일을 겪게 되었다는 것에 커다란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9년 전에나 있었던 일 아닙니까? 거참, 구질구질해서는. 인간이 왜 그러고 산답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아저씨.”

지엄한 황제 폐하도 안 보는 데서는 욕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레이 경이 레고트 백부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유쾌하게 동조할 뿐이었다.

“이번 재판 일정을 잡는 데도 뇌물을 많이 썼겠지요? 어떻게 하는 짓이 변하지를 않아요. 쯧.”

“어쩌겠어요. 친애하는 우리 백부님은 뇌물 쓰는 것밖에 할 줄 아는 일이 없는데요.”

나는 백부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분명, 이번에도 뇌물로 거액을 썼겠지.

지금 향하고 있는 재판소는 평민들의 죄를 심판하는 곳이다.

그런 만큼 재판을 신청하는 건수가 많아, 보통이라면 신청서를 접수하고도 재판까지 최소 5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백부는 관계자에게 뇌물을 사용해 재판을 앞당겼다.

듀이에게 공식적으로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어, 그가 기사 시험에 아예 응시할 수 없도록 훼방을 놓으려는 수작이었다.

“그래도 재판장님을 매수할 수는 없어서 다행이죠. 그분은 공정한 걸로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예, 저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도요.”

“맞아요. 듀이도 들었지? 그러니까 긴장할 거 없다니까.”

“기, 긴장하지 않았어요!”

“말 더듬는 거 보니까 긴장한 거 맞는데, 뭘. 편하게 있어.”

나는 옆에서 얼음처럼 굳어 있는 듀이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차는 거리를 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직접 오는 건 처음이려나?’

귀족인 내가 평민을 재판하는 곳에 올 일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듀이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지저분한 옷을 입은 평민 꼬마가 듀이에게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순진한 눈망울을 빛내며 꽃을 내민 꼬마의 모습에 듀이의 입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꽃을 사지 않으시겠어요? 옆에 계신 아가씨께 선물해 드리면, 아가씨께서 기뻐하실 거예요!”

“꽃?”

듀이가 진지한 얼굴로 꼬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걸 드리면 네리아 님이 기뻐하실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표정에서 전부 드러나고 있었다.

“살게.”

“네! 여기요!”

“잠깐, 듀이.”

“네리아 님?”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려는 듀이를 살짝 밀어 낸 후, 나는 무릎을 굽혀 꽃을 파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안녕, 꼬마야.”

“우와. 우와아…….”

아이가 들고 있던 꽃 한 송이를 가져가, 향기를 맡으며 웃었다.

그러자 아이가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나에게 내밀었다.

“저, 저기 이거……!”

“이거 다 사면 얼마야?”

“아니에요! 그냥 드릴게요! 요정님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요정님? 예쁜 칭찬 고마워. 그렇지만 이건 네가 열심히 모은 꽃이잖아? 그냥 받을 수는 없어.”

“그래도…….”

“자, 여기 은화 한 닢.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않을래?”

“뭐든지 할게요, 요정님!”

아이가 몇 번이나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곁에 있던 그레이 경과 듀이도 귀엽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와 꼬마 역시 미소를 지었지만, 그건 두 사람과는 종류가 다른 웃음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 꼬마는 길거리에서 각종 물건을 파는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잡화점의 칼리를 통해 소개받은 전문 인력으로, 재판소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내가 미리 섭외한 꼬마였다.

‘연기를 무척 잘하는 아이였지?’

그리고 오늘, 두 사람의 눈을 완전히 속여 넘긴 것을 보며 나는 만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믿음직한 꼬마님이네.”

“최선을 다할게요!”

아이와 나는 다시금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

재판소 안으로 발을 들이자, 안쪽에는 이미 백부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도착한 상태였다.

평민들의 재판소에는 자율 참관이 허락된다.

듀이와 내가 재판에 져서 망신당하는 꼴을 전시할 목적으로, 귀족들을 이곳에 초대한 것 같았다.

‘그래 봤자 본인이 손해일 텐데.’

고개를 젓고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이번에는 라일라가 나에게 다가왔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야.”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듀이가 훔쳤던 사자 목걸이를 보란 듯이 목에 걸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겠어. 그 애 때문에 가문의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릴 뻔했잖아. 늦게라도 죗값은 치러야지. 안 그래?”

맞는 말이다. 당연히 늦게라도 죗값은 치러야지.

예를 들자면, 무능한 주제에 가주 자리가 욕심난다고 내 부모님을 죽인 너희 부모 같은.

“어쨌거나 듀이 군이 시험을 못 치면 합격도 못 하게 되니까 네리아는 수도를 떠나게 되겠네. 네가 많이 그리울 거야.”

“곧 재판 시작인데, 언제까지 그러고 서 있을 거야?”

“…….”

시비를 받아 주지 않으니, 라일라도 할 말이 없어졌는지 미간을 찌푸리고는 홱 돌아섰다.

그리고 조금 뒤, 이번 재판의 담당 재판장이 입장했다.

듀이는 피고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남은 사람들 또한 입을 다물고 의자에 착석했다.

한순간에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피고가 발렌티스 가문의 재산을 절도한 사건이군요. 고발한 측은,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이나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매튜!”

레고트 백부가 입을 열자, 참관인석에서 어떤 남자가 일어섰다.

예전 세계에서 지낼 때는 종종 마주친 적이 있었으나, 여기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곳의 어머니를 불륜으로 모함한 배신자 중 한 사람이지.’

뭐, 백부가 증인으로 저 사람을 데려올 줄 알았다.

나는 입가에 조소를 머금은 채, 매튜가 증인석으로 향하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저는 그 당시에, 발렌티스의 전 가주이신 카터 님과 동행했던 하인 중 하나입니다.”

매튜가 듀이를 돌아보았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수도로 가는 지름길에서 마차를 막아서고는, 지금 라일라 아가씨께서 걸고 계신 목걸이를 훔쳤습니다.”

“그 도둑이 피고가 맞습니까?”

“네. 시간이 지나서 자라기는 했으나, 저 아이가 맞습니다. 저는 얻어맞기까지 했기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걸 자랑이라고 잘도 떠드네.

어쨌거나, 일전에 그레이 경이 나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목격담이었다.

“알겠습니다. 피고는 반론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시지요.”

“제가 대신 반론하겠습니다.”

“네리아 발렌티스 양이로군요. 발언을 허락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장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재판이란, 하나의 연극이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다.

얼마나 증거를 그럴듯하게 꾸며 내는가, 그것을 겨루며 양측이 벌이는 싸움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재판장님, 듀이는 절대 도둑질을 하지 않았어요. 그 증거로 이것을 제출하겠습니다.”

나는 가죽 커버로 덮인 노트 한 권을 재판장에게 내밀었다.

“제 부친이신 카터 발렌티스께서 생전에 작성하신 일기장이에요. 여기를 봐 주세요.”

나는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어떤 페이지를 찾아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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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대로입니다. 훔친 것이 아니라, 제 아버지께서 듀이에게 목걸이를 준 것이었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레고트 백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격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재판장님, 잠깐 발언하겠습니다.”

“허락합니다.”

“목걸이를 도둑맞고는 조카에게 말만 그렇게 한 것이겠지요.”

백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돈도 아니고,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목걸이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에게 주는 일이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게 왜요? 상식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않나요?”

나는 그런 백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에서 만난 아이에게 적선할 수도 있죠. 저희 아버지는 가난한 평민을 돕는 분이셨어요.”

“적선을 해도 돈으로 하면 했지, 무슨 가문의 보물로 적선을 한다는 말이야? 어떻게 봐도 비정상적인 짓이 아니더냐?”

“그럼 백부님은 왜 벨라오스의 수익금 60%를 디르케에게 넘겼나요? 벨라오스도 가문의 귀중한 재산이에요. 제 눈엔 백부님의 행동이 더 비정상으로 보이는데요?”

“아니, 왜 여기서 그 얘기를!”

“그리고 증인이라면 저희 쪽에도 있습니다. 그레이 경.”

이번에는 그레이 경이 증인석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저는 그때 카터 님의 호위를 맡았습니다. 저 목걸이는 주인님께서 듀이에게 준 물건이 맞습니다. 일기장의 내용대로입니다.”

“그레이 경? 어떻게 기사 된 자가 거짓말을 내뱉으시다니요!”

뭐, 거짓말이 맞긴 하지.

하지만 그는 아끼는 제자를 위해서라면 거짓말 정도는 충분히 하는 융통성 있는 사람이었다.

매튜는 그레이 경의 발언에 황당해하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때 꼬마가 목걸이를 훔치는 모습을 같이 보셨잖습니까! 재판정에서 거짓말을 하면 손목과 혀가 잘린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무슨 말인지?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내 눈으로 본 걸 이야기한 것뿐입니다만.”

“양심 챙기십시오!”

두 사람의 증언이 충돌했다.

증인석에 선 두 사람의 언쟁이 이어졌고, 나는 그 모습을 유유히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들었다.

“발렌티스 양, 발언하세요.”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매튜에게 과연 증인 자격이 있는지를 말이지요.”

“아가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매튜, 그 당시에 아버지와 같이 있었다는 게 확실해?”

“당연합니다! 저기 그레이 경이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레이 경, 사실인가요?”

“죄송하지만, 저는 그때 매튜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레이 경!”

“그럼 매튜,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있어?”

“그, 그거야…….”

매튜가 난처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증명할 방법이 있을 리가 없지.

이미 9년이 지난 일이다.

동행인은 두 사람 외에도 더 있었으나, 그들은 이미 발렌티스 저택을 떠난 지 오래였다.

만약 그들을 찾아온다고 해도, 부모님과의 신의를 지킨 자들이 배신자의 편을 들어 줄 리 없었다.

게다가 가주인 아버지와 함께 이동한 사람의 명단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매튜가 증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불명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그레이 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레이 경은 어떻게 증명하실 건데요?”

“그레이 경은 내 아버지와 동행하신 게 확실해. 매튜 너랑 다르게 증거가 있는걸?”

나는 재판장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아버지의 일기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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