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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72)화 (72/172)



<72>

라일라가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에 금색 눈을 가진 소년이 바깥을 걸어가고 있었다.

‘저 사람은 네리아의 기사가 된다고 했던 그 평민이잖아?’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저런 평민의 이름 따위는 기억해야 할 가치조차 없으니까.

‘생긴 건 평민치고는 그럭저럭 봐줄 만하게 생겼나?’

게다가 가문의 기사들에게 듣기로는 검술 실력도 꽤 쓸 만하다고 했던가. 그래 봤자 하인 출신치고는 잘한다는 의미겠지만.

“…….”

라일라가 갈색 머리의 소년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곧 황가에서 주관하는 기사 시험이 있었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지금까지 네리아를 밟으려고 했지만 계속 실패로만 돌아갔다.

그렇지만, 반드시 네리아 본인을 건드릴 필요는 없지 않아?

네리아의 주변 사람을 이용해서 그녀의 명예를 짓밟아 버리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운 방법일지도.

게다가 저 갈색 머리의 평민 소년은 언뜻 봐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데다, 귀족의 물건에 손을 댄 도둑이기도 했다.

‘공격할 대상으로 딱 적당하잖아?’

측근이 범죄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네리아의 명예에 흠집을 낼 수 있다.

더욱이 그 평민이 기사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망신을 당하는 건 주인인 네리아가 된다.

사교계에서 소문과 추문은 만들어 내기 나름이니까.

라일라가 밝아진 목소리로 그녀의 모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어머니, 네리아의 기사가 된다는 평민이요. 기억나세요?”

“당연히 기억하고말고. 몇 년 전에 발렌티스 가문의 사자 목걸이를 훔친 범인이 아니니?”

“맞아요. 곧 기사 시험이 있을 텐데, 그런 범죄자가 제국의 기사가 되면 안 되지 않을까요?”

“그래, 아무래도 그렇겠지?”

멜비나가 라일라의 속마음을 눈치채고는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그 평민 아이의 시험을 방해할 수 있도록 네 아버지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구나.”

“네, 그리고 저는 저택에서 티 파티를 열어야겠어요. 이번에는 새로운 손님까지 초대해서 말이지요.”

그 평민 견습 기사도 함께 포함해서. 라일라의 입가에도 마찬가지로 음험한 미소가 걸렸다.

***

내 결혼이 무산된 일로, 발렌티스 백작가와 토르네 백작가는 상당히 거북한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레비는 필립스 토르네에게 소개비로 받은 거액의 돈을 돌려주지 못해 곤란에 처하기까지.

‘경마장과 애인들에게 고가의 선물을 뿌려 대느라 그 많은 돈을 전부 탕진했다고 하지?’

레고트 백부에게는 꾸중을 듣기라도 할까 봐, 대신 돈을 갚아 달라는 말을 아직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는데 과연 어떻게 해결하려나?

베른 경을 통해 들은 소식을 떠올리며, 내가 이 문제를 이용할 방법이 없을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네리아 아가씨!”

문이 열리며 사샤가 안으로 들어왔다. 다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사샤? 급한 일이라도 있어?”

“네, 아가씨. 지금 당장 저택의 야외 정원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듀이 군이……!”

“듀이? 듀이가 왜? 설마 훈련 중에 다치기라도 했어?”

“아뇨, 다친 건 아닌데…….”

사샤의 입에서 듀이의 이름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고는 사샤가 전해 준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찌푸렸다.

“뭐? 라일라가 듀이를 티 파티에 데려오게 했다고?”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두 사람에게는 전혀 연결 고리가 없다. 라일라가 호의적으로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나는 거의 뛰다시피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이며, 저택의 야외 정원으로 급하게 향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여 목격한 장면은, 듀이가 라일라와 레비를 비롯한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모욕을 당하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해서, 티 파티에 새로운 손님을 초대해 보았답니다. 이쪽의 메이슨 영식은 제 기사가, 듀이 군은 네리아의 기사가 될 예정이에요.”

“메이슨 영식과 듀이 군. 시험에 합격하면 기사 동기가 될 텐데, 친하게 지내시면 좋겠네요!”

“그래서 두 분을 부른 거랍니다. 듀이 군, 디저트 들도록 해요!”

“듀이 군? 지금 먹지 않고 뭘 하는 거예요? 라일라 양이 친절히 권해 주시고 있잖아요?”

“어머? 포크는 그렇게 사용하는 게 아닌데요? 아… 듀이 군은 평민이라고 했죠.”

“네리아 영애가 의외네요. 귀족 출신 기사님을 옆에 둘 줄 알았는데, 예법도 모르는 사람을……?”

“라일라 영애의 기사가 되실 메이슨 영식과 수준 차이가 심한데요?”

“다들 심한 말은 말아 줘요. 네리아는 8년을 평민 하녀로 지냈잖아요? 듀이 군은 네리아와 함께 고용인 신분으로 지냈던 인연으로 견습 기사가 된 거랍니다.”

“아… 그렇다면 네리아 영애의 수준과 잘 맞는 분이었네요!”

“그런데 지금까지 하인이었다면, 시험에 합격할 수나 있겠어요? 기사 시험은 아무나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시험이 아닌데요?”

“본인이 뽑은 견습 기사가 시험에 떨어지면, 네리아 영애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 되겠어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 네리아 영애가 실패하는 꼴을 드디어 구경할 수 있겠네요!”

테이블이 저열하고 악의 가득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훈련 중인 듀이를 찾아서 이곳으로 강제로 끌고 왔겠지.

듀이는 정식 기사도 아닌 가문의 고용인 입장이었고, 그들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겨냥하는 모욕의 대상은 듀이가 아니라 나였다. 듀이는 그를 위한 도구로 쓰였을 뿐.

나를 건드는 걸로는 통하지 않으니까 만만한 듀이를 건드려?

평민인 듀이는 귀족인 그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

내가 있는 곳에서는 듀이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듀이가 어떤 기분일지는 잘 알 것 같았다.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분노로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모욕을 당하는 대상이 나였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듀이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것들이, 누구한테 감히…….

“야, 너 요즘 손버릇은 고쳤냐? 나라면 부끄러워서 기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건데, 너도 참 대단하다?”

“손버릇이라뇨? 레비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 이놈이 사실은 말이죠.”

레비가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듀이의 옆머리를 검지로 밀기 시작했다.

그 저속한 행동에 듀이의 머리가 양옆으로 흔들렸다.

“…….”

나는 마음을 다잡고는 테이블을 향해 침착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입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몇 년 전에 도둑질을… 아악-!”

레비가 신나게 입을 놀렸지만, 그의 말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내가 곧바로 그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듀이의 옆머리를 건들고 있는 레비의 손가락을 붙잡아 사정없이 꺾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레비, 너 아직도 손버릇을 못 고쳤어? 언제 고칠래?”

“이게 미쳤나! 무슨 짓이야?”

“다들 안녕하세요! 그리고 라일라, 듀이를 초대하려면 나도 같이 초대해 주지 그랬어? 나만 소외된 것 같아서 조금 섭섭하네.”

“네리아! 지금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내가 물었잖아!”

“레비, 대륙에서 웨튼 전쟁이 일어난 연도는 언제일까?”

“갑자기 무슨……?”

“모르는 거야?”

나는 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듀이는 알아?”

“제, 제국력 271년입니다.”

“맞혔어! 레비, 넌 견습 기사도 아는 걸 모르는 거야? 제발 공부 좀 해. 나라면 부끄러워서 차기 가주가 될 생각은 하지도 못했겠다.”

“뭐?”

레비의 무식함을 지적하자, 그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테이블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가라앉았다.

티 파티의 참석자들이 레비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티 파티에 메이슨 영식을 초대하면서 듀이 군을 같이 초대해 봤어.”

반대쪽에 앉아 있던 라일라가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기사 지망생이니까 친해지면 좋잖아? 설마 듀이 군을 불렀다고 화난 건 아니지?”

“화난 건 아닌데, 네 행동이 실망스럽게 느껴지기는 했어. 주인의 허락 없이 아랫사람을 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데.”

나는 몹시도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황태제비 후보라는 네가 그렇게 기본적인 것도 몰랐다니…….”

“듀이 군은 아직 정식 기사인 것도 아니잖아? 발렌티스 저택 고용인의 고용주는 내가 되기도 해.”

“듀이를 내 기사로 확정해 주신 분이 백부님인데? 너 설마 아버지의 결정에 대들기라도 할 생각이야?”

“…….”

레고트 백부를 끌어들이자, 라일라도 더는 반박할 수 없었는지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에 나는 고개를 돌려 듀이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듀이는 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모욕을 당하면서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나, 정말로 마음까지 괜찮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듀이는 아직 훈련이 남았지? 먼저 가 보는 게 좋겠어.”

“네리아 님…….”

듀이가 내 눈치를 살피기에, 나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웃으며 듀이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듀이. 나중에 보자.”

“…네.”

주인이 자신의 사람을 돌려보내겠다는데 굳이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듀이가 정원을 떠났고, 나는 그가 앉았던 빈 의자를 채우고는 티 파티의 참석자들을 살펴보았다.

주로 라일라의 추종자들이었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한 명.

아마도 대화에서 언급되었던 메이슨 영식이라는 자 같았는데, 이름 정도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실력이 꽤 괜찮은 자라고 했던가.

나는 참석자들의 면면을 빠르게 파악하고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듀이를 대신해서 제가 대신 참석해도 괜찮겠지요? 불청객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슬플 거예요,”

“불청객이라뇨! 네리아 양의 참석은 언제나 환영인걸요!”

“세라, 네리아가 사용할 새 찻잔을 가져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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