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70)화 (70/172)



<70>

종종 소설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였다. 중요한 물건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이유는.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 것을 예감했기 때문에.’

설마 어머니도……?

근거도 없는 억지 추측에 가깝기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 부모님은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목숨을 잃었다.

그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예상하고, 할머니에게 목걸이를 맡겨 둔 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게 되면 어머니에게 큰일이 생긴다고 해도, 내가 할머니에게 목걸이를 돌려받을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그렇지만 부모님의 죽음은 사고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세계에서의 8년 전.

부모님은 대부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남부로 향하던 중, 빗길에 마차가 추락하여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분명 그랬었다.

‘…그런데 사고가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꾸민 계획이었다면?

돌이켜 보면, 예전 세계의 할머니는 아무런 지병도 없이 건강한 체력을 자랑하는 분이셨다.

이곳에서 대부인이 위독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평행세계는 비슷해도 똑같지 않으니,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세계의 할머니는 어떤 이유로 건강이 악화됐던 거지?

“아가? 표정이 왜 그러니? 목걸이에 문제라도 있는 거니?”

“아뇨, 할머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부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할머니께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어요.”

“뭐든 물어보렴. 무엇이 되었든, 아가의 행동은 나에게 무례가 되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8년 전에요. 할머니는 어떻게 아프셨던 거예요?”

“8년 전?”

순간적으로 대부인의 표정이 어둡게 흐려졌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배려한 것인지, 그녀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페스토 병에 걸렸었어.”

“페스토라면… 전염병이요?”

페스토는 몇십 년 전에 대륙에 유행한 바 있었던 전염병이다.

젊은 사람이 걸리면 감기처럼 쉽게 지나가지만, 대부인 정도 되는 나이의 사람이 걸렸을 때는 목숨이 위험해지기도 했다.

“대유행 이후로는 거의 없어진 병 아닌가요? 대체 어떻게……?”

“남부 저택에 떠돌이 상인이 왔었어. 그런데 하필 그 상인에게 페스토 병에 걸려 있었지.”

“떠돌이 상인이요?”

“그래…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로 그 상인을 저택 안으로 들이지 않았을 거야.”

대부인이 회한에 잠겨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위로하는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우연이 아니야……!’

누군가가 고의로 대부인의 집에 전염병이 걸린 사람을 보낸 거다.

대부인을 아프게 만들어서, 내 부모님이 그녀를 찾아갈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부모님이 급하게 남부로 향했을 때를 노려 부모님을 습격하고는, 살인을 마차 사고로 위장한 건 아니었을까?

주변에서 부모님의 목숨을 노리는 수상쩍은 움직임을 감지했다고 해도, 대부인이 위독한 상태인데 가지 않을 수도 없었을 테니.

더욱이 가문에서 가장 강한 기사인 그레이 경은, 그날 병에 걸려 호위로 따라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레이 경이 아팠던 것 역시도 어쩌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만약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그런 짓을 벌인 사람은 누굴까?

굳이 어렵게 추측할 필요는 없었다. 부모님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레고트 백부.’

하지만 백부는 이렇게나 중대하고 커다란 사건을 깔끔하게 처리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

예전 세계에서도 사사건건 아버지를 공격했지만, 항상 실패만 했던 인간 아니던가.

분명, 조력자가 있다.

그리고 예전 세계와 이 세계에서 백부의 인간관계에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란타나. 그녀의 존재였다.

로이엔 경이 나에게 말했었다.

백부와 란타나가 오랜 시간 협력 관계를 맺어 왔다고.

‘부모님이 죽기 전부터 두 사람이 손을 잡았던 거야…….’

란타나는 백부가 발렌티스의 가주가 되도록 돕고, 백부는 가주가 된 후에 란타나를 지지하도록.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추측에 신빙성을 더할 수 있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레오니트 황태제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졌던 날, 그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였다.

‘레이디는 아마 저를 다시 찾으시게 될 겁니다. 저의 적은 당신의 적이기도 하니까요.’

그는 란타나가 나의 적이라고 말했다.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그가 했던 말도 이해가 된다.

부모님을 죽인 원수는 나에게도 당연히 적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어째서인지 레오니트 황태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가주 자리가 욕심났다고 해도 가족을, 친동생을 죽여?

그리고 전염병에 걸린 대부인이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백부에 대한 혐오감에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 사람. 란타나도 첫인상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잘 생각해 보면, 그녀가 그 위치까지 올라가는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리가 없지.

물론 그럴 수는 있다. 이해한다. 권력을 얻는다는 건 그런 거니까.

하지만, 그 대상이 내 부모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할머니.”

나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고는 할머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제는 다 나아서 건강해지신 거죠?”

“그럼. 지금은 아주 건강하단다.”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아프시면 안 돼요.”

나는 대부인을 껴안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선은 추측이 사실인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수도로 돌아가는 즉시 레오니트 황태제를 만나 봐야겠어.’

***

목적이 목적인 만큼, 레오니트를 드러내 놓고 만날 수는 없었다.

‘나도 황태제가 니나렛을 찾아올 때를 노리는 방법이 있겠지만.’

레오니트는 니나렛을 자주 찾는 것이 아니기에 그때가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데다, 그보다 더 쉽고 빠른 방법이 하나 있었다.

짤랑-

맑은 종소리를 들으며 입장한 곳은 아이리스 거리에 위치한 루체테 잡화점이었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 되는 만큼, 이제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데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어서 오세요, 레이디! 또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루체테의 주인, 칼리는 이번에도 붙임성 있는 태도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가게 내부를 살펴보았다. 지금은 나 이외에 다른 손님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나는 칼리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칼리 님. 오늘은 블랙 다이아몬드를 찾고 있어요.”

“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조금 감탄했다. 직업의식이 투철하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면 응대 방식이 정해져 있는 걸까.

그동안은 평범한 손님으로 왔던 내가 ‘블랙 다이아몬드’를 찾은 것에 동요할 법도 하건만, 칼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뚜벅뚜벅. 말없이 그녀를 따라 걸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가게 안에 숨겨져 있는 어느 공간이었다.

‘내부에 지하실이 있었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잡화점은 위장일 뿐이었다.

주변에 마력석이 박힌 것을 보아하니, 방음 등의 각종 마법이 걸린 것 같기도 했다.

“원하시는 걸 말씀해 주세요.”

그곳에서 칼리는 여전히 예의 바른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 잡화점의 정확한 용도나 목적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칼리에게 의뢰할 내용은 정해져 있었다.

“이곳의 주인을 만나고 싶어요.”

“루체테의 주인은 저이니,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면 돼요.”

“아뇨, 이곳의 ‘진짜’ 주인이요.”

“…….”

칼리가 경계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하실 내부에 잠깐 침묵이 흘렀으나, 나는 말없이 미소 짓기만 했다.

“…레이디께서는 이곳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는가요?”

“아마도요. 그분께 제가 뵙고 싶어 한다는 말씀을 전해 주실래요?”

“일단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거절하실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알고 계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칼리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녀의 눈빛에 흥미로움이 스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

잘 훈련된 새 한 마리가, 부리로 내 방 창문을 두드리며 발신자 미상의 쪽지 하나를 가져왔다.

내용은 단 한 줄.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는 상당히 간결한 메모였다.

***

나는 수도의 한 미술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하지만 폐관 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미술관 내부에는 방문객이 거의 없었다.

전시 중인 그림을 천천히 구경하며 미술관의 동쪽에 있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찾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황태제 전하를 뵙습니다.”

“레이디 발렌티스를 다시 만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레오니트가 벽에 걸린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나는 몇 걸음을 더 걸어가,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마찬가지로 같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레이디께서는 제가 루체테의 진짜 주인인지 어떻게 아셨는지요?”

“찍었어요.”

“찍었……? 예?”

당황한 목소리였다. 그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계속 그림만 쳐다보았다.

“여성용품을 파는 잡화점에서 ‘블랙 다이아몬드’를 찾는 손님을 발견하고는, 잡화점은 위장이고 실제로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짐작을 했어요.”

“…….”

“그런데 전하께서는 수확제에서 제 머리핀을 굳이 칭찬하셨죠. 그건 루체테에서 구한 것이었는데요. 그래서 혹시 전하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 정도 이야기로는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

하지만 평행세계의 레오니트 대공의 측근들이 잡화점에 모여 있는 걸 보고 알아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랬기에 찍었다는 거짓말로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만 대답했더니, 황태제도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때는 일부러 힌트를 흘렸던 게 맞습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 연관성으로 제가 루체테의 주인이라는 걸 알아내셨다는 겁니까?”

“그래서 찍었다고 말씀드린 것이었어요. 솔직히, 저도 확신은 전혀 없었거든요.”

뭐, 거짓말이지만. 확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루체테에 안 갔겠지.

“만약 나오는 사람이 제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하셨습니까?”

“그러면 사람을 착각했다고 대충 둘러댔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자라 온 환경 때문인지 감이 좋아서요.”

나는 고개를 돌려 레오니트와 눈을 마주치고는 웃었다.

“실제로도 전하께서 이렇게 나오셨잖아요?”

“…레이디 발렌티스는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꼭 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레오니트의 입가에 유쾌한 미소가 걸렸다. 이곳에서는 두 번째로 목격하는 그의 솔직한 미소였다.

두 사람이 다시 그림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나는 슬슬 그를 찾은 목적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황녀궁에서 뵈었을 때, 전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제가 전하를 다시 찾게 될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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